세상사는 이야기

산티아고 추억 - 몸빼

甘冥堂 2020. 9. 6. 11:34
몸빼

5천원짜리, 흐늘흐늘 몸에 들러붙는,
그렇지만 얇고 가벼우니 시원하다.
오죽하면 냉장고 바지라 했을까?
남자, 특히 꼰대가 입기엔 좀 남세스럽지만
타국에서야 뭐 어떤가?

마누라가 이 옷 입은 것을 보면서
2년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던 생각이 난다.

냉장고 몸빼
참으로 시원했었지.
저녁에 주물주물 빨아널면 다음날 새벽에 바로 입을 수 있어, 그거 두 벌로 50일을 버텼지.
여행을 끝내고도 버리기 아쉬워 집으로 가져왔지만, 마누라가 아마 버렸을 거야.

산티아고.
한여름 8월16일에 다시 가려고 예약 직전까지 갔었는데, 그놈의 코로나로 인해 접어야 했다.
예정대로라면
9월초인 지금쯤 순례길 중간 어디쯤을 걷고 있을거야.

2018. 09. 06 기록에
"Calzadilla de la Cueza.
걷기 17일째. 17.5km. 실제로 걸은 거리 28km.

老馬識途 늙은 말이 갈 길을 안다
삼국지 등 중국소설에 많이 나오는 말이다.
과연 그럴까?

오늘 새벽.
몇 번 본적있는 외국 노인 2분과 함께 출발했다.
지도 상에는 출발점부터 첫번째 마을까지 17km.
가는 길에 마을이 하나도 없는 지루한 코스라고 되어 있다.
동틀 무렵 갑자기 마을 하나가 나타난다.
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당시 일기장 내용이다.
길을 잃고 헤매느라 몹시 힘든 날이었던 것 같다.


예정대로 촐발했다면
지금쯤 혼자서 바쁘게, 혹은 느릿느릿,
아무 생각없이, 혹은 깊은 생각에 잠겨,
혹은 눈물에 젖어 걷고 있을지도 몰라.

그 길,
뻔한 걱정과 헛된 욕심으로 마음이 어지러울 때 생각나는 길.
언제 다시 갈 수 있을까?

포스트코로나.
다시는 예전같은 시절은 없을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
정녕 그런 세월은 다시 오지 않으려나?

새삼 몸빼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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