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김형영 시인의 시 모음

甘冥堂 2024. 12. 24. 19:21


꽃밭에서 / 김형영

어두워서
하얀 꽃
바라보고 있으면
꽃은 오히려
나를 바라보고

나를 바라보는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비로소
나를 본다.

눈 뜨고는
차마
바라볼 수 없는
누더기 같은
나를 본다.



통회 시편 3 / 김형영

나 비록 죄 지은 몸이오나
주님께 고백하였더니
내 허물 덮어주시고
내 죄 묻지 않으셨도다.

철없는 노새처럼 되지 않으려고
뙤약볕에 시든 풀잎처럼
나 주님 앞에 엎드렸더니
내 머리에 손 얹으셨도다

죽음의 파도가 밀어닥쳐
주님 품에 뛰어들었더니
이 몸 안아주시고
내 갈 길 일러주셨도다.



기억할지어다 / 김형영

한반도의
반도의 반도 사람들은
기억하지
꼭두새벽이면
새끼 몇 발씩 꼬아들고
변산으로 떠나던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하지
그 떠나던 뒷모습을

아침이 되고 낮이 지나
마침내 어둠이 대지를 누르면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너무 어두워
눈으로 기다리지 못하면
귀로 기다리다가,
지쳐 돌아와 잠에 들면
아, 어느 사이 따뜻해오던
아랫목

그래 우리들은
기억하지
그날을,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무가 되고 불이 되어 돌아온
그날을

기억하고 기억하고 또
기억할지어다.
떠나는 것은 따뜻한 것임을,
따뜻한 것은 남몰래 돌아오는 것임을,
지금은 우리가 떠난 사람들임을



고향 생각 / 김형영

저 안개 걷히면
고향 보이리.

가지는 못해도
먼 하늘에
가는 듯 눈 감아
길을 내어서
산길 들길
물길 내어서
그리움에 밀리어
가보는 고향

저 안개 걷히면
고향 보이리.



나이 40에 / 김형영

돼지 눈에는
부처님도 돼지로 보이는 것이라고
노스님 말씀에
"그야 그렇겠지요"
무심코 머리 끄덕였는데

그때 나이 곱절 가까운
40이 넘은 오늘에
하늘의 별을 세듯 곰곰 생각해보니
그 말씀이 나를 두고 한 말씀만 같아
밤낮없이 후회롭다.

오늘 내 눈에 보이는 것
개도 돼지도
그네 새끼들까지도
다 안쓰럽고 가련해
사람같이만 보이나니
어제의 나같이만 보이나니.



[ 김 형 영 시인 약력 ]
- 1945년 전라북도 부안 출생.
-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 1966년 《문학춘추》로 등단.
- 시집으로 『침묵의 무늬』(1973),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1979), 『다른 하늘이 열릴 때』(1987),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1995), 『새벽달처럼』(1997) , 『홀로 울게 하소서』(2000), 『낮은수평선』(2004),
  『내가 당신을 얼마나 꿈꾸었으면』(2005), 『나무 안에서』(2009) 『땅을 여는 꽃들』(2014), 『화살시편』(2019) 등이 있음.

- 현대문학상(1988), 한국시협상(1993), 한국가톨릭문학상(2005), 육사시문학상(2009), 구상문학상(2009), 박두진문학상(2015),      신석초문학상(2016) 수상.

- 2021년 숙환으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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