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이, 사내로서의 수치의 극인 궁형을 당하고, 이에 깊이 탄식하며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
몸은 망가져 쓸모가 없어졌구나 !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물러나와 깊이 생각한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詩나 書에서 뜻이 은미하고 언사가 간략한 것은 마음속에 있는 의지를 실현하고자 하였던 것이었다.
옛날 서백(西伯)은 유리에 억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역(周易)을 추연하였고,
공자는 진과 채에서 액난을 겪고 나서 春秋를 지엇으며,
굴원은 추방된 뒤에 이소를 지었으며.
좌구명는 실명하고 나서 國語를 편찬하엿고,
손빈은 다리를 잘리고 나서 兵法을 논하였으며,
여불위는 촉으로 좌천되고 난 뒤 세상에 呂覽을 전하였으며,
한비자는 진나라에 갇힘으로써 說難과 孤憤이 세상에 있게 되었으며.
詩 300편도 대체로 賢聖들이 자기의 비분을 촉발하여 지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울분이 맺혀 있으되 그것을 시원하게 풀어버릴 방법이 따로 없어서
이에 지난날을 서술하여 미래에다 희망을 걸어본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마침내 陶唐이래 獲麟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찬술하였는데 그 기재는 黃帝로부터 시작하였다.
(사기열전.太史公自序)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장안성 동북쪽 섬서성 한성이라는 두메 산골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황하가 흘러드는 곳으로 용문이라는 나루가 있다. 물살이 거세어 잉어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기가 어려운 곳으로, 그 곳을 통과하는 것을 登龍門이라 했다. 그곳에서 19세 까지 살았다.
19세에 서안으로 이사를 했다. 당시 한 무제는 자신의 사후 무덤(무릉)을 만들기 위해 신도시를 건설했는데 이곳에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중에 사마천도 이곳으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
20세이 이르러. 사마천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천하를 유람하게 된다. 당시 중국의 면적은 약 320만 평방키로 (우리나라 20만 평방키로)로 그 당시로도 이미 엄청난 제국이었는데 그의 대부분을 주유했다 한다. 이 여행이 그의 일생에 큰 자양분이 되었고 역사를 편찬하는데 아주 중요한 밑바탕이 된 것이다. 2~3년의 여행을 끝내고 郎中(일종의 예비관리)가 되었고, 이 기간 중에 동중서나 공안국 등에게 사사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36세때 천자가 태산에 奉禪의식을 거행할 때 그의 부친 사마담은 태사령으로 봉선의식의 담당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천자에게 미움을 받아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그만 화병으로 죽게 되었다. 그는 아들 사마천에게 史官이 되어 자기의 유업을 이으라고 유언하였다. 사마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관이 되었다.
40세 때 太初曆(달력)을 만들었는데 , 달력의 의미는 시간 관념을 확고하게 해 주어 역사서를 집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시간 관념을 확실하게 정립할 수 있었다, 또한 젊었을 때의 여행은 공간의 개념을 확실하게 만들어 주어, 사관에게 필요한 時空의 개념을 확실하게 정립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나이 47세 때 李陵 장군을 변호하다가 황제의 미움을 사게 되어 옥에 갇히게 된다. 당시 이릉 장군은 흉노와의 싸움에서 여러번 승리하였으나 마지막 전투에서 병사 5천으로 흉노의 3만 대군과 전투하다가 크게 패하였다. 병사 4백 명만 돌아올 수 있었고, 이릉 장군은 중과부적으로 그만 포로가 된 것이다.
이때 사마천은 이릉장군의 패인은 그 지휘계통의 잘못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는데, 그 지휘계통에는 황제의 처남인 이광리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광리를 비판한 꼴이 된 것이다. 다음 해에 장안에는, 이릉 장군이 흉노들에게 병법을 가르킨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이 소문을 들은 천자는 이릉 일가를 모조리 죽이고 사마천에게도 사형을 내렸다.
당시 형법에는 사형을 면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는데, 하나는 속전 50만 냥을 내고 풀려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궁형을 받고 풀려나는 것이었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속전을 낼 수 없는 사마천은 스스로 궁형을 자청했다.
궁형이란 생식기와 고환을 모두 잘라 버리는 형벌이다. 생식기를 자른 자리엔, 즉 요도에는 거위털을 뽑아 거위털 구멍을 생식기에 꽂아, 그곳으로 오줌이 나오게 하였다. 다행히 오줌이 나오면 사는 것이고, 오줌이 막혀 나오지 않으면 그대로 죽는 것이었다. 다만, 몸이 굳지 않게 하기 위하여 누에를 기르는 따뜻한 곳, 잠실에 집어넣어 살게 했다.
어떤 목숨은 아홉 마리 소 중에서 털 하나 뽑는 것 같은 목숨도 있고, 태산 보다 무거운 목숨도 있다. 사마천은 태산 같은 목숨을 건졌다. 여기에서 九牛一毛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50세에 풀려나, 내시로서의 삶을 살면서, 이후 14년에 걸쳐 사기를 저술했다.
그렇다면, 사기는 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시대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한 고조 유방으로 부터 시작한다. 유방(기원전 247~195)은 亭長 출신으로, 지금의 시골 동네 이장 정도의 낮은 벼슬이었으나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의 친구 번쾌는 백정이었는데, 매일 같이 번쾌가 잡아주는 개고기를 먹었다고 하며, 이상하게 유방이 그 집에서 술을 마시는 날엔 손님이 바글바글 해 장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당시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는 백성들을 혹독하게 부려 성을 쌓고 도로를 만드는등 국가적인 사업들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법률이 엄하여 소집된 날짜에 참석하지 않으면 인정 사정 볼 것없이 그대로 처형을 했다. 유방이 당시 마을 사람들을 인솔하고 만리장성을 쌓는 북쪽지방으로 가던 중 큰 비를 만나 제 날짜에 도달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유방은 생각했다. 늦게 가도 죽을 게 뻔하고, 안 가도 죽을 게 뻔하니, 그냥 여기서 도망 가 버리자. 역사서에는 봉기라고 기록되었다. 기원전 209년의 일이다.
이로부터 7년이 지난 기원전 202년 드디어 유방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한 제국을 건국했다.
유방은 황제가 되고 나서 생각했다. 그 강력한 진나라는 20년 만에 망하고, 자신은 불과 7년만에 대제국을 일으킨 원인이 무엇인가?
그리하여 고향 사람인 陸賈(육고)에게 명하여 진의 멸망 원인을 분석하게 했다. 육고는 新語 12편을 만들어 바쳤다.
잠시 일화 한 토막. 이 육고라는 사람은 잘난 척을 많이 하고 소위 화끈한 지식인이었다. 유방에게 항상 아는 체를 많이 하니, 무식한 유방이 내심 쪽 팔렸다. 한 마디로 제압하려 했다. 馬上得之. 나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그러니 주제 넘게 까불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러나 육고는 이렇게 답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不可)馬上治之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
新語를 본 유방은 그래도 뭔가가 부족했다. 어떤 체계 잡힌 정리가 필요했다. 그러한 요구는 한 무제에까지 이르렀다.
한 무제는 제국의 지배사상을 유학으로 정했다. 그러나 제국을 홍보하기 위한 어떤 무엇이 필요했다. 바로 역사책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의해 사마천의 史記가 만들어진 것이다.
사기는 130券 526,500字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서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모든 책들이 불 살라 없어진 상황에서,
아득한 黃帝로부터의 역사를 복원해 낸 사마천이야 말로 위대한 역사가이며 인간 승리의 표상이 아닌가 !
중국인들은 사마천을 史聖이라 부른다. 성인의 반열에 올려 놓은 것이다.
<이 글은 EBS 김영수의 사기 강연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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