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패자는 晉文公 희중이다.
重耳(?~BC 628)는 진 獻公의 셋째 아들이다. 晉나라는 섬서성 일대를 근거지로 한다.
헌종에게는 태자인 신생과, 이오, 중이 등 세 아들이 있었다. 다시 戎족의 딸 여희를 첩으로 맞아들여 아들을 낳았다. 문제는 여기서 생기는 것이다. 여희는 아주 똑똑한 여자였다.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대를 잇게 하려했다. 치밀한 사전 공작을 진행시켰다. 헌종 앞에서 항상 태자 신생을 칭찬했다. 도성에서 떨어진 곳을 맡아 다스리던 태자에게 말했다. 네 아버지가 꿈에 너의 생모의 꿈을 꾸었다는데 네가 제사를 한번 지내거라. 이 말을 들은 신생이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제사에 쓰던 고기를 아버지 헌공에게 바쳤다. 당시 풍습이었다. 마침 헌공이 출타 중이었는데, 여희가 이 고기에 독약을 섞었다. 헌공이 집에 돌아오자 여희가 제사를 지낸 그간의 일을 말하고는 고기를 올렸다.
헌종이 막 고기를 먹으려하자 여희가, 잠깐 제지하며 말하기를 고기가 오래된 것 같다 하며 먼저 고양이에게 먹였다. 고양이가 즉사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내시를 불러 그에게도 먹였다. 내시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여희는 헌종을 충동질했다. 태자를 불러 들였다. 그러나 태자 신생은 이러한 음모를 이미 알고 있었다. 도성으로 불려가게 된 신생은 스스로 자결해 버리고 말았다. 태자가 죽으니 여희는 노골적으로 나머지 왕자 이오, 중이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이를 알아챈 왕자들은 다른 나라도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이때부터 중이의 망명생활이 시작된다. 그의 망명길은 길고도 험했다. 융적에서 위, 제, 조, 송, 정나라를 거쳐 초나라 그리고 서쪽의 秦나라로 떠돌며 망명생활을 했다. 19년간의 긴 망명생활 끝에 62살이 되어 조국 진나라로 돌아왔다.
망명생활 중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중이는 희한하게도 갈비뼈가 통으로 붙어 있는 통뼈였다고 한다. 송나라 군주는 일부러 중이의 갈비뼈를 구경하려고 나와서는 한참동안 웃다가 그냥 돌아가 버렸다. 물론 구제하지도 아니하고 돌아가 버린 것이다. 또 한 번은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요구하자 농부는 흙덩이를 주며 먹으라고 하는 등 몹쓸 짓을 했다. 그때 중이의 외삼촌 호언이 중이를 진정시키며, 흙덩이를 준 것은 장차 영토를 차지할 것이라는 암시다. 라고 달랬다.
중이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첫째. 낙천적이었으며, 유머가 많았다. 망명하면서 그 부인이 기다릴께요. 언제쯤에나 돌아올 수 있겠어요?하자 한 25년은 걸리겠지..하며 느긋해 했다. 그는 19년 만에 돌아왔다.
그는 또 人福이 많아 사람들이 항상 따랐다. 또 女福도 많아 가는 곳 마다 늦바람을 피웠다. 제나라에서도 여인과 사랑을 맺었는데, 마침 제나라가 내분이 생겨 바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인에 눈이 먼 중이는 결코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여인이 이를 알고는 몰래 술을 취하게 하여 한밤중에 떠메고 가게 하였다. 현명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여복이 많았다. 또한 신의를 지켰다. 秦나라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그들이 대우를 후하게 해주자, 앞으로 秦나라와 싸울 경우 三舍를 접겠다고 약속했다. 소위 退避三舍다. 나중에 정말로 전쟁이 났을 때 이 약속을 지켜 세 번이나 후퇴를 할 정도로 신의를 지켰다.
인복이 많다 하였으나, 介子推를 빼 놓을 수 없다. 망명 중 굶어 거의 아사직전까지 몰렸을 때, 개자추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떼어내 그것으로 고기 국을 끓여 중이를 살렸다. 割股封君(할고봉군)의 고사가 바로 이것이다.
중이가 고국으로 돌아와 晉文公이 되자, 논공행상을 해야 했다. 그는 명철하였다 4가지 원칙을 세웠다. 인의로 나를 이끌고 덕과 은혜로 나를 지켜준 자를 첫째로 했다. 다음으로 행동으로 나를 보좌하여 공업을 이루게 한자. 세 번째는 위험을 무릅쓰고 땀을 흘린 자. 마지막 네 번째는 힘은 다했으나 나의 잘못을 보완해 주지는 못한 자. 이렇게 네 부류로 나누어 논공행상을 하였다. 그 자체로도 훌륭한 기준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개자추가 그만 빠진 것이다. 개자추는 아무 항목에도 속하지 않았다.
세상의 여론이 나빠졌다. 이럴 때 저자거리에 노래가 나돌았다.
"다섯 마리 이무기가 도와 용이 승천했다네. 4마리는 집을 찾았는데 한 마리만 못 찾았다네."
이 노래 소리는 개자추의 老母에게도 들렸다. 개자추는 노모에게 말했다. 부귀영화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주군을 모셨을 뿐이다. 이 말을 들은 노모는 판단이 빨랐다. 여기에 그대로 눌러 앉아 살 수는 없는 것이었다. 母子는 바로 산속에 들어가 숨었다. 綿山이라는 산이었다.
진문공은 부끄러웠다. 개자추를 아무리 찾으려고 하였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고심 중에 신하 중 한사람이 꾀를 내었다. 면산에 불을 지르면 뜨거워서 나타날게 아니냐. 그리하여 어느 봄날 면산에 불을 질렀다. 봄바람은 메마른 면산을 순식간에 태워버렸다. 그러나 개자추는 없었다. 나중에 온산을 뒤지니, 커다란 나무 밑둥에서 노모를 끌어안고 죽은 개자추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진문공은 통곡을 하고, 개자추가 죽은 날을 기려 이 날은 절대로 데운 음식을 먹지 않았다. 바로 寒食이다. 한식의 유래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나무 밑둥으로 신발을 만들어 신고 다니게 했다. 신발 소리가 때깍때깍 날 때마다 개자추를 기억하려한 것이다. 나막신의 시작이다.
<이 글은 EBS 김영수의 사기 강연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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