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 그리고 늦깍기 공부

史記에서 배우는 인간학 4 - 秦穆公

甘冥堂 2013. 2. 2. 09:30

<이 글은 EBS 김영수의 사기 강연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세 번째 패자로 秦 穆公의 얘기다.

秦은 중국의 서쪽 변방의 제후국이다. 미개한 나라였으나 東周의 天子 平王을 호위한 공으로 BC770년 이후로 제후국이 되었다.

목공은 덕공의 아들이다. 덕공 시대에는 복날 개고기를 먹었다. 나라에서 복날을 정하였고, 이날 개를 먹어 열독을 다스렸다.

목공의 이름은 嬴任好(영임호)다. 秦나라의 제후라 해서 姓氏가 秦씨인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이와 관련되어. 일본의 국보 1호는 나무로 만든 95cm의 반가사유상이다. 이것은 신라 도래인인 秦河勝(진하승)이 만든 것으로 고류지(광륭사)절에 있다. 그 앞 비석에 이에 대한 유래가 새겨져 있는데, 일본인이 생각하기에 한국사람 신라인이 이것을 만들었다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진하승은 秦始皇의 자손이라고 비석을 고치고야 말았다. 그러나 학자들이 그걸 모를 리 없다. 진시황의 성씨는 嬴(영)이었기 때문이다. 망신을 당한 일본에서는 그 자체를 아예 지워 뭉게 버리고 말았다.

 

서쪽 미개한 나라에서는 선진문물이 필요했다. 인재도 당연히 필요했다. 당시 진나라 옆에는 우, 괵 등 작은 나라들이 있었다. 晉나라가 괵을 치려하였으나 그 중간에 우 나라가 걸쳐있었다. 晉나라는 우 나라에 사신을 보내 괵을 치려하니 길을 좀 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우 나라의 신하 중 百里奚(백리해)가 나서서 결사반대했다. 만약 길을 빌려주었다가는 우리 우 나라도 망합니다. 그러니 절대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강대국인 晉나라의 부탁이니 안 들어줄 수 없었다. 晉나라는 괵을 멸하고 돌아가는 길에 그만 우 나라도 접수해 버리고야 말았다. 假道伐虢(가도벌괵)의 고사성어가 생긴 것이다. 길을 빌려주니 괵도 망하고 길을 빌려준 우도 망했다는 것이다.

역사 이래로 강대국이 약소국을 보호해준 적은 한 번도 없는 것이다.

 

백리해는 晉나라로 끌려왔으나 초나라로 도망갔다.

秦나라의 공손지가 이를 알고 꼭 데리고 와야 한다고 목공에게 건의했다. 그렇다고 그냥 돌려보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약 큰 보상을 해준다고 하면 초나라도 눈치를 챌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초나라에 알렸다. 노예하나가 도망갔다. 검은 양피 5장을 줄 테니 돌려보내라. 그리하여 백리해를 영입하게 되었고, 이후 사람들은 백리해를 五羖大臣이라 불렀다. 양피 다섯 장을 주고 데리고 온 대신이란 뜻이다. 진목공이 백리해와 사흘 밤낮으로 얘기해보니 정말로 천하의 大才를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백리해는, 나보다 친구 蹇叔(건숙)이 백배는 낫다 하며 그를 추천하였다. 목공도 누구든지 오면 자리를 주었다. 사마천은 제환공을 패자로 만든 관중보다 그를 추천한 포숙아를 더 칭찬했다. 백리해도 이에 못지않았던 것이다. 결국 사람이 중요하고, 인간의 작용을 긍정적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목공에게도 실수가 있었다. 그 하나는 晉나라를 공격하여 효산 전투에서 대패한 것이다. 전에 晉나라가 기근이 들어 식량 원조를 부탁하자 도와주었으나 몇 년 후 이번에는 반대로 자기나라에 기근이 들어 식량 원조를 晋에게 요철하였으나 거절당한 것이다. 이를 기화로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효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아까운 장수 3명이 포로로 잡혔다. 많은 보상을 하고 포로로 잡힌 장수들을 데려왔다.

 

晉나라로서도 밑질 게 없는 거래였다. 적의 장수를 사로잡았으니 그냥 처형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을 처형해 버리면, 그 장수들은 秦나라로 봐서는 큰 영웅이 될 것이다. 반대로 적에게 포로로 잡힌 장수가 자기나라로 되돌아가면 그도 역시 죽임을 당할 것이 뻔하다. 패장을 처형하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구태여 죽일 필요가 있는가? 돌려보내는 게 해가 될게 없다. 그리 생각하고 포로를 돌려보냈다. 포로 장수 3명이 돌아오자 진목공은 상복을 입고 그들을 맞았다. 그리고는 다시 이전의 직위를 주어 군대를 이끌게 했다. 이 거래는 누가 이긴 것일까?

 

또 하나, 진목공의 실수는 殉葬이었다. 야만의 습속인 순장은 주군이 죽으면 그를 모시던 사람들까지 모두 죽여 한 무덤에 집어넣는 제도이다. 목공이 죽자 백리해의 아들을 포함한 177명을 모두 순장하였다. 이후로 진나라에서는 인재가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