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목마와 숙녀

甘冥堂 2023. 4. 24. 05:58


목마와 숙녀 / 박인환(朴寅煥)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 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버지니아 울프

"아무도 당신만큼 잘해주지는 못했을 거예요. 맨 처음 그날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 맨 끝에 V. 라고 자신의 이름 이니셜을 적었다.

그리고 이 편지를 파란색 봉투에 넣은 다음, 친언니에게 보내는 또 다른 편지와 함께
거실의 테이블 위에 나란히 올려놓았다.
1941년 3월 28일, 오전 11시경의 일이었다.
남편은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었고, 하녀는 한창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모피 코트 차림에 지팡이를 들고 집을 나섰다.
정원을 가로지르고 교회를 지나서 강으로 내려간 다음, 강변을 따라 근처의 큰 다리가 있는 곳까지 걸었다.
이웃 주민 몇 명이 그녀를 목격했지만, 평소처럼 산책 중이겠거니 하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봄이 되어 날씨는 따뜻했고 강물은 많이 불어 있었다.
그녀는 강둑에서 큼직한 돌멩이를 주워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페시미즘

‘염세주의, 비관주의’등 인생은 무가치하고 혐오스럽다고 보는 태도.

선과 악이나 빛과 어둠이라는 두 개의 실재를 극단적으로 대립시킨 기원전 6세기 그리스의 이원론적 신앙에서 비롯되었으며,
죽음을 통해 영혼이 육체에서 해방됨으로써 광명한 신에게 구원 받아야 한다고 본다.
쇼펜하우어(독일)는 ‘세계는 불합리하고 맹목적인 의지가 지배하므로 무(無)로 돌아가 열반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페시미즘의 철학을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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