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수컷

甘冥堂 2023. 6. 25. 06:43

수컷 / 고영민

​따개비는 수컷이 아주 작아져
기생충처럼 암컷의 몸속에 붙어 있는데
생식기만 남고 대부분 퇴화됐다

각다귀는 암컷이 수컷을 사냥한다
긴 주둥이를 수컷의 이마에 쑤셔넣고 먹는 동안
수컷은 자신의 생식기를 암컷에게 붙인다
암컷이 수컷의 몸을 다 빨아먹어도 생식기는 그대로 붙어 있다

아텔로푸스 속(屬) 개구리 수컷은
암컷에게 한번 달라붙으면 최장 6개월 동안 그 자세를 유지한다
자신이 정조대가 되어 다른 수컷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다

두더지와 들다람쥐 수컷은 생식기 분비물을 이용해
실리콘처럼 암컷의 생식기를 틀어막는다

​나는 이제 없어져도 괜찮다

​ - 고영민,『구구』(문학동네, 2015)


숫돌 / 복효근

​숫돌을 생각한다
돌에게도 수컷이 있을까
그래, 수컷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알자면
숫돌에 무딘 칼을 문질러보라

무딘 쇠붙이를 벼리는 데는 숫돌만한 것이 없으리
닳아서 누워버린 날을 세우려면
숫돌은 먼저 쇠에 제 몸을 맡기고
제 몸도 함께 닳아야 하는 것인데

명필이 먹에 닳아서 뚫린 벼루의 숫자로 제 생애를 헤아리듯이

숫돌은 제가 벼린 칼날이 몇인가, 혹은 그 날이 무엇을 베었는가 근심하며 고뇌하며
닳아서 야윈 뼈에 제 생애를 새기느니

통장의 잔고를 헤아리다가
허접한 가계에 주눅 든 내 남성이 한없이 수그러드는 때
생각한다

수컷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 복효근『마늘촛불』( 2009)


저 수컷을 매우 쳐라 / 이정록

​어물전이며 싸전, 골목골목 좌판을 펼쳐놓고 있는 ​사람들, ​십중팔구 여자다. 여자라고 부르기에 뭐한 여자다. 서로 여자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심심찮게 이 여편네 저 여편네 악다구니를 끼얹는, 세 바퀴 반을 돌린 털목도리들이다. 생선 비늘 덕지덕지한 스폰지 파카들이다. 좌판이 키워왔는지 궁둥이를 중심으로 온몸이 뭉쳐져 있다

​저 자리들을 모두 수컷들로 바꿔놓고 싶다. 마늘전 김봉길 씨와 옹기전 심정구 씨만 빼고, 썬그라스와 방수 시계를 파는 서부사나이만 놔두고, 종일 내기 윷 ​노는 ​담뱃진들과 주정이 천직인 저 가래덩이들을 검정 비닐봉지에 한 열흘 집어넣었다가 좌판에 꿇어앉히고 싶다. 나오자마자 파주옥이나 당진집으로 달려갈 저 수컷들을 한 장 토막이라도 돼지쓸개처럼 묶어 말리고 ​싶다. 선거 철에만 막걸리 거품처럼 부풀어오르는 저 수컷도 아닌 수컷들을 외양간 천장이나 헛간 추녀에 매달아 놓고 싶다

​궁둥이들의 가슴을 보아라. 밥이란 밥 다 퍼주고, ​이제 ​구멍이 나서 불길까지 솟구치는 솥 단지가 있다. (이 땅의 여인들에게선 불내가 난다. 수컷들에게서도 설익은 불내가 나지만, 그것은 오래 쓰다듬어주기만 한 여인들에게서 옮겨 간 것이다.) 깔고 앉았던 박스를 접고 ​천 원짜리 몇을 다듬고 있는 갈퀴 손으로 저 잡것들의 버르장머리부터 쳐라. 그리하여 다리몽둥이 절룩거리는 파장이 되게 하라. 돌아가 저녁상을 차리고, 밤새 또 술 주정을 받아내야 하는 솥단지들이여. 삼밭 장작불처럼, 이 수컷을 매우 쳐라

​- 이정록,『제비꽃 여인숙』(민음사, 2001)


수컷에 대하여 / 복효근

​암컷이 새끼를 품고 있는 둥지에 천적이 다가가면
발을 쩔룩거리며 날부터 잡아잡수
둥지 멀리 천적을 유인하는 수컷 새가 있다 한다

천적의 눈에 암컷보다 먼저 띄게 하려고
수컷은 깃털이 화려하게 진화했다고도 한다

아비는 또 지아비는 그렇게도 하는 모양이다
그래야 한다면
기꺼이 수컷이 되리라 다짐해보기도 하는데

나는 화려한 깃털이 없어서
비바람 막아줄 용빼는 재주가 없어서
둥지를 친친 감아드는 뱀꿈만 자주 꾼다

다용도실 천장에서 비가 새서 지붕에 올라갔다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뜩하다

그 위태한 높이에서 아비는 지아비는 수컷이고 싶은데
도무지 어디서 새는지 모르겠고
더구나 천적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분간도 안 되는 푼수라

그래도 비는 새는데
냅두고 내려와 밥이나 먹으란다

​- 복효근,『예를 들어 무당거미』(현대시학사, 2021)



◇ 남자라는 이유로(1997)
작사/ 김순곤, 작곡/ 임종수
    노래/ 조항조

누구나 웃으면서 세상을 살면서도
말못할 사연 숨기고 살아도
나역시 그런저런 슬픔을 간직하고
당신 앞에 멍하니 서있네
언제 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내어
소리내어 울어 볼 날이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저마다 처음인듯 사랑을 하면서도
쓰라린 이별 숨기고 있어도
당신도 그런저런 과거가 있겠지만
내 앞에선 미소를 짓네
언제 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내어
소리내어 울어볼 날이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언제 한번 그런 날 올까요
가슴을 열고 소리내어 울어 울어볼 날이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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