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詠懷古跡五首(其三) / 杜甫
옛 유적을 읊다. 3
其三
群山萬壑赴荆門, 뭇 산 수많은 골짜기 지나 형문에 이르니,
生長明妃尚有村. 명비가 낳고 자란 소군촌 아직도 여전하다.
一去紫臺連朔漠, 황궁을 한 번 떠나니 연이어 북방 사막인데,
獨留青塚向黄昏. 푸른 무덤 홀로 남아 황혼을 맞는다네.
畫圖省識春風面, 그림으로 알 수 있네 젊었을 때의 미모를,
環佩空歸月夜魂. 패옥만 달밤에 혼이 되어 쓸쓸히 돌아왔네.
千歳琵琶作胡語, 천년동안 비파로 오랑캐 말을 해왔지만,
分明怨恨曲中論. 분명히 곡조 속에 원한 맺힌 말이 있을 게다.
이 시는 소군촌을 읊은 것이다.
荆門: 형문산.<水經.江水注>에 “장강의 물은 동쪽으로 형문의 호랑이 골짜기 사이로 흐른다. 형문산은 남쪽에 있는데, 위로는 합해지고 아래로는 넓게 벌어져, 그 모양이 문과 같이 생겼다."
明妃: 王昭君. 한 나라 원제 때의 궁인으로, 진나라 때 사마소의 이름字를 피하려고 명비라 개칭했다.
尚有村: 소군촌은 귀주 동북 40리에 있으며, 당나라 때에는 소군이 옛날에 살던 터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尙有村"이라 했다.
紫臺: 제왕의 궁.
朔漠: 북방 사막.
青塚: 즉 명군묘. 지금 내몽고 호화허특 서남쪽에 있다. 한나라 원제 때, 조정에서는 흉노와 화친하려고, 궁인 왕소군을 흉노 呼韓邪 單于(선우)에게 시집보냈는데, 시집간 후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서 흉노의 사막에 묻혔다.
省識: 인식. 알다.
春風面: 미모를 가리킨다. <西京雜記>에 의하면, “元帝는 후궁이 너무 많아, 화공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그림에 따라 궁인을 부르면 궁인의 행운이었다. 궁인들은 모두 화공에게 뇌물을 주었으나 소군은 그 미모에 자신이 있었으므로, 혼자 그들과 같이 하지 않았다. 이에 그림 그리는 사람이 그를 추하게 그려, 마침내 황제를 뵙지 못하였다.
후에 흉노가 입조하여 미인을 구하니, 그림에 의해 소군이 가게 되었다. 마침내 떠날 때, 황제가 왕소군을 보니, 모습이 후궁 중 제일이었다. 황제가 그것을 후회하였으나, 외국과 중요한 신용이니 다른 사람으로 바꾸지 못하였다. 마침내 그 사실을 알고 畵工 毛延壽를 시장에 버렸다."
環佩: 부녀자의 장식품. 여기서는 왕소군을 차용하여 가리킨다. 이 구절과 윗 구절은, 그림만 보고 어떻게 소군의 미모를 알 수 있겠는가? 소군을 사막에 장사 지내니, 단지 혼백만 달밤에 돌아올 뿐이다.
千歳琵琶作胡語: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왕소군이 흉노에 있으면서 일찍이 원망하는 생각을 노래로 만들었는데, 후인들이 <昭君怨>이라 이름 지었다.
作胡語: 비파는 서역 호인의 악기로, 그것으로 연주하는 것은 모두 胡音이 되었다.
曲中論: 곡 중에 호소하고 싶은 바의 뜻. 천년이나 흘러 전해져온 <소군원>은 비록 오랑캐 음악의 풍격이지만, 곡 중에 깊은 원한과 슬프고 한스런 고향 생각은 또한 듣기에 매우 분명한 것이다.
이 시는 두보가 昭君村을 지나며 지은 詠史詩다. 왕소군이 이름 있는 지방에서 태어났으나, 변방 밖에서 죽어, 나라를 떠난 원한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로 인해 주제는 “怨恨" 두 글자에 있으며 “一去" 두 자는 원한의 시작이며, “獨留"는 원한의 종결이다. 작자는 이미 소군을 동정하며 또한 자기 자신을 개탄한다. 沈德潛이 말했다. “소군을 읊은 시는 이에 絶唱이 되었다".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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