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속의 한국
그 시절 추억어린 문제입니다.
1.전차-한성전기회사가 특허권을 따내 처음으로 개통했다.*1-1 김기수는 기차를 火輪車라고 불렀다. *공주는 철도노선에서 배제되어 쇠퇴했다
2.총독부가 1928년 3월에 새로 출원한 경성부에 영업운영을 인가한 교통수단은 - 버스
3.1895년 을미의제개혁 때 여러 布를 한 가지로 통일하여 ( )로 했다. 예전에는 서민이 입지 못했던 옷을 모든 사람이 입을 수 있게 함으로써
( )는 ‘만민평등의 옷’이 되었다. -두루마기
3-1.서양복식을 처음 받아들인 이들- 별기군
*여성들이 장옷벗기 운동에서 장옷대신 -검정우산을 사용했다.
4.고무신은-순종은 하얀 고무신을 즐겨 신었다고 한다.
5.일본은 자기 나라에서 공업화 정책을 펴면서 식량이 크게 모자라자, 식민지 조선에서 ( )을 세워 쌀 생산을 늘리려 했다.
1920~1938년 사이에 토지개량, 토지개간, 사방공사 등으로 쌀 증산운동을 했다. - 산미증식계획
*토지조사사업 이후 일제가 쌀 수탈 전초기지는- 군산
6.임진왜란을 앞뒤로 일본에서 들어왔으며, 중요한 상품작물이 되어 조선 후기 사회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 담배
*일제강점기에 음식에 감칠맛을 내는 조미료- 아지노모도
7.주로 건축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건축가가 만든 고급 주택으로, 1920년대 초반부터 근대적인 설비를 갖춘 서구식 집을 가리키는 명칭은?
- 문화주택 *도시형 한옥-양반집을 동경하던 서민의 주의식과 기호에 맞게 지었다.
*경성의 명물이었으며 가쾌. 집주름이라고 불린 것은- 복덕방
8.土幕에 대한 설명 – 흙으로 벽을 바른 뒤 지붕을 얹은 허술한 움막이다.
9.1898년에 건립되었고 카톨릭 성당 중 가장 돋보이며, 종교건축이 갖추어야 할 겉모습이나 실내 분위기를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 곳은?
- 명동성당
10.일제가 1925년 서울 남산의 중턱을 깎아 만들었으며, 조선인 지배를 위한 정신적 구심을 마련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것은?
- 조선신궁
*조선총독부 청사는-식민통치를 상징. 경복궁에 지었다. 외벽을 석재로 마감하여 묵직한 겉모습을 강조하였다.
*1883년 제물포에 개항장이 개설되고 경인 사이의 왕래가 잦아지자 주요한 지역이 되였고 경인선, 경부선 분기점이 된 곳- 영등포
11.지주소유제를 강화시켜 농민을 소작농으로 만드는 ‘사업’이 되고 말았으며, 토지매매를 촉 진 시켜 토지 겸병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땅을 잃고 소작농이 되는 일이 많아졌다. - 토지조사사업
12.일제의 전시수탈정책에 맞서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가들이 벌인 투쟁에 해당하는 것은?
-군수용 물자 강제수매 반대. 소작료 인하운동. 부역동원 반대운동.
*농민들은 소작쟁의로 지주의 소작권 박탈과 높은 소작료에 맞섰다. 쟁의 규모가 크고 오랬동안 투쟁한 곳에서는 소작인 조합. 투쟁동맹 등을 만들기도 했다.
*일제가 농촌 안정을 꾀하려고 농가의 자급자족을 내세워 벌인 것은- 농촌진흥운동
*동양척식주식회사- 1909년부터 운영된 일본의 국책회사다. 일본 정부의 막대한 후원과 보조. 식민지 지배정책의 첨병노릇을 했다
13.13-1.식민지 시대 조선인 노동자의 생활은? – 낮은 임금과 몸을 갉아먹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 렸다. 감독, 십장 등에게 중간착취를 당했다.
14.평원고무농장 노조 여성간부로, 1931년 5월 평양 을밀대 지붕위에서 노동운동 역사에서 처음으로 고공농성, 1인 시위를 벌인 인물은?
- 강주룡
15.‘찬양회’란? - 우리나라 첫 여성단체이다. 최초의 ‘여권선언문’이라고 알려진** ‘여권통문’을 발표했다. 관립 여학교 설립운동에 적극 나섰다.
16.1930년대에는 신여성이라는 말보다 ( )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 )이라는 말에는 새로 운 교육을 받고 시대를 이끌어가는 여성보다는
다방, 영화, 레코드 등 서구의 대중문화를 받아들이는 계층이라는 뜻이 더 많았다. - 모던 걸
*근대적 서비스 여성을 가리키는 말은- 걸 그룹
*신여성 NEW WOMEN.에 대한 설명- 신여성의 단발은 큰 반향을 일으킴. 뾰죽구두. 양장. 숄. 안경은 그들의 상징. 1930년대는 신여성보다 모던 걸을 더 많이 썼다.
*1929년 원산 총파업은-원산 인구의 1/3 참여하여 3개월 투쟁.
*근우회-기관지 (근우)를 발간했다.
17.조선시대 관용물자의 출납을 맡았던 선혜청 주변에 상인이 모여들면서 ( )이 생겨났다. 1894년 관제개혁으로 선혜청이 없어지자
창고를 열고 상인을 받아들여 영업하게 함으로써 관설시장이 되었다. - 남대문 시장
*동대문시장-남대문시장에 견주어 소매시장의 성격이 더 강했다.
18.1933년에 박흥식이 동아백화점을 사들여 화신상회와 합병해 영업을 시작한 백화점은?
– 화신백화점
*백화점은 쇼윈도 네온사인. 이국적 분위기를 내며 다방이나 카페. 옥상정원등 소비자의 소비심리를 부추기고 유행을 전파하는 기구가 됐다.
*夜市-6~10월에 어후 7~12까지만 열었다. 1940부터 등화관제로 폐지. 1919년만 빼고 해마다 열렸고 나날이 번창했다.
19.일제는 조선을 영구히 지배하려는 속셈으로 네 차례에 걸쳐 ( )을 개정하여 식민지 교육 정책을 뒷받침했다. 식민지 조선의 보통교육 정책은
‘충량한 제국신민’을 기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조선교육령
*夜學-3.1운동후 교육열. 1년 과정. 1920이후 노동, 농민단체 등이 곳곳에 세웠다. 충량한 제국 신민에 초점(X).
20.일제말기 학교를 병영으로 만들어가는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 학교교련
*朝會- 보통학교의 규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전교생이 군대식 대열로 운동장에서 열었던 집단 훈련이다.
*학교밖 활동-遠足. 수학여행.
*1895년 소학교 필수과목으로 채택된 것- 兵式체조
21.운동회의 효시로 알려져 있으며, 예부터 성행한 세시풍속으로 음력 3월 무렵에 무리를지 어 경치 좋은 곳으로 가서 즐기는
꽃놀이를 가리키는 말은? - 花流 *화류는 운동회의 효시가 됐다. 운동회는 육상 종목과 오락 종목으로 나뉘었다.
22.근대 스포츠가 보급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던 대표적 기관은?
- 조선체육회. 조선 체육협회
23.1937년 중일전쟁 이후 학교체육정책에 나타난 일제 군국주의의 모습은?
- 일제는 학교체육에 ‘황국신민체조’를 도입했다.
24.영화 <아리랑>에 대한 설명 – 나운규가 감독, 각본, 주연을 맡았다. 무성영화였다. 필름은 남아 있지 않다.
‘연쇄극’형태의 최초의 한국 영화다.(X)
25.1937년 중일전쟁 이후 만들어진 친일영화 또는 국책선전영화는? - <군용열차>
*영화 <임자없는 나룻배>는 근대화에 희생되는 조선 민중의 모습을 그렸다.(토키영화. 발성영화.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관계없다)
*辯士 - 무성영화 해설. 1910년 경성고등연애관이 개관하면서 변사가 생겼다. 웬만한 배우보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26.1910년 경성에 처음 들어선 상설 영화관으로, 일본인이 만들어 주로 일본 영화를 상영했던 곳은?
- 경성고등연예관
27.개화기에 조선에 들어온 일본 및 중국의 노름에 속하는 것은? - 야바위. 화투. 마작. 십인계. (투전은 아님)
28.중국 청조 초에 귀족과 왕족만이 즐기던 최상급 놀이로, 식민지 조선에도 유입된 것은? - 마작
*米豆란- 쌀 이출항에 개설했던 곡물시장을 아우르는 말이다. 期米시장이라고도 불렀다.
29.‘황금광 시대’에 조선의 ‘黃金鬼’로 불리던 금광계의 신화적 인물은? _최창학
30.개화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며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다방의 대표 메뉴가 된 것은?
- **홍차. 커피.
31.1930년대 다방에 대한 설명 – 손님은 대부분 젊은 남성이었다. 벽에는 명화나 레코드 회사의 선전 포스터를 즐겨 붙였다.
산책하다가 들어가는 ‘거리의 공원’이 되었다.
*식민지 조선의 카페- 1931년 경성에만 70개. 여급 700명. 일본말과 영어 간판은 이국적이었다. 상들리에 장식으로 화려함.
32.식민지 조선에서는 ‘요릿집에 기생집을 첨단화한 곳’이었다. 영국의 경우, 중산층 시민이 토론하는 곳이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여급의 서비스를 받으며 술을 마셨다.- 카페
33.선술집이란? - 여러 글에서 선술집을 ‘경성의 명물’로 꼽는다. *없는 사람들의 유일한 연화장, 사교장이다. 있는 놈들이 요릿집에서 100원 쓰는 동안에 없는 사람들은 같은 기분과 취흥을 50전, 1원에 살 수 있다.
34.선술집 가운데 안주를 주지 않는 술집은? - 대폿집
35.일본에서는 물건 따위를 잡고 돈을 빌려주는 곳을 ( )라고 했고, 조선에서는 전당포라고 했다. *조선에서는 전당국, 전포라고도 했다.
( )라는 말은 도쿠가와 시대부터 쓴 말이다. 속어로는 발음이 비슷한 시쯔야(七屋) 라고 하거나 一六屋이라고도 했다.
- 질옥(質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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