栗谷 李珥(이이) 선생과 기생 柳枝(유지)
문을 닫아걸면 인(仁)이 아니고,
잠자리를 같이하면 의(義)가 아니라네.
율곡은 유지의 어린 나이를 동정하면서도 그녀의 행실을 사랑하였고
유지는 율곡의 도의를 존경하며 사랑하였다.
사계의 기록에서 밤에 율곡의 처소로 찾아간 유지가 율곡을 유혹하여
잠자리를 같이 하려는 별난 기생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유지는 율곡의 건강 상태와 더불어 이 조우가 생애에서 마지막이 될 것을 예감하고
다시 밤에 찾아간 것이다.
밤을 꼬박 새우며 담소한 이튿날 아침, 영결(永訣)이 되고만 이별을 할 때
율곡은 그녀에게 장시(長詩) 한 편과 칠언절구(七言絶句) 3수를 지어준다.
履我卽兮何意 (이아즉혜하의) “그 무슨 마음으로 날 따라왔나”
懷舊日之德音 (회구일지덕음) “지난날 해 주신 말씀 그리워서요!”
閉門兮傷仁 (폐문혜상인) 문을 닫아걸면 인(仁)이 아니고,
同寢兮害義 (동침혜해의) 잠자리를 같이하면 의(義)가 아니라네.
撤去兮屛障 (철거혜병장) 병풍도 치워 놓고 같은 방에서
異牀兮異被 (이상혜이피) 다른 침상 다른 이불 펴고 앉았네.
恩未畢兮事乖 (혜미필혜사괴) 그 사랑 다 못하고 일이 어긋나
夜達曙兮明燭 (야달서혜명촉) 밤새도록 촛불을 밝혀두었네.
天君兮不欺 (천군혜불기) 하느님을 속일 수야 없는 노릇
赫臨兮幽室 (혁임혜유실) 깊숙한 방 속까지 보고 계시니.
失氷冸之佳期 (실빙반지가기) 혼인할 좋은 시기 놓쳐버린 너와
忍相從兮鑽穴 (인상종혜찬혈) 차마 어찌 남모르게 관계를 하랴.
明發兮不寐 (명발혜불매) 새날이 다 밝도록 잠 못 이루다
恨盈盈兮臨岐 (한영영혜임지) 이별하는 마당에 회한으로 가득.
天風兮海濤 (천풍혜해도) 하늘에 바람 불고 바다에는 물결 이는데
歌一曲兮悽悲 (가일곡혜처비) 노래 한 곡조 처량하고 슬퍼라.
繄本心兮皎潔 (예본심혜교결) 아아 본마음 깨끗하기가
湛秋江之寒月 (담추강지한월) 가을 강의 차가운 달빛 같거늘.
心兵起兮如雲 (심병기혜여운) 어지러운 마음 구름같이 일어남에
最受穢於見色 (최수예어견색) 그 중에도 욕정이 제일 더럽네.
士之耽兮固非 (사지탐혜고비) 사내의 욕정은 원래 그릇된 것이고
女之耽兮尤惑 (여지탐혜우혹) 계집의 욕정은 더욱 문제라네.
宜收視兮澄源 (의수시혜징원) 당연히 아니 보고 근원을 맑게 하여
復厥初兮淸明 (복궐초혜청명) 맑고 밝은 본마음을 돌이켜야지.
倘三生兮不虛 (당삼생혜불허) 다음 세상 있다는 말 정말이라면
逝將遇爾於芙蓉之城 (서장우이어부용지성) 극락세계, 거기서 너를 만나리.
선생은 언제나 여색(女色)을 멀리하였다. 일찍이 누님을 뵈러 황주(黃州)에 갔었는데
유명한 기생이 선생의 방에 들어오자, 곧 촛불을 켜놓고 거절하였으니,
함께 어울리면서도 휩쓸리지 않음이 이러하였다.
여기서의 ‘선생’은 율곡(栗谷) 이이(李珥)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율곡의 제자이자
사돈이기도 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다.
글은「栗谷李先生家狀」의 일부이고 김장생의 사계선생유고(沙溪先生遺稿)에 실려 있다.
율곡이 48세이던 1583년 가을이었고 율곡은 벼슬을 그만두고 처향(妻鄕)이자
자기의 집이 있는 황해도 해주(海州)의 석담(石潭)에 있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 우찬성(右贊成) 등 고위직을 역임하였지만 임금 선조(宣祖)와
끝내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해 있던 차였다.
율곡은 죽기 서너 달 전에 황주로 갔다가 “나라 안 최고 미녀〔국중일색(國中一色)〕”인
황주 기생을 만났는데, 그녀의 이름은 ‘유지(柳枝)’였다.
그런데 율곡은 유지와의 조우를 계기로 자신과 유지의 사연을 직접 적어 남겼다.
율곡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 유지(柳枝)는 선비의 딸인데, 황주 관아의 기생으로 전락해 있었다.
내가 39세이던 1574년에 황해도 감사로 갔을 때 동기(童妓)였던 그녀가 시중을 들었다.
몸이 날씬하였고 곱게 단장하였으며, 얼굴은 빼어나고 머리는 총명했다.
내가 쓰다듬고 어여삐 여겼지만, 처음부터 정욕(情慾)의 뜻을 품지는 않았다.
그 뒤에 내가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평안도를 왕래하였는데,
유지는 매번 방 안에서 수청을 들었으나 한 번도 서로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내가 48세이던 1583년 가을에 해주에서 황주로 누님께 문안을 갔을 때
다시 유지를 만났고 유지와 함께 여러 날 술을 마셨다.
다시 해주로 돌아올 때 유지는 연도의 절까지 나를 따라와 전송해 주었다.
유지와 헤어진 날 나는 밤고지〔栗串〕강마을 주막에서 묵었다.
한밤중에 누군가 사립문을 두들겨서 나가보니, 바로 유지였다.
유지가 방긋 웃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했다.
‘대감의 명성은 온 나라 백성들이 다 사모하는 바이옵거늘, 하물며 기생된 계집이겠습니까?
여색을 보고도 무심하오니, 더욱더 탄복하는 바이옵니다. 이제 가시면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기 어려워 이렇게 멀리까지 찾아온 것이옵니다.’
마침내 불을 밝히고 밤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 기생이란 단지 방탕한 사내들의 다정(多情)함만을 사랑하거늘,
누가 도의(道義)를 사모하는 기생이 있는 줄 알겠는가?
게다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아니하고 도리어 탄복을 하니,
이것은 더욱더 보기 어려운 일이다.
안타까워라, 유지여! 천한 몸으로 고달프게 살아가는구나.
또한 지나가는 과객들이 내가 혹 잠자리를 갖지 않았나 의심하여
너를 돌아보아 주지 않는다면, 국중일색(國中一色)에게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이 노래를 지어 정(情)에서 발하되 예의(禮義)에 그친 뜻을 알리는 것이니,
보는 이들은 이 점을 잘 알 것이다.…
kakao story 율사보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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