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사군자

顏眞卿

甘冥堂 2023. 4. 20. 19:41

안진경(顏眞卿, 옌전칭, 709년 ~ 785년)은 중국 당나라(唐) 때의 대신이자 명필가이다

안진경은 709년에 안소보(顏昭甫)의 아들인 안유정(顏惟貞)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국 당나라 현종(玄宗)때 평원태수(平原太守)로 있을 무렵,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사촌형인 안고경(顏杲卿)과 함께 의용병을 모집하여 난의 진압에 참여한 바 있다.
그러나 안고경은 안녹산에게 욕을 퍼붓다가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안진경의 쟁좌위고
顏眞卿 争座位稿



훗날 당나라 덕종(德宗) 건중(建中) 4년(783년)때, 회서(淮西)에서 이희열(李希烈)이 반란을 일으켜 그 기세가 등등하자
덕종이 당시 당나라의 재상이었던 노기(盧杞)에게 대책을 물었다.
그러자 노기가 안진경을 보내어 그들을 설복시킬 것을 추천했고,
덕종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안진경에게 허주(許州, 하남성 허창시)로 가서 이희열을 위무하도록 명했다.
사실 노기는 안진경을 시기하고 있었는데, 이와 같이 안진경을 추천한 것은 그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술책이었다.

당나라 때 '안사의 난'이 일어났다.
난이 일어나고 반군이 안진경의 형과 조카를 살해했다.
나중에 안진경이 조카의 시신을 찾으러다녔는데 발견한 시신은 머리 부분뿐이었다고 한다. 그때 치밀어올랐던 슬픔과 분노를 그대로 담아 쓴 글이 이것이다.

글의 초반부는 분노와 슬픔을 억누르듯 평온하다가 점점 글이 과격해지고 미칠듯한 낙서, 오탈자가 등장한다.
글을 써내려갈 당시 글을 쓰는 이의 분노와 슬픔같은 감정의 파고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글이다.  
마지막 부분은 체념이 되면서 평온해지는 느낌을 볼수 있다.

행서로는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에 버금간다고 해서 천하제2행서(天下第二行書)라고도 불린다.

안진경이 이희열을 설득하러 가서 허주에 도착하여 이희열에게 황제의 뜻을 전하고 돌아가려 할 즈음,
마침 이원평(李元平)이 그 자리에 있자 안진경이 그를 대갈일성 꾸짖으니
이원평은 이희열에게 비밀 서신을 보내 안진경을 돌려보내지 말도록 했다.

이런 연유로 그 이후 안진경은 3년 동안이나 감금당하였다가 이희열이 드디어 황제에 올라 국호를 대초(大楚)로 정하고 연호를 무성(武成)으로 고쳤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이희열이 마침내 안진경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정하였고, 이어서 사자를 보내 밧줄로 안진경을 교살하고 말았다.

서예가로서 안진경은 그때까지 유행하던 왕희지(王羲之)의 부드럽고 우아한 서체에서 남성적이고 강건한 서체로 흐름을 바꿨다.
당대에 유공권(柳公權)과 더불어 유명한 서예가였는데 당대 사람들은 안진경과 유공권의 서체를 "안근유골",
즉 안진경의 서체에는 힘줄이 있고 유공권의 서체에는 뼈가 있다라고 평했다.
실제로 그의 글씨를 보면 남성적이면서 굳건하고 탄탄한 힘줄같다는 느낌을 준다.

시대적으로 비교적 안정되었던 남조 육조시대와 전란의 시대를 살았던 안진경의 시대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국가의 혼란 중에도 변치 않았던 강직한 성품은 그가 남긴 여러 서예 작품의 필체에 잘 반영되어 있다.
글씨에 뛰어나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 등과 함께 당나라 서예의 4대가로 불린다.

해서, 행서, 초서에 모두 능했고 대표적인 그의 명필로 장안 천복사의 다보탑을 위해 써준 "천복사 다보탑비", "동방삭 화상찬비"가 그의 해서체의 걸작으로 꼽히며
행서체의 걸작으로는 "제질계명문고", "쟁좌위첩","유중사첩"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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