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蘭. 꽃 피다

甘冥堂 2025. 2. 9. 14:42

춘분이 지난지가 언제인데...
한겨울 뺨칠만한 추위에도
난이 꽃을 피운다.


 
 
사군자(四君子)는 한자문화권에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네 가지의 식물을 일컫는 개념이다.

각 한자를 따서 매란국죽(梅蘭菊竹)이라고도 부른다.
 
많은 꽃과 여러 식물들 중에 이들을 선택해서
학식과 인품, 덕이 높은 사람에 비유하여 '군자'라 불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네 가지 식물들의 아름다움을 높이 산 까닭도 있지만,
각각 높은 기상과 품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지조와 절개를 군자의 가장 큰 덕목으로 여기었던
유교사회에서는 어떠한 고난과 악조건 속에서도 꿋꿋이 꽃을 피우는
사군자가 선비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즉 사군자를 통해 변함없는 신념과 굽히지 않는 마음을 나타내고자 하였으며,
고아하고 탈속한 경지를 추구하고자 했기에,
많은 시조와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 중 하나이기도 하다.
 
 
2. 사군자의 발생과 전개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군자’는 중국의 회화에서 성립된 화목(佛畫)이다.
최초에는 회화에 쓰이는 이 식물들을 가르키는 것이 아닌
중국 전국시대의 네 명의 인물들을 높이 받들고 기리기 위해 사군자라는 호칭으로 불렀던 것이
'사군자'라는 개념의 성립의 시초 정도이고
지금은 일반적으로 문인 묵화의 소재로 알려져 있는 것이 정설.
 
최초로 대나무가「시경」에 나타난 것을 비롯하여 그림의 소재로도 제일 먼저 기록되고 있으며,
대나무와 함께 매, 난, 국은 화조화의 일부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북송(960-1126년) 때에 와서 여러 가지 고사나 시문을 통해 이들 네 식물이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어,
차츰 문인화의 소재로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상징성에서뿐만 아니라 서예의 기법을 그대로 적용시켜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사대부 화가들에게 매력적인 화목으로 등장하였다.
 
남송(1127-1279년) 말기부터 원대(1279-1368년) 초기에는 몽골의 지배 하에서
나라를 잃고 은둔생활을 하는 한족 문인들 사이에,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충성심과 불굴의 정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크게 유행되어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정사초의 난초로, 흙이 없는 난초 포기만을 그려 몽골인에게 국토를 빼앗긴 설움을 표현하였다.
그 뒤 명대(1368-1644년)에 들어와서 이들 매, 난, 국, 죽 특유의 장점을 유교적 덕목과 관련시켜
칭송하는 문화적 전통이 수립되어서 사군자라는 총칭이 생겨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사군자의 품격이 높이 평가되어 고려시대부터 시문과 회화, 공예품 등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특히 회화에서는 고려시대에 송나라와 원나라 회화의 영향으로 왕공사대부 사이에
묵죽, 묵란, 묵매가 널리 그려졌다.
조선초기에도 사군자가 문인들 사이에 계속 사랑을 받아 왔고 조선 중기부터 독자적인 양상을 수립,
후기에 와서는 질과 양적인 면에서 모두 괄목한 만한 업적을 남기고 있다.
 
비록 사군자라는 개념이 회화, 그 중에서도 문인화의 화목으로 중국에서 유입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범주를 넘어서서 우리 민족의 기질과 심성에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받아들여지는
동아시아 사상의 일맥으로서 파악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는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사랑을 받아 왔으며,
여러 예술 분야에서 주된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위에서도 설명하였지만 이는 꽃, 식물 자체가 지닌 순수한 아름다움보다는
그것이 지닌 상징적 의미, 즉 지조와 절개, 고아함과 품격을 높이 산 것이 맞다.
 
난초(蘭). 서양란이면 모를까 동아시아의 란은 상당히 은은한 향기가 난다.
그 은은한 향으로 상대를 교화시키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난은 비록 한 송이가 피기는 하나 그 향기는 실내에 가득 차서 사람을 감싸고 열흘이 되어도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옛날 부유한 집안의 사람들은 난을 향조로 삼았다고 한다.
 
공자는 난의 향기를 왕자의 향이라 하였으며 특히 동아시아의 란은 서양란처럼
색채가 화려하지 않고 꽃도 작으나 담백한 색과 은근한 향기가 그 생명이다.
따라서 난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하는 것은 향이며 고귀함이다.
깊은 산중에 홀로 피어 고아한 자태로 은은한 향을 내뿜는 난은 지조 높은 선비와 절개 있는 여인에 비유되고 있다.
 
예로부터 '유인풍치정여란(幽人風致貞如蘭)', '난화사미인(蘭花似美人)', '유란여정녀(幽蘭如貞女)'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난은 유인, 미인, 정녀 등으로 비유되어 왕비의 침실을 난전, 미인의 침실을 난방이라 하였으며
또한 난의 독특한 향기를 취하여 유곡가인, 미인향, 군자향, 공곡유향, 군자가패, 왕자지향 등으로 일컫기도 하였으며,
난유유자풍운, 난령인수계라 하면서 난의 고아함을 칭송하였다.
 
난의 향과 고귀함에 관한 찬미는 기원전 공자시대에서부터 기록이 나타나고 있지만,
충성심과 절개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 굴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의 자서전적인 장편 서사시 「이소」에서 그가 난을 즐겨 넓은 지역에 가득 심었다고 함으로써
그의 인품과 연관시킨 난초의 상징성이 확립되었다고 한다.
 
난초그림의 대명사라 불릴 수 있는 완당 김정희의 난화론은 독특하다.
그는 글씨의 정신과 그림의 정신을 구별하지 않는다.
“난초 그리는 법은 예사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의 향기와 서권의 기미가 있은 연후에 얻게 된다.
또 난초그림의 법은 화법이라는 것을 가장 꺼리니 만일에 화법이 있으면 한 붓도 그리지 않는 것이 가하다”라고 하였다.
이는 심의를 존중하고 품격을 높이 보는 문인화의 묘미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라 할수 있다.
또한 청나라의 왕지원은, “난의 성격은 천연고결하여 마치 대가의 주부나 명문의 열녀 같아서 감히 범접할 수 없다.
만약 속필로 그려 그청고아치를 떨어뜨린다면 차마 볼 수 없을 것이다”라 하였다.
 
한편, 정몽주의 초명이 몽란이었는데, 이는 어머니가 난분을 깨뜨린 태몽을 꾸고 낳았기 때문이라는 기록이 있다.
난은 또한 자손의 번창과 관련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경기도 지방에서는 난초꽃이 번창하면
그 집에 식구가 는다는 속신이 전하여지고,
충청북도 지방에서는 꿈에 난초가 대나무 위에 나면 자손이 번창하고 난초꽃이 피면 미인을 낳는다는 속신이 전하여진다.
(나무위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