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憲問 第十四 (2) 제24장~제47장 해설

甘冥堂 2015. 11. 20. 10:12

논어 헌문편 (2) 24~47장 해설

 

<24>

 

子路問事君한대 曰勿欺也而犯之니라

자로가 인군 섬김을 묻자온대 공자 가라사대 속이지 말고 범하니라.

 

謂犯顔諫爭이라 范氏 曰犯非子路之所難也而以不欺爲難이라 夫子告以先勿欺而後犯也시니라

범은 얼굴을 범하고(들이대고, 맞대고) 간하면서 다툼이라. 범씨 가로대 범은 자로의 어려운 바가 아니고 속이지 않음으로써 어려움이 됨이라. 그러므로 부자가 먼저 속이지 말고 뒤에 범하는 것으로써 고하시니라.

 

<25>

 

曰君子上達하고 小人下達이니라

공자 가라사대 군자는 위에 달하고 소인은 아래에 달하니라.

 

君子反天理日進乎高明이오 小人徇人欲이라 日究乎汙下

군자는 천리로 돌아감이라. 그러므로 날로 높고 밝은데 나아가고, 소인은 인욕을 따름이라. 그러므로 날로 더러운 아래로 빠져드니라.

 

<26>

 

曰古之學者爲己러니 今之學者爲人이로다

공자 가라사대 옛적의 배우는 자는 자기를 위하더니 지금의 배우는 자는 사람을 위하도다.

 

[본문 해설]

옛날 학자들은 자신이 사람되기 위하여 공부한 반면, 지금의 학자들은 남을 의식하고 자신을 내세우고 자랑하기 위하여 공부한다.

 

程子曰爲己欲得之於己也爲人欲見之於人也程子曰古之學者爲己하야 其終至於成物이러니 今之學者爲人하야 其終至於喪己로다 按聖賢論學者用心得失之際其說多矣이나 未有如此言之切而要者於此明辯而日省之則庶乎其不昧於所從矣리라

정자 가라사대 내 몸을 위함은 내 몸에서 얻고자 함이고, 남을 위함은 남에게 보이고자 함이라. 정자 가라사대 옛적의 배우는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그 마침내 성물에 이르더니 지금의 배우는 자는 남을 위하여 그 마침내 자기 몸을 상하는 데에 이르도다. 우는 상고하건대 성현이 학자의 마음 씀이 얻고 잃는 즈음을 논함에 그 말이 많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말의 절실하고 요약한 자 있지 아니하니, 이에 밝게 분별하여 날로 살피면 거의 그 따르는 바에 어둡지 아니하리라.

 

<27>

 

蘧伯玉使人於孔子어늘

거백옥이 사람을 공자에게 부리거늘(사람을 시켜 공자에게 안부를 묻거늘),

 

使 : 여기서는 부릴 시

 

蘧伯玉衛大夫이라 孔子居衛하실새 嘗主於其家러시니 旣而反魯伯玉使人來也

거백옥은 위나라 대부니 이름은 원이라. 공자가 위나라에 거하실 때에 일찍이 그 집을 주인 삼더니 이미 노나라에 돌아오심이라. 그러므로 백옥이 사람을 시켜 (안부를 물으러) 옴이라.

 

孔子與之坐而問焉曰夫子何爲對曰夫子欲寡其過而未能也니이다 使者커늘 曰使乎使乎

공자가 더불어 앉아서 물어 가라사대 부자(거백옥)는 무엇을 하는고. 대답하여 가로대 부자 그 허물을 적게 하고자 하시면서도 능치 못하니이다. 시자가 나가거늘 공자 가사라대 부리는 이여, 부리는 이여.

 

使 : 여기서는 부릴 시

 

與之坐敬其主以及其使也夫子指伯玉也言其但欲寡過而猶未能이면 則其省身克己하야 常若不及之意可見矣使者之言愈自卑約而其主之賢益彰하니 亦可謂深知君子之心而善於詞令者矣夫子再言使乎以重美之하시니라 按莊周稱伯玉한대 行年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라 하고 又曰伯玉行年六十而六十化라 하니 蓋其進德之功老而不倦일새 是以踐履篤實하고 光輝宣著하야 不惟使者知之而夫子亦信之也시니라

더불어 앉는 것은 그 주인을 공경하여 써 그 시자에 미침이라. 부자는 백옥을 가리킴이라. 말하건대 그 다만 허물을 적게 하고자 하되 오히려 능치 못하다고 여긴다면, 그 몸을 살피고 몸을 이겨서 항상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뜻을 가히 봄이라. 시자의 말이 더욱 스스로 낮추고 간략히 하면서도 그 주인의 어짊을 더욱 드날리니 또한 가히 깊이 군자의 마음을 알고 사령(편지를 전달하는 것과 같은 심부름)을 잘한다고 이를 것이라. 그러므로 부자가 거듭 부리는 이여라고 말씀하시고 중히 아름답다고 여기시니라. 장주가 백옥이 칭찬함을 상고하건대 살아온 해가 오십인데 사십구년의 잘못을 알았다 하고 또 가로대 백옥은 육십을 살면서 육십을 화했다 하니, 대개 그 덕에 나아가는 공이 늙어도 게을리 하지 않기에 이로써 실천하고 이행하는 것을 독실하게 하고 훤히 베풀고 드러내어 오직 시자는 아지 못하지만 부자는 또한 믿으셨느니라.

 

<28>

 

曰不在其位하얀 不謀其政이니라

공자 가라사대 그 위에 있지 아니하여서는 그 정사를 도모하지 못하느니라.

 

重出이라

거듭 나옴이라.

 

<29>

 

曾子曰君子思不出其位니라

증자 가라사대 군자는 생각이 그 위에 벗어나지 아니하느니라.

 

艮卦之象辭也曾子蓋嘗稱之어시늘 記者因上章之語而類記之也范氏 曰物各止其所而天下之理得矣君子所思不出其位而君臣, 上下, 大小皆得其職也

이는 (주역) 간괘의 상왈(대상전)의 말이니 증자가 대개 일찍이 이 말을 일컬으시거늘 기록하는 자가 윗 장의 말로 인하여 같이 기록함이라. 범씨 가로대 물건이 각각 그 곳에 그침에 천하의 이치가 얻어지니라. 그러므로 군자가 생각하는 바가 그 위에서 나가지 않고 군신, 상하, 대소가 다 그 직을 얻음이라.

 

<30>

 

曰君子恥其言而過其行이니라

공자 가라사대 군자는 그 말을 부끄러워하고 그 행실을 지나치게 하니라.

 

恥者不敢盡之意過者欲有餘之辭

부끄러워함은 감히 다하지 못하는 뜻이고, 지나침은 남음이 있게 하고자 하는 말이라.

 

<31>

 

曰君子道者我無能焉호니 仁者不憂하고 知者不惑하고 勇者不懼니라

공자 가라사대 군자의 도가 셋에 내 능함이 없으니 어진 자가 근심이 없고, 아는 자는 의혹하지 않고, 용맹한 자는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自責以勉人也

스스로 책하면서 써 남들을 힘쓰게 함이라.

 

子貢曰夫子自道也샷다

자공이 가로대 부자가 스스로 겸손하셨다.

 

言也自道猶云謙辭尹氏 曰成德以仁爲先이오 進學以知爲先이라 夫子之言其序有不同者以此니라

도는 말함이니 스스로 이름은 겸손하다고 이름과 같다. 윤씨 가로대 덕을 이룸은 인으로써 먼저 하고, 학문에 나아감은 지로써 먼저 하니라. 그러므로 부자의 말씀이 그 차례()가 같지 아니함이 있음은 이로써이라.

 

<32>

 

子貢方人하더니 曰賜也賢乎哉夫我則不暇로라

자공이 사람을 비교하더니 공자 가라사대 사는 어진가(어진 짓인가), 무릇 나는 겨를이 없노라.

 

比也乎哉疑辭比方人物而較其短長雖亦窮理之事이나 專務爲此則心馳於外而所以自治者疎矣褒之而疑其辭하야 復自貶以深抑之시니라 謝氏 曰聖人責人辭不迫切而意已獨至如此

방은 비교함이라. 호재는 의심하는 말이라. 사람과 물건을 비교하여 재어서 그 짧고 김을 비교함은 비록 또한 이치를 궁구하는 일이나(일과 같지만) 그러나 오로지 이런 것을 위하여 힘쓴다면 마음이 밖으로 달려 써한 바 스스로 다스려짐이 소원해지니라. 그러므로 칭찬하고 그 말을 의심하여 다시 스스로 폄론하여 써 깊이 억제하시니라. 사씨 가로대 성인이 사람을 꾸짖으심이 말이 박절하지 않고 뜻이 이미 홀로 지극함이 이와 같으니라.

 

헌문편 제33~38장 해설

 

<33>

 

曰不患人之不己知患其不能也니라

공자 가라사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그 능치 못함을 근심할지니라.

 

凡章指同而文不異者一言而重出也文小異者屢言而各出也此章凡四見而文皆有異하니 則聖人於此一事蓋屢言之하니 其丁寧之意亦可見矣

무릇 장이 가리킴은 같아도 글이 다르지 아니함은 한 말이 거듭 나오고, 글이 조금 다른 것은 여러 번 말을 하여 각각 나옴이라. 이 장은 무릇 네 번 나타나니 글이 다 다름이 있으니 성인이 이 한 가지 일에 대개 거듭 말씀하시니 그 정녕한(분명한) 뜻을 또한 가히 볼 수 있음이라.

 

[앞주 해설]

윗 문장과 비슷한 곳은 다음과 같다.

1편인 學而篇 16曰不患人之不己知患不知人也니라

4편인 里仁篇 14曰不患無位患所以立하며 不患莫己知求爲可知也니라

15편인 衛靈公篇 18曰君子病無能焉이오 不病人之不已知也니라

 

<34>

 

曰不逆詐하며 不億不信이나 抑亦先覺者是賢乎인저

공자 가라사대 거짓을 거슬러서 (알려고 하지) 아니하며, 믿지 못하는 것을 헤아리지 아니하나, 아니 또한 먼저 깨달은 자가 이 어질도다.

 

未至而迎之也未見而意之也謂人欺己不信謂人疑己反語辭言雖不逆不億이나 而於人之情僞自然先覺이라야 乃爲賢也楊氏 曰君子一於誠而已이나 未有誠而不明者雖不逆詐하며 不億不信이나 而常先覺也若夫不逆不億而卒爲小人所罔焉이면 斯亦不足觀也已

역은 이르지 아니했는데 미리 맞아들임이오, 억은 보지도 않고 뜻을 둠이라. 사는 남이 나를 속임을 이름이오, 불신은 남이 나를 의심함을 이름이라. 억은 반어사라. 비록 거스르지도 않고 억측하지도 아니하나 사람의 참과 거짓에 자연히 먼저 깨달아야 이에 현명함이 됨을 말함이라. 양씨 가로대 군자가 정성에 한결같을 뿐이라. 그러나 성실하고서 밝지 못한 자가 있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비록 거짓을 거스르지 아니하고 불신을 억측하지도 아니하나 항상 먼저 깨달음이라 만약 무릇 거스르지도 않고 억측하지도 아니하나 마침내 소인의 속이는 바에 놓이게 된다면 이 또한 족히 보잘 것이 없느니라.

 

<35>

 

微生畝謂孔子曰丘何謂是栖栖者與無乃爲佞乎

미생묘가 공자에게 일러 가로대 구는 어찌하여 이 서서한 자인고. 이에 아당함을 잘 하는 것이 아닌가?

 

: 깃들일 서 : 아첨할 녕, 재주 녕

 

[본문해설]

미생묘는 아마도 공자보다 나이가 많으면서 덕이 높은 사람인 듯하다. 그러하기에 공자의 이름을 직접 부르면서 묻고 있다. “어떻게 하여 그대는 말을 그리도 이치에 딱딱 잘 맞아 떨어지게 하는가, 아니 말을 잘하는 것인가?”

 

微生이오 名也名呼夫子而辭甚倨하니 蓋有齒德而隱者栖栖依依也爲佞言其務爲口給하야 以悅人也

미생은 성이오, 묘는 이름이라. 이름으로 부자를 부르면서 말이 매우 거만하니 대개 나이와 덕이 있으면서 은둔한 자라. 서서는 의의함이라(어디에 의지한 듯이 말이 착착 잘 맞는 모양이라). 말 잘한다는 것은 그 입에 내는 것을 힘써서 써 사람을 기쁘게 함이라.

 

孔子曰非敢爲佞也疾固也니라

공자 가라사대 감히 말을 잘함이 아니라 고집을 미워함이니라.

 

[본문 해설]

사람들의 하나만 알고 고집불통인 것을 풀어주기 위해 이런 말 저런 말을 하기 때문이지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라.

 

惡也執一而不通也聖人之於達尊禮恭而言直如此하니 其警之亦深矣로다

질은 미워함이라. 고는 하나를 잡고 통하지 못함이라. 성인의 달존에 예가 공순하고 말이 곧음이 이와 같으시니 그 깨우침이 또한 깊도다.

 

<36>

 

曰驥不稱其力이라 稱其德也니라

공자 가라사대 기마는 그 힘을 일컬음이 아니라 그 덕을 일컬음이니라.

 

善馬之名이라 謂調良也尹氏 曰驥雖有力이나 其稱在德하니 有才而無德이면 則亦奚足尙哉리오

기는 좋은 말의 이름함이라. 덕은 조량(잘 익히고 순하게 따름)을 이름이라. 윤씨 가로대 기마가 비록 힘이 있으나 그 일컬음은 덕에 있으니 사람이 재주가 있으면서 덕이 없으면 또한 어찌 족히 숭상하리오.

 

<37>

 

曰以德報怨何如하니잇고

혹이 가로대 덕으로써 원망을 갚음이 어떠하니잇고?

 

或人所稱今見老子書하니라 謂恩惠也

혹인이 일컬은 바는 지금 노자 글(老子道德經 恩始章)에 나타나니라. 덕은 은혜를 이름이라.

 

<38>

 

曰何以報德

공자 가라사대 어찌 써 덕으로 갚을고.

 

言於其所怨旣以德報之矣則人之有德於我者又將何以報之乎

말하건대 그 원망하는 바에 이미 덕으로써 갚으면, 남이 나에게 덕이 있음에(덕을 베풂에) 또한 장차 무엇으로써 갚으랴.

 

以直報怨이오 以德報德이니라

곧음으로써 원망을 갚고, 덕으로써 덕을 갚느니라.

 

於其所怨者愛憎取舍一以至公而無私所謂直也於其所德者則必以德報之不可忘也或人之言可謂厚矣이나 以聖人之言으로 觀之則見其出於有意之私而怨德之報皆不得其平也必如夫子之言然後二者之報各得其所이나 怨有不讎하고 而德無不報하니 則又未嘗不厚也此章之言明白簡約하야 而其指意曲折反覆如造化之簡易易知而微妙無窮하니 學者所以詳玩也니라

그 원망하는 바에 사랑하고 미워하고 취하고 버리는 것을 한결같이 지극히 공변됨으로써 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것은 이른바 곧음이고, 그 덕이 되는 바에 반드시 덕으로써 갚는 것은 가히 잊지 아니함이라. 혹인의 말이 가히 후하다고 이르나 그러나 성인의 말로써 보면 그 뜻이 사사로움이 있는 데에서 나온 것이고 원망하고 덕됨의 갚음이 다 그 평평함을 얻지 못함이라. 반드시 공자의 말씀과 같이 한 연후에 두 가지의 갚음이 각각 그 곳을 얻느니라. 그러나 원망은 원수로 여기지 않음이 있고 덕은 갚지 않음이 없으니 곧 또한 일찍이 두텁지 않음이 없느니라. 이 장의 말씀이 명백하고 간략하여 그 가리키는 뜻이 곡절반복(이리 굽고 저리 끊고 이리 엎치고 저리 젖힘)함이 조화의 간이함과 같음에 알기가 쉽고 은미하고 묘함이 무궁하니 배우는 자 마땅히 써 상세히 구경해야 할 바니라.

 

曰莫我知也夫인저

공자 가라사대 나를 아는 이가 없구나.

 

夫子自歎하야 以發子貢之問也시니라

공자가 스스로 탄식하여 써 자공의 물음을 유발하게 하시니라.

 

子貢曰何爲其莫知子也잇고 曰不怨天하며 不尤人이오 下學而上達하노니 知我者其天乎인저

자공이 가로대 어찌하여 그 선생님을 알지 못함이(못하는 자가) 있으니잇고? 공자 가라사대 하늘을 원망하지 아니하며 사람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아래에서 배워 위로 통달하노니 나를 아는 자는 그 하늘인저.

 

不得於天而不怨天하고 不合於人而不尤人이오 但知下學而自然上達하니 但自言其反己自修하야 循序漸進耳無以甚異於人而致其知也이나 深味其語意則見其中自有人不及知而天獨知之之妙니라 蓋在孔門唯子貢之智幾足以及此特語以發之하시나 惜乎其猶有所未達也程子曰不怨天, 不尤人在理當如此니라 又曰下學上達意在言表니라 又曰學者須守下學上達之語라야 乃學之要니라 蓋凡下學人事便是上達天理이나 習而不察이면 則亦不能以上達矣니라

하늘에 얻지 못해도 하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사람에 합하지 아니해도 사람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다만 아래에서 배우고 자연히 위로 통함을 아느니 이는 다만 스스로 그 자기 몸을 돌이키고 스스로 닦아서 순서대로 점점 나아가고, 써 남과 심히 달라 그 앎을 이룸이 없음을 말함이라. 그러나 그 말뜻을 깊이 완미하면 그 가운데에 자연히 사람이 미처 알지 못함이 있고 하늘이 홀로 아는 묘함이 있음을 볼 수 있음이라. 대개 공자의 문인에 오직 자공의 지혜만이 거의 족히 써 이에 미치니라. 그러므로 특별히 말씀하여 써 계발하셨으나 슬프다, 그 오히려 미달한 바가 있음이여. 정자 가라사대 불원천, 불우인은 이치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니라. 또 가라사대 하학상달은 뜻이 말 거죽에 있느니라(말 속에 숨었느니라). 또 가라사대 배우는 자가 모름지기 하학상달의 말을 지켜야만이 이에 배움의 요점이니라. 대개 무릇 아래에서 인사를 배움은 문득 위로 천리에 달하니라. 그러나 익히기만 하고 살피지 아니하면 또한 능히 써 상달하지 못하니라.

 

 

헌문편 제39~42장 해설

 

<39>

 

公伯寮愬子路於季孫이어늘 子服景伯以告曰夫子固有惑志於公伯寮하나니 吾力猶能肆諸市朝니이다

공백료가 자로를 계손에게 참소하거늘, 자복경백이 써 고하여 (공자에게) 가로대 부자(계손씨)가 진실로 공백료에게 의혹하는 뜻을 두나니 내 힘이 오히려 능히 저 시장 아침에 늘어놓으니이다.

 

[본문 해설]

공백료가 자로를 의심하면서 계손씨에게 공연히 참소하니, 공자의 제자인 자복경백이 같은 문인이 자로가 무고당하는 것을 보고 자로가 다칠 것을 염려하여 공자에게 하는 말이다. ‘계손씨가 공백료의 말을 믿고 자로를 의심하는데,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나 정도의 힘이라면 공백료를 쳐 죽여서 그 시체를 시장 바닥에 끌고 다닐 수가 있다는 뜻이다.

 

公伯寮魯人이라 子服魯大夫子服何也夫子指季孫이라 言其有疑於寮之言也陳尸也言欲誅寮니라

공백료는 노나라 사람이라. 자복은 성이고, 경은 시호요, 백은 자니 노나라 대부 자복하야라. 부자는 계손을 가리킴이라. 그 공백료의 말에 의심을 둠을 말함이라. 사는 시체를 늘어놓음이니 공백료를 베고자 함을 말함이니라.

 

曰道之將行也與命也道之將廢也與命也公伯寮其如命리오

공자 가라사대 도가 장차 행하는 것도 명이며, 도가 장차 폐하는 것도 명이니 공백료가 그 명에 어찌하리오.

 

[본문 해설]

자로를 참소하는 것은 나를 참소하는 것이오, 그러면 우리 도를 막는 것과 한가지라. 그러나 자로가 참소를 당하거나 당하지 않거나 우리 도가 행해지거나 행해지지 못하거나 다 운명이다. 도가 장차 행하게 되는 것도 천명이며, 도가 장차 폐하는 것도 천명이니, 공백료가 이러쿵저러쿵한다고 자로가 다치거나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다 천명의 일이니라.

 

謝氏 曰雖寮之愬이나 亦命也其實寮無如之何니라 謂言此하야 以曉景伯, 安子路하고 而警伯寮耳聖人於利害之際則不待決於命而後泰然也시니라

사씨 가로대 비록 공백료의 참소가 행해지나 또한 명이니 그 실은 공백료가 어찌하지 못하니라. 우는 이르되 이 말씀을 하셔서 경백을 깨우쳐주고, 자로를 편히 해주고, 공백료를 일깨워줌(경계함)이라. 성인이 이롭고 해로운 즈음에 명의 결단함을 기다리지 않은 연후에(참소대로 행해지건 행해지지 않건 간에) 태연하심이라.

 

<40>

 

曰賢者辟世하고

공자 가라사대 어진 자는 세상을 피하고,

 

天下無道而隱하니 若伯夷太公是也

천하가 무도하여 숨으니 백이와 태공 같은 이가 이 분들이라.

 

其次辟地하고

그 다음은 땅을 피하고

 

去亂國, 適治邦이라

어지러운 나라를 버리고 다스려지는 나라로 감이라(백리해가 나라를 떠나 나라로 간 경우).

 

其次辟色하고

그 다음은 색을 피하고

 

禮貌衰而去

(인군의) 예모가 쇠하면 떠나가니라(위령공이 예모가 없는데다 얼굴빛이 없어 공자가 떠나신 경우)

 

其次辟言이니라

그 다음은 말을 피하니라.

 

有違言而後去也程子曰四者雖以大小次第言之이나 非有優劣也所遇不同耳

말이 어긋남이 있은 뒤에 떠나가니라(衛靈公陳法을 묻자 공자가 떠나가신 경우). 정자 가라사대 네 가지(辟世 辟地 辟色 辟言)가 비록 크고 작은 차례로써 말했으나 그러나 우열이 있음이 아니고 만나는 바가 같지 않을 뿐이라.

 

曰作者七人矣로다

공자 가라사대 (이렇게 하여) 일어난 자가 일곱 사람이로다.

 

李氏曰作起也言起而隱去者今七人矣不可知其誰何必求其人以實之則鑿矣

이씨 가로대 작은 일어남이니 일어나서 은거한 자를 말함이라. 지금 칠인은 가히 그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나 반드시 그 사람을 구하여 써 실제를 구한다면 파고드는 것이라(너무 융통성이 없음이라, 곧 칠인이 되건 오인이 되건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위의 네 가지의 뜻의 중요함에 초점을 맞춰 공부해야 하니라).

 

<41>

 

子路宿於石門이러니 晨門曰奚自子路曰自孔氏로라 曰是知其不可而爲之者與

자로가 석문에서 유숙하더니, 신문(새벽에 문을 열어주는 문지기)이 가로대 어디서부터 오는고? 자로 가로대 공씨로부터 오노라. 가로대 이 그 불가한 줄을 알면서도 하는 자이구나.

 

[본문 해설]

석문에서 문지기를 하는 사람이 그곳에 유숙한 자로에게 어디서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자로가 공자에게서 왔다고 하니, 문지지가 하는 말이 , 그 공씨라는 사람이 세상에 뻔히 불가한 줄을 알면서도 하는 자가 아닌가. 그대가 그 사람에게서 왔구나하는 비아냥거림이다.

 

石門地名이라 晨門掌晨啓門이니 蓋賢人으로 隱於抱關者也從也問其何所從來也胡氏 曰晨門知世之不可而不爲以是譏孔子이나 不知聖人之視天下無不可爲之時也

석문은 지명이라. 신문은 새벽에 문을 열어주는 것을 맡으니, 대개 어진 사람으로 포관에 숨어 있는 자라. 자는 좇음이니 그 어느 곳을 따라 왔느냐고 물음이라. 호씨 가로대 신문은 세상의 불가함을 알면서 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이로써 공자를 기롱함이라. 그러나 성인이 천하를 보심에 가히 하지 못하는 때가 없음을 아지 못함이라.

 

<42>

 

擊磬於衛러시니 有荷蕢而過孔氏之門者曰有心哉擊磬乎

공자가 위나라에서 경을 치시니 삼태기를 메고 공씨의 문앞을 지나는 자가 가로대 유심하다(마음을 두고 있구나), 경을 침이여.

 

[본문 해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위나라에서 도를 펴기 위해 경을 치고 다녔다. 하루는 집에서 경을 치고 있는데 지나가던 은자가 경치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담긴 공자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 ‘공자가 세상의 일에 너무 마음을 쓰는구나. 뭐 그리 야단스럽게 그러는고.’

 

樂器擔也草器也此荷蕢者亦隱士也聖人之心未嘗忘天下하시니 此人聞其磬聲而知之하니 則亦非常人矣

경은 악기라. 하는 메는 것이라. 궤는 풀그릇이라. 이 삼태기를 멘 자도 또한 은사라. 성인의 마음이 일찍이 천하를 잊지 아니하시니 이 사람이 그 경을 치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아니, 또한 비상한 사람이라.

 

旣而曰鄙哉硜硜乎莫己知也어든 斯已而已矣深則厲淺則揭니라

이윽고(경치는 소리를 한참 듣더니) 가로대 비루하다. 단단함이여. 자기를 알아주지 않거든 이 그만 둘 뿐이니 (물이) 깊으면 옷을 벗어들고, 얕으면 걷어붙이니라.

 

硜硜石聲이니 亦專確之意以衣涉水曰厲攝衣涉水曰揭此兩句衛風匏有苦葉之詩也譏孔子人不知己而不止하니 不能適踐深之宜

갱갱은 돌소리니 또한 오로지하고 확고한 뜻이라(돌같이 단단한 고집불통의 짓이라). 옷으로써 물을 건넘을 가로대 여고, 옷을 끼고서 물을 건넘을 가로대 게라 하니, 이 두 글귀는 시경위풍(정확히는 '패풍'을 말함, 패나라와 용나라가 뒷날 모두 위나라에 합병되었기에 주자는 두 나라를 모두 위나라로 본다.) 포유고엽장의 시라. 공자가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데도 그치지 아니하니, 능히 얕고 깊음의 마땅함을 맞추지 못함을 기롱함이라.

 

曰果哉末之難矣니라

공자 가라사대 과감하다. 어려움이 없느니라.

 

[본문 해설]

삼태기를 지고 가는 사람을 말을 듣고 공자가 하신 말씀이다. ‘과감하게 나가는 것은 나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니라. 어떻게든 세상을 구하려고 하니 어려운 것이니라.’

 

果哉嘆其果於忘世也無也聖人心同天地하야 視天下猶一家하시고 中國猶一人하시니 不能一日忘也시니라 聞荷蕢之言而嘆其果於忘世하시고 且言人之出處若但如此則亦無所難矣

과감하다는 것은 그 세상을 잊어버리는데 과감함을 탄식하심이라. 말은 없음이라. 성인이, 마음이 천지와 같아 천하 보심을 한 집안처럼 하시고 중국을 한 사람같이 하시니 능히 하루도 잊지 못하시니라. 그러므로 삼태기를 진 자의 말을 듣고 그 세상을 잊는 데에 과감함을 탄식하시고 또한 사람의 출처를 만약 다만 이같이 한다면 또한 어려울 바가 없음을 말씀하심이라.

 

 

헌문편 제43~47장 해설

 

<43>

 

子張曰書云高宗諒陰三年不言이라 하니 何謂也잇고

자장이 가로대 서경에 이르기를 고종이 양음에서 삼년 동안을 말이 없었다 하니 무엇을 이르니잇고?

 

高宗商王武丁也諒陰天子居喪之名이니 未詳其義

고종은 상나라 왕 무정이라. 양음은 천자가 상에 거하는 것을 이름함이니 그 뜻은 상세하지 못함이라.

 

曰何必高宗이리오 古之人皆然하니 君薨커시든 百官總己하야 以聽於冢宰三年하니라

공자 가라사대 어찌 반드시 고종이리오. 옛 사람이 다 그러하니 임금이 죽거든 백관이 몸을 거느려서 써 총재에게 삼년을 듣느니라.

 

[본문 해설]

왜 꼭 고종 임금만 그렇게 했겠는가. 옛날 사람들이 다 그러했다. 임금이 죽으면 새로 등극한 임금이 3년 동안 상주 노릇을 해야 하기에 그 사이에 정치는 총재가 맡아했다.

 

言君薨則諸侯亦然이라 總己謂總攝己職이라 冢宰大宰也百官聽於冢宰故君得以三年不言也胡氏 曰位有貴賤호대 而生於父母無以異者三年之喪自天子達하니 子張非疑此也殆以爲人君三年不言이면 則臣下無所稟命하야 禍亂或由以起也孔子告以聽於冢宰則禍亂非所憂矣라 하시니라

임금이 죽으면 제후도 또한 그러함을 말함이라. 총기는 자기의 직책을 총섭함(다 거느려서 하나로 껴나감. 하나로 단일화하여 총재에게 정치를 들음)을 이름이라. 총재는 태재라. 백관이 총재에게 (정사를) 듣는 고로 인군이 얻어 써 (안심하고) 삼년 동안을 말하지 않음(정치에 관여하지 않음)이라. 호씨 가로대 위에는 귀천이 있으되 부모에게 나온 것은 써 다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삼년상은 천자로부터 통하니 자장이 이를 의심함이 아니고, 자못 인군이 삼년을 말하지 않으면 신하가 품명하는 바가 없어 화란이 혹 써 일어날까에서 말미암음이라. 공자가 총재에게 들으면 화란은 근심할 바가 아니라고 가르쳐주심이라.

 

<44>

 

曰上好禮則民易使也니라

공자 가라사대 위가 예를 좋아하면 백성을 부리기 쉬우니라.

 

[본문 해설]

임금이 예를 좋아하면 절도가 있어서 백성이 그 절도를 본받을 것이고, 또한 예를 좋아하는 임금은 절도가 있게 백성을 부리기 때문에 백성을 부리기에 쉬우니라.

 

謝氏 曰禮達而分定이라 民易使니라

사씨 가로대 예는 통하고 분수가 정해짐이라. 그러므로 백성을 부리기가 쉬우니라.

 

<45>

 

子路問君子한대 曰修己以敬이니라 曰如斯而已乎잇가 曰修己以安人이니라 曰如斯而已乎잇가 曰修己以安百姓이니 修己以安百姓堯舜其猶病諸시니라

자로가 군자를 묻자온대 공자 가라사대 몸을 닦되 공경으로써 하니라. 가로대 이같이 할 뿐이니잇가? 가라사대 몸을 닦아서 써 사람을 편안히 하니라. 가로대 이같이 할 뿐이니잇가? 가로대 몸을 닦아서 써 백성을 편안히 함이니, 몸을 닦아서 써 백성을 편안히 함은 요순도 그 병되이 여기시니라.

 

修己以敬夫子之言至矣盡矣로대 而子路小之再以其充積之盛自然及物者告之하시니 無他道也人者對己而言이라 百姓則盡乎人矣堯舜猶病言不可以有加於此以抑子路하야 使反求諸近也蓋聖人之心無窮하야 世雖極治이나 豈能必知四海之內果無一物不得其所哉리오 堯舜猶以安百姓爲病하시니 若曰吾治已足이라 하면 則非所以爲聖人矣程子曰君子修己以安百姓하야 篤恭而天下이니 唯上下一於恭敬則天地自位하고 萬物自育하며 氣無不和하야 而四靈畢至矣體信達順之道聰明睿知皆由是出하니 以此事天饗帝니라

몸을 닦아서 써 공경함은 부자의 말씀이 지극하고 다했으되 자로가 적게 여김이라(대수롭게 여기지 않음이라). 그러므로 두 번째로 써 그 충적의 성함이 자연히 물건에 미치는 것으로 가르치시니(修己以安人) 다른 도가 없음이라. 사람이라는 것은 내 몸의 상대를 말함이라. 백성은 곧 모든 사람이라. 요순도 오히려 병됨은 가히 써 이에 더함이 있지 않음을 말함이니(修己以安百姓), 써 자로를 억제하여 하여금 돌이켜 저 가까움에서 구하게 함이라. 대개 성인의 마음은 궁함이(끝이) 없어 세상을 비록 지극히 다스리나 그러나 어찌 능히 반드시 사해의 안이 과연 한 가지 물건이라도 그 곳을 얻지 않음이 없다고 알리오. 그러므로 요순도 오히려 백성을 편안히 함으로써 병되이 여기시니 만약 가로대 나의 다스림이 이미 족하다하면 곧 써 성인이 되지 못하니라. 정자 가라사대 군자는 몸을 닦아서 써 백성을 편안히 하여 돈독하고 공순히 하여 천하가 편안해지니 오직 상하가 공경에 한결같으면 곧 천지도 스스로 자리하고, 만물도 스스로 길러지며 기운이 화해지지 않음이 없어서(中庸1, “致中和天地位焉하며 萬物育焉이니라) 사령(봉황 기린 거북)도 다 지극해지니라. 이것은 믿음을 체로 하고 순함에 통달하는 도니 총명예지가 다 이로 말미암아 나오니 이로써 하늘도 섬기도 상제도 제사 지내니라.

 

<46>

 

原壤夷俟리니 曰幼而不孫弟하며 長而無述焉이오 老而不死是爲賊이라 하시고 以杖叩其脛하시다

원양이 걸터앉아(거만스럽게) 기다리니, 공자 가라사대 어려서도 공순하지 못했으며 장성해서도 칭찬할 만한 것도 없고, 늙어서는 죽지도 아니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해가 된다 하시고, 지팡이로써 그 정강이를 두드리시다.

 

: 여기서는 걸터앉을 이: 정강이 경

 

[본문 해설]

원양은 공자의 어릴 적 친구이다. 공자가 온다니까 거만스럽게 앉아 기다리고 있기에 공자가 그를 꾸짖는 말이다. ‘너는 어렸을 때도 공순하지 못했고, 커서는 칭찬들을 만한 일 하나 한 것도 없는데다 늙어서는 쉽게 죽지도 않으니 너야말로 세상에 해가 될 뿐이다하시면서 끌고가서 지팡이로 그 정강이를 때려주었다.

 

原壤孔子之故人이라 母死而歌하니 蓋老氏之流自放於禮法之外者蹲踞也待也言見孔子來而蹲踞以待之也猶稱也賊者害人之名이라 以其自幼至老無一善狀하고 而久生於世하야 徒足以敗常亂俗則是賊而已矣足骨也孔子旣責之하시고 而因以所曳之杖으로 微擊其脛하시니 若使勿蹲踞然이라

원양은 공자의 옛 사람이라. 어미가 죽었는데 노래를 불렀으니 대개 노자의 흐름으로(노자의 종류로) 스스로 예법의 밖에서 방종한 자라. 이는 걸터앉음이라. 사는 기다림이라. 공자가 오는 것을 보고 걸터앉아서 써 기다림이라. 술은 칭술함과 같음이라. 적이라는 것은 사람을 해롭게 하는 명칭이라. 써 그 어려서부터 늙기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선한 일이 없고, 오래 세상에 살아서 한갓 족히 써 오상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어지럽게 했으니 이것은 해롭게 할 뿐이라. 경은 발 뼈라. 공자가 이미 꾸짖으시고, 인하여 써 끌고 간 지팡이로 그 (걸터앉은) 앞정강이를 살살 치시니 하여금 걸터앉지 않도록 하심이라.

 

: 웅크릴 준, 걸터앉을 준 : 걸터앉을 거

 

<47>

 

闕黨童子將命이어늘 問之曰益者與잇가

궐당동자가 명을 갖거늘 혹이 물어 가로대 유익한 자잇가?

 

: 여기서는 가질 장, 행할 장

 

[본문 해설]

하루는 공자가 궐당동자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이를 본 사람이 궐당동자가 공부하는데 장차 진전이 많이 있기에 공자가 특별히 총애하여 심부름을 시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묻는 물음이다.

 

闕黨黨名이오 童子未冠者之稱이라 將命謂傳賓主之言이라 或人疑此童子學有進益故孔子使之傳命으로 以寵異之也

궐당은 당명이오, 동자는 아직 장가들지 않은 자를 칭함이라. 장명은 손과 주인의 말을 전함을 이름이라. 어떤 사람이, 이 동자가 학문이 진전되고 유익함이 있기 때문에 공자가 전명을 시키는 것으로써 총애하고 다름이 있는가하고 의심함이라.

 

曰吾見其居於位也하며 見其與先生並行也호니 非求益者也欲速成者也니라

공자 가라사대 내가 그 자리에 거함을 보며 그 선생과 더불어 아울러 행함을 보니 유익함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빨리 이루고자 하는 자니라.

 

[본문 해설]

혹자의 물음에 대해 공자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궐당동자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거나 어른과 더불어 다니는 것을 본다면, 예절을 익혀가며 점차적으로 공부에 진전을 두려는 자가 아니고, 당장 칭찬 듣고 유명해지려고 서두는 자라.’

 

童子當隅坐隨行이라 孔子言吾見此童子不循此禮하니 非能求益但欲速成爾使之給使令之役하야 觀長少之序하며 習揖遜之容이니 蓋所以抑而敎之非寵而異之也

예기, 동자는 마땅히 귀퉁이에 앉고 (어른을 따라) 행하니라(맹자고자하편 제2장에도 徐行後長者謂之弟疾行先長者謂之不弟하였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동자를 보니 이 예를 따르지 아니하니 능히 유익함을 구함이 아니고 다만 속히 이루고자 함이라. 그러므로 하여금 심부름하는 일을 주어서 어른과 젊은이의 순서를 보게 하며 읍손의 용모를 익히게 함이니 대개 써한 바 억제하여 가르치려는 것이지, 사랑하고 남달리 함이 아니니라.

 헌문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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