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데 산티아고

산티아고 순례길의 도시들

甘冥堂 2020. 6. 3. 14:38

산티아고 순례길의 도시들

                                  /  박 용 진

 

 

1. 산티아고 순례길의 기원

(1)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의 기원

(2) 산티아고 순례의 기원

2. 산티아고 순례의 역사

(1) 순례의 동기

(2) 순례의 네 가지 길

3. 산티아고 순례가 만든 도시들

4. 순례길에 있는 교회의 건축 양식

5. 산티아고 순례의 오늘과 내일

 

오늘날 사회는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속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걷기를 권하는 여행이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바로 그것이다. 이 순례길은 1993년 스페인의 요청과 1998년 프랑스의 요청으로 두 차례에 걸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매년 이 순례길을 다녀가는 사람은 1980년대 이후 꾸준히 증가하여 2018년에는 30만명 이상이 다녀갔다. 우리나라에서도 200년대 초반 100명 이하였던 순례자의 숫자가 2006년경부터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여 2018년에는 5600명이 되었다. 이 숫자는 국가별 통계에서 9위이며, 아시아에서는 1위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본떠 우리나라에도 올레길이 생긴 것만 보더라도 순례길과 걷기가 사람들의 관심사임을 알 수 있다.

 

1. 산티아고 순례길의 기원

 

(1)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의 기원

성 야고보는 예수의 열두 제자들 중 한 명으로서 예수 승천 이후 이베리아 반도에서 포교를 했으나 성과가 없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다시 포교를 하다가 순교했다. 그의 제자들이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그곳에 성 야고보가 묻혔다. 그 이후 그의 무덤은 잊혔으나,

9세기에 발견되었다. 성 야고보의 무덤을 발견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9세기 초 은둔수도사 펠라기우스(Pelagius)는 스페인 북서부 이리아 플라비아(Iria

Flavia)에서 멀지 않은 산 펠릭스 데 로비오(San Felix de Lovio)에 살고 있었다. 810년에서 813년 사이에 여러 차례

천사들이 나타나 펠라기우스에게 야고보의 무덤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마침내 어느 날 밤 펠라기우스는 유난히 밝게 빛나는 한 무리의 별들을 보게 되었고, 이러한 사실을 이리아 플라비아 주교였던 테오데미르에게 말하여,

같이 그 별 무리를 따라갔다. 별 무리가 들판의 어느 지점에 멈췄고, 펠라기우스와 테오데미르는 그 지점을 파서 대리석 관 속에 있는 야고보의 유해를 발견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그 들판에 (Stela)’이 빛나는 들판(campus)’이라는 뜻의 콤포스텔라(Campus+stela)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묘지를 경배하러 온 최초의 순례자는 아스투리아스(Asturias) 왕 알폰소 2세였다. 주교 테오데미르는 성 야고보의

무덤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아스투리아스(Asturias) 왕 알폰소 2세에게 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알폰소는 즉시 신하들을 이끌고 그곳을 찾았다. 그리고 거기에 대리석으로 된 관 위에 돌과 점토로 된 예배당을 짓도록 했다.

그리고 펠라기우스가 은둔하며 수도하던 곳에는 안테알타레스(Antealtares) 수도원을 짓게 했다.

 

성 야고보 숭배는 점차 확산되어 10세기에는 남부 프랑스에서도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까지 순례를 다녀갔다.

프랑스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이곳을 순례한 사람은 프랑스 중부 지방에 있는 르퓌앙블레(Le Puy en Velay) 주교

고테스칼크(Gotescalc)였다. 그는 950년 말을 타고 산티아고를 순례했다. 그 이후 산티아고로의 순례가 결정적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나바라 왕 페르난도(Fernando) 대왕의 정복 덕분이었다. 1064년 페르난도는 코임브라(Coimbra)까지 정복하여 이베리아 반도 북부 일대에 거대한 왕국을 건설했다. 왕은 이러한 승리가 성 야고보 덕분이라고 생각하여,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섰다.

 

(2) 산티아고 순례의 기원

그러나 성 야고보의 유해 발견에 관한 이 이야기는 11세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이야기를 담은 최초의

문헌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주교 디에고 펠라에스(DiegoPelaez)와 안테알타레스 수도원 사이에 맺어진 협약서인데 그 작성 일자가 1077년이기 때문이다. 또한 11세기에 성 야고보 숭배가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 널리 확산되었다는 점도 성 야고보와 관련된 전설이 11세기경에 만들어졌다는 추정을 뒷받침해준다.

이와 유사한 사례를 샤를마뉴와 롤랑(Roland) 이야기롤랑의 노래라는 중세 무훈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서사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Charlemagne, Karl 대제)가 성 야고보의 요청에 따라 피레네 산맥을 넘어 북부 스페인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까지 정복했다. 그가 프랑스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피레네 산맥의 롱스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매복해있던 이슬람 군대가 샤를마뉴 군대의 후위를 공격하자 샤를마뉴의 충성스런 부하였던 롤랑(Roland)이 이를 막아내고 샤를마뉴가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롤랑은 결국 전사하고 샤를마뉴가 되돌아와서 이슬람 군대를 물리치고 롤랑의 시신을 프랑스로 옮겨와서 장례식을 치러준다. 장례식을 치른 날 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샤를마뉴에게 스페인으로의 십자군을 명하면서 무훈시는 끝이 난다.

 

샤를마뉴는 8세기경에 유럽을 통일했던 실존 인물이지만 샤를마뉴와 롤랑의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은 11세기경이었다. 게다가 이야기와는 달리 실제 샤를마뉴는 스페인으로 진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롱스보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샤를마뉴와 롤랑의 이야기가 8세기경의 일인데 왜 11세기에서야, 그것도 사실과 다르게 이야기로 꾸며졌을까?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과 주제를 잘 살펴보면 용맹함, 충성심, 기독교의 성인, 신이 부여한 소명 등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8세기의 인물과 사건들이 11세기에서야 소환된 것은 샤를마뉴나 롤랑과 같은 용맹스런 인물이 성 야고보가

알려준 기독교의 소명에 따라 이교도를 물리쳐야 할 필요성이 11세기경에 대두되었음을 말해준다.

 

11세기 스페인에서는 성 야고보 숭배가 확산되었는데, 이는 스페인에서 이루어진 재정복운동(reconquista) 때문이었다. 8세기 초 이슬람의 우마야드 왕조는 스페인에 침입하여 기독교를 믿던 서고트 왕국을 정복했다. 그러나 이슬람의 정복 직후부터 스페인 북부에서는 이슬람 세력에게서 벗어나 독자적인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수립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이슬람에 반대되는 세력의 도움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도움을 필요로 했고,

로마 가톨릭 역시 스페인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그리하여 기독교 세력은 점차 이슬람으로부터 스페인을 탈환해 나갔고, 마침내 1492년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것을 재정복운동이라고 한다.

 

10세기부터 유럽 사회가 안정을 찾아가면서 재정복운동 역시 활발해졌는데, 이들의 힘만으로는 부족했으므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세력을 구했다. 특히 지리적으로 가까운 남부 프랑스에서 스페인 북부로 십자군을 떠나도록 했다. 그런데 십자군에는 명분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성 야고보의 전설이 탄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성 야고보의

무덤이 스페인 서쪽 끝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까지 가기 위해서는 이슬람 지역을 통과해야 했다. 그러므로 로마 가톨릭 측에서는 안전한 순례길을 위해서 많은 기독교 기사들이 순례에 참여하는 기사단이

조직되어야 했다.

 

결국 성 야고보의 무덤에 관한 이야기나 샤를마뉴와 롤랑의 이야기 역시 이베리아 반도의 재정복 운동(reconquista)을 추진하고 있던 교회가 산티아고 기사단에 더 많은 기사들이 지원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꾸며낸 전설로 생각된다.

이러한 재정복운동에서 성 야고보는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는 기독교의 성인이 되었고 무어인의 학살자(Matamoros, Moor-slayer)”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스페인 북부의 산티아고 순례길의 도시에서 성 야고보가 학살자로

표현된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유럽 전역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순례를 떠나게 된 것은 10세기 중반부터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1100년경에는 잉글랜드에서도 순례자들이 오기 시작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하여 12세기 중반에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의 순례는 매우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칼릭스투스 2세는 콤포스텔라 성년(聖年)을 시작했으며 순례 안내서를 제작하도록 했다. 이 책은 칼릭스투스 서책, 또는 성 야고보 기() (Liber Sancti jacobi)라는 책으로서,

5권으로 되어 있는데, 4권이 샤를마뉴와 롤랑의 이야기이며 제 5권이 산티아고 순례 안내서이다. 이 서책에 샤를마뉴와 산티아고 순례가 함께 묶여 있는 것을 보면, 앞서 말했듯이 성 야고보 숭배의 확산은 이베리아 반도로의 십자군을 촉진시키기 위한 것

 

2. 산티아고 순례의 역사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는 도시 자체보다는 순례길 전체가 유명하다. 따라서 도시 자체의 모습보다는 순례가 도시의 모습에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순례길과 도시들을 살펴보자.

 

(1) 순례의 동기

오늘날 산티아고 순례길이라고 하면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 이르는 길을 떠올린다. 또한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순례자를 떠올린다. 그리하여 순례란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까지 마냥 걷기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물론 걷기만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본래 순례의 목적은 소원성취와 속죄에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가 시작된 중세 시대의 기록을 보면 질병 치료에 관한 이야기가 많으며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이야기도 있다. 즉 성 야고보 숭배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사람들의 기도와 그 성취에 있다. 따라서 순례의 목적이

사람들의 소원 성취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순례는 종교적인 성격을 훨씬 더 많이 갖게 된다. 1215년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고해가 의무화되고, 고해에 따라 죄사함을 받기 위한 대속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중대한 죄에 속하면 순례를 명령받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이러한 명령에 의해서보다는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훨씬 이후 시기이기는

하지만 15세기중반 영국인 윌리엄 웨이(William Wey)가 쓴 산티아고 순례기에 따르면, 산티아고 순례를 떠나면 죄의 1/3을 면제받으며, 가는 도중에 죽으면 완전히 사면된다고 되어 있다. 또한 산티아고에서 열리는 종교행렬에 참석하면 40일을 면제받으며, 만약 주교가 이 행렬을 이끈다면 200일 이상을 면제받고 행렬이 야고보 축일인 724일에 있다면 600일을 면제받는다. 주교나 수도원장 등 고위 성직자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면 200일을 면제받고, 산티아고 시내외곽에 있는 마지막 숙박지인 몬테 델 고소(Monte del Gozo)에서 미사를 드리면 100일을 면제받는다고 되어 있다.

 

결국 순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면죄에 있었다. 따라서 산티아고 성당에서는 순례자들에게 다녀갔다는 증명서를 발급했다. 아래에서 보듯이 그 내용은 매우 단순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면죄부였던 셈이다. 오늘날에도 산티아고 대성당 옆에는 순례자 안내소가 있는데, 이곳에서 증명서를 발급해준다. 순례자가 이 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순례의 출발지에서 발급받은 순례자수첩(carnet)을 통해 100Km이상 걸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2) 순례의 네 가지 길

산티아고 순례길 노정 자체도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 이르는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세 시대 이래 주로 사용된 노정만 해도 네 가지이며, 오늘날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노정이 있다. 중세 시대 이래

가장 널리 알려진 네 개의 길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길은 생 질 뒤 가르, 몽펠리에, 툴루즈, 그리고 아스프 계곡을 지난다.

두 번째 길은 르퓌의 생트 마리 성당, 콩크의 생트 푸아 성당, 무아사크의 생 피에르 성당을 지난다.

세 번째 길은 베즐레의 생트 마리 마들렌 성당, 리무쟁의 생 레오나르 성당, 그리고 페리괴 시내를 통과한다.

네 번째는 투르의 생마르탱 성당, 생 장 당젤리, 생트의 생 퇴트로프 성당을 지나 보르도 시내를 지나간다.

콩크의 생트 푸아 성당을 지나는 길, 생 레오나르를 지나는 길, 그리고 투르를 지나는 길은 오스타바트 근처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오스타바트 근처에서 하나로 합쳐지는데 그곳이 바로 오늘날 생장피에드포르이다. 그러므로 생장피에드포르는 프랑스에서 시작된 네 개의 길 중에서 세 개가 합쳐지는 곳이다. 그리고 여기서 출발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면 프랑스 남부

아를 근처 생질뒤가르에서 시작된 첫 번째 길이 푸엔테라 레이나에서 만난다. 그리하여 그곳에서부터는 하나의 길로

산티아고에 이른다.

 

 

3. 산티아고 순례가 만든 도시들

산티아고 순례는 이베리아 반도 북부 도시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산토도밍고데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라는 도시는 산티아고 순례를 위해 만들어진 도시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도시의 성립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도밍고(도미니크)는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빌로리아(Viloria)에서 출생했다. 그는 수차례 베네틱트 수도원에 입회하려고 시도했으나 무식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 후 독립적으로 은둔생활을 시작했는데, 은둔지가 산티아고 순례길의 통행로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가 은둔하고 있던 곳은 원래 원시림이 가득하고 지극히 위험한 곳이었는데, 그가 이곳에 움막과 기도소를 짓고 살면서 좋은 길을 만들었다. 이 도시가 오늘날 산토도밍고데라 칼사다라는 도시이다. 이렇듯 순례는 그

노정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냈다. 순례기에서 제시하고 있는 단계가 13단계인데 비해, 오늘날에는 30여개로 늘어났는데, 늘어난 만큼 도시의 숫자도 늘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순례로 도시 형성될 뿐만 아니라, 도시가 순례 덕택에 발전하는 경우도 많았다. 앞서 언급한 산토도밍고데라

칼사다는 순례에 의해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순례에 의해 발전했고, 이에 따라 순례길이 형성된 초기부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2세기의 산티아고 순례 안내서에는 산토도밍고데라칼사다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온다.

 

한 독일 청년이 부모님을 모시고 순례를 하던 중 이곳 여관에 머물게 되었다. 이 여관집 딸이 잘생긴 청년을 유혹했으나, 청년은 그 유혹을 거절했다. 그러자 그녀는 앙심을 품고, 교회의 은잔을 청년의 가방에 숨겼다. 다음날 체포된 청년의 가방에 은잔이 나왔고, 청년은 교수형을 당하여 효시되었다. 그들의 부모는 계속 산티아고로 갔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이곳에 들르게 되었다. 그러나 아들은 효시된 채로 살아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산토 도밍고가 어깨로 그를 떠받쳤다고

한다. 청년의 부모는 영주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그 때 마침 구운 닭으로 식사를 하려던 영주는 만일 당신의

아들이 살아있다면 이 식탁의 구운 닭도 살아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 닭이 꼬꼬댁하며 날아서 도망갔다.”

이 이야기는 12세기에 만들어진 산티아고 순례 안내서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그 이전부터 산토도밍고데라 칼사다가 순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닭의 후손이 지금도 산토도밍고데라칼사다에 있으며, 교회 사제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닭의 건강을 돌보는 것이라는 점이다.

 

푸엔테 라 레이나의 경우 유럽 각지에서 출발한 순례 길이 하나로 합쳐지는 도시로서, 순례에 의해 발전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순례가 활성화되기 이전에 푸엔테 라 레이나는 가레스(Gares)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이었다. 그리고 마을 주변을 통과하는 강에 다리도 없었다.

그런데 순례자들이 늘어나면서, 왕비의 명에 의해 다리가 만들어졌고, 이 다리를 중심으로 도시가 발전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프랑스인, 유대인, 나바르인, 프로방스인 등 여러 지역 출신의 사람들이 정착했다. 1142년 나바라의 왕 가르시아 라미레스(Garcia Ramirez)는 이 도시를 기사단에게 주었고, 기사단은 이 도시에 많은 구호소를 운영했다.

그리하여 푸엔테 라 레이나는 순례길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시로 발전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가장 큰 두 도시인 부르고스(Burgos)와 레온(Leon)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르고스의 경우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성채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 도시의 이름인 부르고스는 중세 시대의 성채를 뜻하는 라틴어

부르구스에서 기원했다. 9세기 초 카스티야 백작이 성채를 세우고 주변 주민들을 성채 내부에 정착시킴으로써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에 대항한 기독교의 전초기지를 만들었다.

 

레온의 경우 로마 시대에 비교적 큰 도시였지만 8세기에 이슬람에 의해 정복당했다. 오랫동안의 노력 끝에 10세기 초

기독교 왕국인 레온왕국이 세워졌으나, 그 이후에도 이슬람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11세기부터 국왕에 의해 상업의

중심지가 됨으로써, 특히 산티아고 순례길의 경유지로 기능함으로써 그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요컨대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 있는 여러 도시가 만들어지거나 발전하는 데에 산티아고 순례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4. 순례길에 있는 교회의 건축 양식

산티아고 순례가 도시와 도시, 지역과 지역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증대시켰다는 사실은 건축 양식에 반영되어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모든 성당들을 살펴볼 수는 없으므로, 대표적인 도시라고 할 수 있는 부르고스, 레온, 산티아고 등의 성당을 살펴보자.

 

먼저 산티아고 성당을 살펴보자. 대체로 유럽의 성당은 도시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 그러므로 성당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성당은 예수가 팔을 벌리고 동쪽을 향해 누워있는 형상이다. 그리하여 동쪽 부분을 머리라고 하며, 여기에 제단이 있다. 동쪽은 제단으로 막혀있으므로 사람들의 출입은 서쪽 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서쪽문 앞에는 대체로 큰

광장이 있는데, 산티아고 성당 앞에 있는 광장은 오브라도이로(Obradoiro) 광장이다. 순례자들은 이 광장을 거쳐서 성당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성당의 서쪽 문이야말로 순례자들이 처음으로 성당과 만나는 부분이다. 이 서쪽 문 위에는 기독교적 상징을 조각해 놓았다. 교회의 정문위의 팀파눔에 새겨진 부조들은 대개 최후의 심판이나 예수의 승천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교회들의 특징은 최후의 심판과 같은 기독교의 주요한 이미지가 교회내부에

있지 않고 교회 외부에, 그것도 신도들이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대부분

문맹이었던 사람들에게 이미지는 매우 중요한 지식 전달의 도구였다. 그러한 사람들이 교회의 정문에서, 그것도 순례에 지친 몸을 이끌고, 대면하게 되는 첫 이미지가 바로 최후의 심판이라면, 순례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졌겠는가!

 

이 이미지를 살펴보면, 교회마다 차이는 있지만 한 가운데 그리스도가 있고, 그 옆이나 밑으로 12사도와 성인들, 그리고 천사들이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의 정문인 글로리아 문의 팀파눔 조각은 최후의 심판을 표현하고 있는데,

거기에 조각된 예수의 모습은 과거에 비한다면 훨씬 현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최후 심판의 주재자이기는 하지만

육신과 영혼을 가진 존재로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추상적이며 비현실적인 존재가 아니라 현실적인 존재로서

사람들에게 좀 더 친근한 느낌을 주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과 동등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사람들보다 더 위에 존재하는 것으로, 그리고 중앙에 있으며, 더 크게 표현되었다. 좀 더 후대에 세워진 교회의 팀파눔에는 예수와 4명의 사도(마태, 마가, 누가, 요한)가 새겨져 있다. 이러한 부조를 통하여 순례자들은 자연스럽게 기독교 세계의 위계질서를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팀파눔의 상징들은 고딕양식의 성당건축에 영향을 주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손을 씻는 수반이 있다. 그리고 반대편, 즉 동쪽에는 제단이 설치되어있는데 입구보다 약간 위쪽에 위치한다. 입구와 제단 사이에는 신도들의 좌석이 있다. 이곳을 영어로 네이브(nave)라고 하는데, 네이브의 어원이 라틴어

(navis)에서 나왔음을 생각해보면, 교회 건물 자체는 천국으로 가는 배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회중석을 통과하면 성가대석과 제단에 이르게 된다. 제단에는 성물(聖物)이 있는데, 대개 순교자나 성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산티아고 성당의 경우 성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어 성 야고보에게 봉헌된 성당이므로 당연히 성 야고보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중세 시대부터 성유골을 훔쳐가는 사례가 많았으므로, 오늘날에는 제단에서 수직으로 내려간 지하에 관이 놓여있어서, 지하로 내려가야 성 야고보의 관을 볼 수 있다.

 

제단 뒤편으로는 둥그렇게 보행자 통로(ambulatory)가 있는데, 이 부분을 왕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교회는 이 통로가 없었다. 즉 동쪽 벽에 제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순례가 활성화되면서 제단 뒤편으로 보행자 통로를 마련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제단의 성 야고보 유해를 보거나 만질 수 있도록 했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이곳까지 온 이유는 성 야고보의 유해를 보고 만지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성당 측에서는 더 많은

순례자들이 물 흐르듯이 성당 내부로 들어오게 하려고 중앙부 회중석 양옆으로 복도를 만들었고, 이 복도를 지나 날개 부분을 돌아서 제단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날개 윗부분에 반원형의 예배당을 만들어서,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제단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반원형 통로를 만듦으로써 제단을 전면에서만 보지 않고, 모든 방향에서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이 복도에도 많은 예배당을 만들었다. 이 제단을 통과하면 다시 반대쪽 날개를 통해서 교회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한 마디로 순례를 위한 교회 건축이었던 셈이다.

 

산티아고 성당은 1100년경에 건축되었는데, 이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 성당들이 순례길을 따라서 건축되었다. 대표적인 성당들이 콩크의 생트 푸아 성당, 무아사크의 생 피에르 성당, 툴루즈의 생 세르냉 성당, 베즐레의 생트 마들렌 성당 등이다. 산티아고 성당과 비슷한 이들 성당들은 대체로 남부 프랑스에 있는 것들로서 중세 초기의 교회건축 양식인 로마네스크(Romanesque) 양식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둥근 아치와 두꺼운 벽체를 특징으로 한다. 벽체가 두껍기 때문에 실내는 다소 어둡다.

 

중세 전성기에 접어들면서 중세인들의 신앙심이 높아져서 하늘에 닿으려는 욕망도 점점 커졌다. 그리하여 성당의 천장을 높이려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했다. 그러나 둥근 아치형 지붕으로는 높이를 높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놀랍게도

중세인들은 궁륭을 점점 더 높여서 서로 맞댐으로써 뾰쪽한 모양을 가진 교회를 건축했다. 이것이 고딕 양식이다.

천장이 높아졌으므로 고딕 양식의 교회들은 대체로 높이가 더 높고, 전면에서 보았을 때 뾰쪽한 아치를 가지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부르고스와 레온 성당이 고딕 양식이다. 또한 고딕 양식의 특징은 전면부, 즉 서쪽문의 양 옆으로 높은 탑이 솟아 있는데, 이는 중세 시대의 중심 건축물인 성채(castle)의 망루와 같은 것이다. 교회는 지사아에서 사탄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하느님의 전진기지이다. 그러므로 외적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는 성채와 마찬가지로 망루와 같은 탑을 세워놓았다.

 

고딕 교회의 경우에도 팀파눔의 조각은 최후의 심판 그대로인데, 안으로 들어가면 중세 초의 로마네스크 교회와는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고딕 양식의 건축물들은 채광을 위해서 벽을 전부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었다. 이로써 고딕 교회는

로마네스크 교회보다 훨씬 밝게 변했다. 고딕 교회의 창문에는 모두 성경의 내용이나 해당 지역의 성인과 관련된 이야기를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서 표현했다. 이러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중앙부 회중석 양옆의 복도 유리창을 장식하고 있었으므로, 이곳을 통과하는 순례자들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기독교의 교리와 성인들의 업적을 배울 수 있었다.

 

5. 오늘날의 상황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순례는 오늘날에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순례길 만은 아니다. 아래 표를 보면 1980년대부터 순례자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표의 시작이 1980년대 중반인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산티아고 순례가 오늘날 다시 인기를 얻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또한 1993, 1999, 2004년 그리고 2010년에 예외적으로 높은 수치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이 연도들이 산티아고 성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티아고 순례의 부흥을 이끈 것은 앞서 이야기한 바 있듯이 1980년대 초 교황의 직접 방문과 산티아고 성년 부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지속적인 증가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1990년대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1997년 룩셈부르크에 유럽문화도로 협회가 생겼고, 이 협회가 유럽 연합의 위임을 받아서 유럽 문화도로 제 1호로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지정된 일이다. 그런데 유럽연합에서 제공하는 산티아고 순례지도는 중세의 안내서가 제공하는 길보다 훨씬 다양한 루트를 제공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도

스페인과 프랑스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유럽연합이 이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순례길을 굳이 유럽 문화도로로 선정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유럽 문화도로협회는 복잡 다양한 유럽의 문화와 사회에서 유럽 공통의 가치를 형성하는 것을 도로 선정의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 보면 기존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주로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문화유산이지 유럽연합

전체의 문화유산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유럽 문화도로의 목표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사실 오늘날에도 대개의 사람들은 프랑스의 피레네 산맥 근처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순례를 시작하지 않던가! 이러한 이유로 유럽 연합으로서는 기존의

순례길을 확대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산티아고 순례길은 유럽 어느 곳에서나 출발하는 유럽의 문화도로가 되었다. 이러한 점은 유럽 연합이 제시하고 있는 순례길 관련 국가 목록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벨기에,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포르투갈, 에스파냐, 스위스 등이 관련 국가들이다. 유럽 연합의 이러한 목표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순례의 통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순례자들 중 대부분, 90%가 유럽인들이다.

그리고 국가별로도 비교적 넓게 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또다른 특징은 과거에 비해 종교적인 목적의 순례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순례길에서 종교적인 색채가 점점 옅어지고 문화적인 경향, 혹은 세속적인 경향이 많아짐으로써 산티아고 순례길이 유럽이나 기독교만의 문화유산을 넘어서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순례자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기독교적 성격이 줄어들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순례자들이 증가한 것은 이러한 비기독교적 성격을 강화시킬 것이다.

한 마디로 산티아고 순례자의 숫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종교적 색채는 약화될 것이고,

이에 따라 산티아고 순례길은 유럽 연합의 문화도로를 넘어서 세계 문화유산으로서 중요성이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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