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방서 50명 함께 잔다…예약도 안 받는 산티아고 순례길 숙소
산티아고 순례길은 전 세계 여행자의 버킷리스트로 통한다.
거창하고 근사하고 특별한 일만 벌어질 것 같지만, 의외로 순례길의 하루는 단순하다.
걷고 먹고 자는 것. 이 세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 일과의 전부다.
마음을 짓누른 속세의 고민은 오늘 어디에서 잘 것인가 하는 당장의 걱정 앞에서 부질없다.
순례자에겐 두 가지 옵션이 있을 뿐이다.
단돈 10유로(약 1만5000원)의 공립 알베르게(순례자 숙소)로 갈 것인가,
2배가량 돈을 더 내고 사립 알베르게에서 잘 것인가?
한 달간 680㎞ 도보 여정 그 두 번째. 오늘은 ‘숙소와 음식’에 관한 이야기다.
순례자의 일과는 단순하다. 걷고, 먹고, 자는 것이 전부다. 단순한 일과지만 만족감이 크다.
공립 알베르게의 잠자리는 꽤 열악하다. 많게는 50명 이상이 한방에서 잘 때도 있다.
호텔 수준의 침구류와 위생 상태는 포기하는 게 현명하다.
하지만 1박 10유로(약 1만5000원)라는 비용이 모든 걸 용서해준다.
첫 번째 공립 알베르게에선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다가 문 앞 이층 침대 위 칸이 걸렸는데,
보초 서는 신세처럼 문이 열릴 때마다 눈이 떠져, 밤새 선잠만 잤다.
다음 날부터는 알베르게에 1등으로 도착하겠다는 일념으로 걸었다.
오늘 밤은 좋은 자리를 꼭 선점하리라!
공립 알베르게는 예약을 받지 않는다. 선착순 입실이 원칙이다.
잠귀가 밝은 나는 당연히 화장실이나 출입문에서 가장 먼 자리부터 찜했다.
숙면하면 다음 날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순례자들이 한참 잠들어 있는 새벽 6시에 출발할 수밖에 없던 이유다.
그렇게 우리는 보통 하루 25km(대략 7시간 소요)를 걸었다.
사립 알베르게는 공립에 비해 비싸다.
객실 내 수용 인원이 적고 좀 더 쾌적한 환경을 제공한다.
간혹 사립 알베르게도 이용했다. 침대 하나당 15~30유로
(약 2만2000원~4만5000원)를 받는데, 예약도 가능하다.
식당을 겸하는 곳도 있다.
이런 알베르게는 ‘순례자 메뉴’라 이름 붙인 3코스 저녁 식사를
하우스 와인과 함께 15유로(약 2만2000원) 내외로 판다.
고된 하루를 끝내고 술을 곁들인 식사를 할 때면 집밥 같은 따뜻함이 느껴졌다.
이런 날에는 볼록 나온 배를 두드리며 소화도 되기 전에 잠들었다.
드물게 기부제 알베르게도 존재한다. 정해진 숙소 비용이 없는 예약제 숙소다.
예고 없이 폭우가 쏟아진 어느 날, 가던 길을 멈추고 근처에 있는 숙소를 찾았다.
영국 순례자 협회에서 운영하는 기부제 알베르게가 멀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한 영국식 악센트의 봉사자들이 우리를 반겨줬다.
비를 뚫고 온 순례자들을 위해 난로가 켜졌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등산화와 옷을 말렸다.
차가운 비바람에 몸이 지쳤는지 해도 떨어지지 않은 초저녁,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새벽 은혜 갚은 제비의 심정으로 기부금을 내고 다시 길을 나섰다.
숙소 하나에 울고 웃는 이런 단순한 일상이 30일 내내 이어졌다.
종일 걷고, 대자로 뻗어 자는 데만 집중하니 세상 걱정과 시름 따위 내 안에 없었다.
이 원초적인 일상이 채워주는 만족감은 10년이 넘는 여행 중에서 처음 맛본 것이었다.
김은덕 think-things@naver.com
비 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바르의 난로가 켜진다.
순례자들은 그 앞에 옹기종기 모여 등산화를 말린다.
순례자를 위한 영혼의 안식처로 통하는 것이 스페인식 카페 겸 술집 ‘바르’다.
순례길을 걷다가 바르가 보이면
모든 순례자가 방앗간 찾는 참새의 심정으로 바르에 모여들곤 했다.
커피 한 잔으로 잠을 깨우거나 꼴라까오(스페인의 천연 코코아 가루)로 당을 충전했다.
10km를 넘게 걷는 동안 바르를 만나지 못한다? 그건 순례자에게 더없이 가혹한 하루다.
나는 바르에서 음료를 마실 때면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지고 발을 말렸다.
그 때문일까. 680㎞를 걷는 동안 작은 물집 하나 없이 완주할 수 있었다.
이른바 ‘북쪽 길’을 걷는 동안 스페인의 4개 주를 지났다.
바스크에서 출발해 칸타브리아~아스투리아스~갈리시아로 길이 이어졌다.
세 번째 주 아스투리아스에서 만난 ‘파바다’라는 음식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스페인식 부대찌개라고 할까. 스페인 소시지 초리소와 돼지 선지를 넣어 만든
소시지 모르시야, 누에콩, 절인 돼지고기 등을 넣어 끓인 지역 전통 스튜이다.
뜨끈뜨끈한 파바다를 먹고 나면 왠지 체력이 충전되는 느낌을 받았다.
지역 특산 사과로 담근 시드라라는 술까지 곁들이면 슈퍼 히어로처럼 힘이 솟았다.
갈리시아 주는 문어 요리 ‘뽈뽀 아 페이라’가 으뜸이다.
거대한 문어를 4~5번에 걸쳐 삶고 식혀가며 조리하는데,
생선 살처럼 식감이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한국에서처럼 쫄깃쫄깃한 문어를 기대했다가 낯선 식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렇게 먹고 즐기다 보니 어느덧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 대성당 앞이었다.
대성당 앞에 있는 미쉐린 빕 구르망 식당
‘아 오르타도브라도이로(A Hortad’Obradoiro)’에서 마지막 식사를 했다.
성게 알을 넣은 오믈렛, 입에서 눈처럼 녹는 안심스테이크,
대서양의 싱싱함이 담긴 생선구이는 순례길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완벽했다.
나 역시 원초적인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 법을 깨달았다.
은덕의 원동력이 잠이었다면, 나는 식욕이라는 본능에 더 충실했던 것 같다.
고된 여정을 견딘 끝에 받은 보상, 음식이 내게 준 위로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꼬박 한 달을 걸어서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했다.
순례자 여권인 크리덴셜을 들고 기념사진을 담았다.
백종민 alejandrobaek@gmail.com
■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 정보
「 루트 : 북쪽길(빌바오~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거리 : 총 길이 680㎞
기간 : 31일(9월 24일~10월 24일)
비용 : 230만원(식비·숙박비 등 하루 평균 1인 50유로(약 7만3000원),
항공료 별도)」
■ 여행작가 부부 김은덕, 백종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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