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루카 복음서 11장 11~13절)
아무리 악한 사람도 자식에게는 잘한다.
왜 그럴까. 자기 자신과 자식을 하나로 보기 때문이다.
하느님도 자녀를 그렇게 본다. 둘로 보지 않는다.
성부와 성자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선을 청하면 생선을 준다. 뱀을 주지 않는다.
달걀을 청하면 달걀을 준다. 독을 품은 전갈을 주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다.
우리가 청할 때, 우리가 찾을 때, 우리가 두드릴 때가 문제다. 왜 그럴까.
우리는 머물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
아무리 두드려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하느님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의 메시지 앞에는 거대한 괄호가 생략되어 있는 셈이다.
그 괄호 속에 들어갈 말이 ‘머무는 바 없이’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이 메시지 앞에 ‘머무는 바 없이’가 생략되어 있다.
그 구절을 넣으면 이렇게 된다.
“머무는 바 없이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머무는 바 없이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머무는 바 없이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왜 불교 경전의 구절을 그리스도교 성경에다 갖다 붙이느냐며 따진다.
문자 속에 담긴 이치는 보지 못하고, 문자만 보기에 그렇게 말한다.
우리가 종교를 통해 궁극적으로 찾는 것은 손가락이 아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이다.
그 달이 우리의 삶을 평안하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한다.
그럼 예수는 ‘머무는 바 없이’를 아예 언급하지 않았을까.
이건 불교의 『금강경』에만 있는 구절일까. 그렇지 않다.
예수는 이미 ‘머무는 바 없음’을 설했다.
성경 곳곳에서 숱하게 “머물지 마라”라고 강조했다. 그것이 뭘까.
그리스도교에서는 그것을 뭐라고 표현했을까. ‘내맡김’이다.
하느님을 향한 전적인 내맡김.
그것이 바로 ‘머무는 바 없음’이다.
덕암사 처사가 이글을 보고 느낀바 있어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