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아내와 나 사이

甘冥堂 2022. 11. 25. 10:35

아내와 나 사이 / 詩人.李生珍 (1929~ )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
지난 2019년 봄
평사리 최참판 댁 행랑채 마당에서
박경리 문학관 주최로
제1회 "섬진강에 벚꽃 피면 전국詩낭송대회"가 열렸습니다.

60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낭송시가 바로 李生珍 詩人의 이 작품입니다.

7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 낭송가의 떨리고 갈라지는 목소리에 실려 낭송된 이 시는
청중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젖게 하였습니다.

좋은 낭송은
시 속의 ‘나’ 와
낭송하는 ‘나’ 와
그것을 듣고있는 ‘나’ 를
온전한 하나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내 몸의 주인인 기억이
하나둘 나를 빠져나가서
마침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나이.

나는 창문을 열려고 갔다가
그새 거기 간 목적을 잊어버리고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무엇을 꺼내려고 냉장고에 갔다가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채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앞이 막막하고 울컥하지 않습니까?

시인은 차분하게
이 참담한 상황을 정리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서로 모르는 사이가 /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
다시 모르는 사이로 /
돌아가는 세월”
일 뿐이라고.

그리고 자책하는 목소리에 담아
우리를 나무라지요.

거창하게
인생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며

마치 삶의 본질이
거기에 있기나 한 것처럼 핏대를
올리는 당신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고.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나 사이’ 의 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셈이지요.

오늘도 당신은 좋은일만 있을겁니다.

김남호 / 문학평론가

'세상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집을 설계하다  (0) 2022.11.26
先景後事  (1) 2022.11.25
국화를 노래하다ㅡ陶淵明  (0) 2022.11.24
元稹 菊花  (0) 2022.11.24
老情閑談  (0) 2022.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