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연하장

甘冥堂 2024. 2. 8. 09:10

아송구년 (我送舊年) 나는 묵은 해를 보낼 터이니
여영신년 (汝迎新年) 당신은 새로운 해를 맞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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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년 전의 연하장은 닥종이에 정성스럽게 먹을 갈아 글씨를 썼을 것이다.
여덟 글자라는 절제미로써 더 높은 완성도를 추구했으리라.

발신인은 일본 가마쿠라(鎌倉)에 소재한 원각사(圓覺寺) 관장, 샤구소우엔(釋宗演·1860~1919) 선사다.
선사는 교토(京都)의 하나조노(花園)대학 학장을 지냈다.
선(禪)을 ‘젠(ZEN)’이란 명칭으로 미국과 유럽사회에 처음 소개한 인물이다

수신인은 조선 변산반도 월명암(月明庵)의 백학명(白鶴鳴·1867~1929) 선사다.
두 선사는 1915년 원각사 방장실에서 처음 만났다.
고수끼리는 긴말이 필요 없다.
이 인연으로 이듬해 1916년 새해 인사와 안부를 묻는 한시 연하장이 도착한 것이다. 

구년과 신년은 섣달 그믐날(12월31일) 밤 12시를 기점으로 바뀐다.
12시는 마지막 시각이지만 0시는 새로 시작하는 시각이다.
하지만 12시가 곧 0시다. 따라서 끝인 동시에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학명 스님은 ‘세월(歲月)’이라는 시를 통해
“끝과 시작을 구별해 말하지 말라(妄道始終分兩頭)”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작년의 하늘을 보고 또 신년의 하늘을 봐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試看長天何二相)”고 부연설명 삼아 한 줄을 더 보탰다. 

그럼에도 현실 세계는 구년은 구년이고 신년은 신년이다.


<한 해가 가니(歲月/세월)>
백학명(白鶴鳴·1867-1929) 선사

妄道始終分兩頭(망도시종분양두) 세밑 새해 끝과 시작 둘로 나눠 말을 마세
冬經春到似年流(동경춘도사년류) 겨울 지나 봄 이르니 해가 흐른 듯 싶지만
試看長天何二相(시간장천하이상) 보시게나 멀리 하늘 어이 두 개 모습 있나?
浮生自作夢中遊(부생자작몽중유) 뜬 세상에 제가 지어 꿈속에서 노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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