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玉峯 이숙원의 삶과 詩의 세계

甘冥堂 2024. 2. 19. 08:03


옥봉(玉峯) 이숙원의 삶과 시(詩)의 세계

조선시대 여류시인이라면 보통 황진이, 허난설헌, 매창, 이옥봉 4명을 꼽는다.
황진이와 허난설현은 잘 알려진 반면  매창과 이옥봉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그렇다고 매창과 옥봉이 지은 시들이 덜 뛰어나서는 결코 아니다.

그녀들의 명성과는 달리 그녀들의 남겨진 시는 그렇게 많지 않다,
4명의 여류시인 중 허난설현을 제외한 3명은 신분이 낮은 기생, 서자로
당시 사회의 주류층이 아니었고 평탄한 삶을 살지도 못했다.
 
양반 가문의 허난설현도 순탄하지 않은 결혼생활, 오빠가 정쟁에 휘말리는 등,
슬하의 두자식을 병으로 잃자 슬픔으로 27 꽃다운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유명한 황진이의 시마저도 대부분 멸절되어 남아 있는 것은 20수도 안 되고,
허난설헌의 시들도 허균이라는 편집자를 거쳐 전해져와서 대체로 그 원본을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되며,  
이옥봉의 시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소실되어 현재는 32수가 전하는데 그중 반은 진위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현대 독자들이 이 천재들의 전모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옥봉이 남긴 약간의 시는 상당한 충격을 준다.
앞서 언급한 4명 중 허난설헌과 매창의 시가 선이 가늘고 감성적이며 섬세한 느낌이라면,
황진이와 이옥봉의 시는 몹시 호탕하고 재치 있으며 자유분방하고 호쾌한 느낌을 준다.

허균(許筠, 난설헌 동생)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나의 누님 난설헌과 같은 시기에 옥봉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조백옥(조원의 자)의 소실이다.
그녀의 시는 청장(淸壯)하여 아녀자의 연약한 분위기가 없다"고 평했다.
(家姊蘭雪一時 有李玉峯者 卽趙伯玉之妾也 詩 亦淸壯 無脂粉態)
 
조선의 4대 여류시인 이였던 옥봉 이숙원의 생애와 그녀가 남긴 시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전주이씨로 본명은 李淑媛(이숙원)이다.
조선 중기(16세기 후반)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 대원군의 후손이며 명종 때의 왕족의 후예이다.
몽혼, 규정, 영월도, 안흥증량, 추사 등을 지은 조선 선조 때의 여류시인으로
玉峰은 그녀의 아버지 李峰이 지어준 호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자인 峰을 딸, 그것도 서녀의 호로 지어주었을 정도로
옥봉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컷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옥봉은 임진왜란 때 큰 활약을 하며 사헌부 감찰, 충북 옥천군수를 지낸 이봉의 서녀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글과 시를 배웠는데 너무나도 시문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고
그녀가 지은 시는 주위를 놀라게 했다.
 
결혼할 나이가 되어 신분 때문에 첩살이 밖에 할 수 없음을 알자
옥봉은 결혼에 대한 꿈을 버리고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갔다.
(일부의 자료는 17살에 첫 혼례를 치렀지만 이내 남편이 요절하자 친정에 와 있었다고 되어있다)  
옥봉은 장안의 내 노라 하는 시인 묵객들과 어울려 지냈으며
단종 복위운동에 뛰어들었고
곧 시귀나 짓는 선비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옥봉의 시는 재기발랄하고 참신하여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옥봉은 詩會에서 조원이란 선비를 만나 열열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이옥봉의 사랑을 알게 된 아버지 이봉은 조원을 찾아가 딸을 첩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했지만
이미 결혼한 몸인 조원이 거절하자 딸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이봉은 체면을 따지지 않고
조원의 장인인 이준민에게 도움을 청하여 결국 이준민의 주선으로 옥봉은 소원을 이루게 된다.
자기 딸을 첩으로 들여 달라고 사위 될 사람의 장인에게 청을 하고,
장인은 자기 딸의 씨앗이 될지도 모르는 여인을 첩으로 추천하다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조선 사대부들의 형태이지만,
어떻든 옥봉은 결혼 후 다른 사대부의 첩들과 시를 주고 받기도 하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게된다.
첩살이가 싫어 결혼을 거부했던 그녀였지만 사랑 앞에서는 약해졌다 한다.
 
조원은 옥봉을 받아들이는 대신 앞으로는 절대 시를 짓지 안겠다고 맹세하라 하여, 옥봉은 그러겠노라고 맹세했다.
당시 여염집의 여인이 시를 짓는 것은 지아비의 얼굴을 깎아 내리는 일이라 여겼다.
또한 옥봉의 시는 외로움과 허망함의 발로였으니 지아비를 얻으면 시를 쓰지 않아도 좋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잘 살던 어느 날 조원 집안의 산지기 아내가 찾아와 하소연했다.
남편이 소도둑 누명을 쓰고 잡혀갔으니 조원과 친분이 두터운 파주목사에게 부탁을 해달라 했다.
사정을 들어본즉 아전들의 토색질이 분명했다.

옥봉은 파주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써 보냈다.

 洗面盆爲鏡 (세면분위경) 세수대야로 거울을 삼고, 
琉頭水作油 (유두수작유)  참빗에 바를 물로 기름 삼아 쓰옵니다. 
妾身非織女 (첩신비직녀) 첩의 신세가 직녀가 아닐진대,  
郞豈是牽牛 (랑기시견우) 어찌 낭군께서 견우가 되리까.   
 
* 豈 : 어찌 기 . 牽  : 끌 견
( 거울도 기름도 없이 가난하게 살지만
아내가 직녀가 아닌데 남편이 소를 끄는 사내 즉 견우이겠냐는 뜻)

너무도 가난하고 청렴하게 살지만 견우가 아닌 남편이 어찌 소를 훔쳤겠느냐고 멋지게 항변하는
이 시를 본 관리들은 아낙의 남편을 석방해 주었다.

그래서 산지기는 무사히 풀려났다.
그러나 이일로 옥봉은 쫒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조원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여자와는 살 수 없다”며 내친 것이다.
조원하고 함께 산지 20년쯤 되었을 무렵의 일이다.
 
그토록 자신을 사랑하고 그토록 오랫동안 정을 나눈 여인을 조원은 어찌 그리 매정하게 단칼에 내쳤을까?
처음 첩으로 들었갔을 때 시를 짓지 않기로 한 언약을 깨뜨려서 내쳤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지만 믿기 어렵다.
결혼을 하고서도 그녀가 간간이 시를 지은 흔적(痕跡)이 있는데다가
시와 철천지 원한을 맺지도 않은 선비가 부인이 시를 썼다고 이혼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공적인 판결에 벼슬아치의 부인이 끼어들어 구설수에 오르내리게 된 것을 용납하기 어려워서 일까?
조원의 꽁한 선비 기질로 보건데 타당한 이유일 듯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관가의 판결이 사회를 크게 어지럽힌 것도 아니고 탄원서를 서로 써준 정도에 지나지 않는 데,
그걸 이유로 이혼을 하다니 지금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행동으로 보여진다.

훗날 조원의 고손자인 조정만은 "이옥봉의 행적" 이란 글에서
세상사람들은 옥봉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군자다운 포용력 이라고 말했지만
고조부는 그녀의 재주가 덕보다 승한 것을 미워 했을것이다 라고 적고있다.
조원과 나란히 장원 급제를 한 율곡 이이가 지적한
"그가 문학적 명성은 있지만 국량과 식견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한 것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데도 그런 남편을 옥봉은 밤마다 꿈속에서 그리워 한다.

"꿈속에 오고 간 길 흔적이 난다면 그대 문 앞 돌길은 모래가 되겠내요"
옥봉이 지은 몽혼이란 시의 한구절 이다.

조원이란 남자의 졸렬한 행동은 이런 사랑을 받을 가치가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데도
옥봉은 우리가 모르는 조원의 또 다른 매력에 사로잡혀 있었나 보다.
그에게 버림받은 뒤 한강 뚝섬 부근에 움막을 짓고 미친 여자처럼 울부짖으며 살았다는 얘기도 있다.
강가에서 멀리 북악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을 여자,
옥봉은 조원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썼으나 허사였다.
조원과의 약속을 지키느라 10년 가까이 시혼(詩魂)을 억눌러오다가
산지기를 위해 한 수 지어준 일로 쫒겨나다니 ...
옥봉은 애통한 마음을 담아 시를 읊고 또 울었다.
더 이상 참을 까닭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인지 그녀의 사랑시는 간절하고 정열적이고 슬픔이 가득 차 있다.

이밤, 우리 이별 너무 아쉬워
달은 멀리 저 물결 속으로 지고
묻고 싶어요, 이 밤 어디서 주무시는지
구름 속 날아가는 기러기 울음 소리에 잠 못이루시리

냉정하기 짝이 없는 조원에게 바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저 시름을
옥봉은 아낌없이 시로 남겨놓고 세상을 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난리통에 옥봉이 죽었으려니 짐작할 뿐,
정확한 생사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옥봉에 대한 기이한 후일담이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전해 오고있다.
(지봉유설(芝峯類說 : 조선 중기의 학자 이수광(李睟光:1563~1628)이 편찬한 백과전서 )

그녀가 죽은 지 40년쯤 뒤 조원의 아들 조희일이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의 원로대신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조원을 아느냐?” 는 원로대신의 질문에 부친이라고 대답하니,
서가에서 책 한권을 보여주었는데 “이옥봉 시집”이라 씌어 있었다.

아버지의 첩으로 생사를 모른 지 벌써 40여 년이 된 옥봉의 시집이
어찌하여 머나먼 명나라 땅에 있는지 조희일로선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원로대신이 들려준 이야기는 너무도 기이하고 놀라웠다.

약 40년 전, 중국 동해안에 괴이한 시체가 떠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너무나 흉측한 얼굴이라 아무도 건지러 하지 않아서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로 떠돌아 다닌다고 했다.
사람을 시켜 건져 보니 온몸을 종이로 수백 겹 감고 노끈으로 묶은 여자 시체였다.
노끈을 풀고 겹겹이 두른 종이를 한 겹 두 겹 벗겨내니,
바깥쪽 종이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으나 안쪽 종이에는 빽빽하게 뭔가가 적혀 있었다. 시(詩)였다.
“해동(海東) 조선국(朝鮮國) 승지(承旨) 조원(趙遠)의 첩(妾) 이옥봉(李玉峯)이라는 이름도 보였다.

시(詩)를 읽어본즉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이라,
조원의 후손들이 그녀의 시를 모아서 책을 낸 게 아직도 전해져 내려온다.
이후 임천 조씨 문중에서는 선조와  종인의 뜻에  따라
소실 옥봉의 위패를 안장하고 가묘와 묘단비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매년 음력 10월 14일 봉시제(奉時祭)를 지낸다 한다.


온몸을 자신(自身)의 시(詩)로 감고 죽다니….
그 시(詩)로 몸을 감고 바다에 뛰어들다니….
왜 이런 전설같은 후일담이 전해 올까요?
조원에 대한 미움과 분노(憤怒)에 시(詩)로 몸을 감고 바다에 뛰어 든 것일까요?
여성을 천시하고 인간으로 대하지 않은 봉건적 여성관에 죽음으로 항의한 걸까요?
결국은 시(詩)로 남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삶을 침묵으로 웅변한 걸까요?

이옥봉은 대답이 없다. 오로지 자신(自身)이 남긴 시(詩)들로 그 대답(對答)을 대신(代身)할 뿐이다.
명시종(明詩綜) 열조시집(列朝詩集) 명원시귀(名媛詩歸) 등에 작품이 전해졌고 한 권의 시집이 있었다고 하나
시 32편이 수록된 옥봉집(玉峰集) 1권 만이 가림세고(嘉林世稿)의 부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까마귀마을 님의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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