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參禪)이 잘 안 되는 이유
화두선이나 위빠사나 관찰법이나 여러 명상수행을 오랫동안 해보았지만 별다른 진척을 이루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다.
남들은 자아가 사라지는 무아경(無我境)이나 대상과의 경계가 무너지는 황홀경(恍惚境),
또는 지금 이순간의 물아일체(物我一體)적 현존감 등 다양한 신비경을 체험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왜 나에게는 느껴지지 않는가라는 고민에 빠져 수행의 동력을 잃는 사람들이 많다.
1).참선을 해서 무언가를 얻으려는 욕심과 의지를 내려놓기,
세속의 욕망에 회의감을 느끼고 뭔가 좀 더 거룩하고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참선을 해보지만
참선을 하면서도 <뭔가를 얻으려는 의식의 메카니즘>은 계속 작동한다.
원하는 대상이 돈과 명예에서 마음의 평화나 깨달음으로 변했을 뿐 의식의 작동방식은 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뭔가를 얻으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다고 내려놓으려고 애쓰면 안 된다. 애쓴다는 것은 뭔가를 얻고자하는 의식으로 다시 돌아갈 뿐이다.
여기서 대부분 막힌다. 슬슬 화나기 시작한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내려놓으란 말인가?"
사실 내려놓으려 노력하지 않고 그냥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대상에 대해서 <흥미>가 없어져야 한다.
무언가 알고 싶고, 얻고 싶은 생각이 많이 움직이면 안 되는 지점이다.
그냥 어른들이 꼬마아이들의 구슬치기에 큰 흥미가 없듯이
세상 모든 것이 시시해져야 한다.
모든 것은 덧없다는 깊은 느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출발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인 것이다.
따라서 참선은 뭔가 더 거룩한 것을 얻기 위해서 시작하면 잘못된 첫 단추를 끼운 것이다.
무엇인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서 행복을 찾으려는 방식에서 벗어나서
내가 무엇인가를 얻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음을 느껴야 한다.
여태껏,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고, 옳다고 믿는 것이 진짜가 아닐 수 있다는 절대적 의문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2).관조(觀照)와 기억을 구별하기. 참선하는 법을 누군가로 부터 혹은 책이나 유튜브에서 배운다.
그래서 가부좌를 틀고 고요한 곳에 앉아서 자신의 생각이나 감각을 집착 없이 관찰하거나
화두에 분별없는 의심을 내거나 하는 방법으로 해본다.
맞다 이렇게 하면 된다. 그런데 안 된다.
왜 안 될까?
우리의 자아는 수 백, 수 천 번의 생(生)을 통해서 견고한 자아방어 메카니즘을 형성해왔다.
모든 것을 자아가 주도권을 행사하는 방식이다.
논리와 감정 그리고 그것의 토대가 되는 많은 경험의 기억정보를 자동으로 활용하는 수법이다.
참선의 요체는 이러한 자아 메카니즘을 벗어나서
자아의식, 자아의 생각, 감정, 감각을 객관화시켜서 대상으로 인식하여
그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인데,
관찰과 의심법을 쓰는 과정에 교묘하게 자아는 자신이 관찰과 의심의 주체가 된다.
마치 감시받아야 할 죄수가 교도관의 옷을 입고 죄수들을 감시하는 상황과 같다.
참선은 바로 지금의 생각, 감정, 감각, 기억 등 자아의 모든 의식 활동이 관찰되어지는 순간이어야 하는데, 관찰대상이 되어야 하는 자아의식이 참선하는 법을
<기억하는 짓>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자아가 여전히 주체로 남아서 기억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참선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냥 참선하는 법을 기억에서 찾아서 생각하거나
저번에 참선했을 때의 경험을 되 뇌이고 있는 것뿐이다.
이것을 구별해내기가 쉽지 않다.
구별하지 못하면 수 십 년을 수행해도 제자리걸음이다.
올바른 참선은 분별되지 않고 기억되지 않는다.
반복되지 않고 쌓이지도 않는다.
수 십 년을 매일 참선해도 참선은 매번 처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 십 년을 참선을 해도 한 가지도 마음에 얻는 바가 없는 것이다.
마음 비우기가 이렇게도 어렵나니... 소원이나 청원기도보다 그냥 감사의 기도로 오늘하루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마음부터 가지면 어떨까...
-모셔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