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단식 존엄사
자녀들에게 남긴 마지막 수업
저자의 어머니는 이미 중년이 넘은 나이에 소뇌실소증이라는 가족 유전병이 발병한 사실을 알게 된다
(외삼촌과 사촌들은 이 때문에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다.
부모 중 한 사람이 걸리면 그 자녀는 2분의 1의 확률로 걸리는 병이었기에
어머니는 삼남매 또한 무조건 검사받기를 원했고, 저자와 여동생은 검사 결과 유전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다만 남동생은 자식이 없을뿐더러 치료법이 없는 병이기에 굳이 검사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동안 이 병에 걸린 친척들의 불행한 말로를 목격해온 터라 어머니는 의사인 큰딸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부탁한다.
평소 꾸준히 요가를 해온 덕분에 발병 시기가 늦춰졌고
추가로 재활운동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건강한 어머니였지만
병이 진행되자 삶에의 의지를 잃고 하루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타이완에서 안락사 법안이 통과되는 일은 요원해 보였기에,
모녀는 자주적 단식을 통한 존엄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어머니는 이듬해 생일이 지나면 실행에 들어가겠다고 결심한다.
어머니는 곡기를 끊고 식사량을 점진적으로 줄여나갔다.
곡기를 끊는 단식 존엄사 방식은 의사 나카무라 진이치가
‘5곡 7일 끊기, 10곡 7일 끊기, 야생 식물과 과일 섭취 7일, 수분 7일 끊기’의 방식으로 구체화해 제시한 바 있다.
생선이나 고기는 먹지 않고 죽과 삶은 채소, 과일을 주식으로 했으며
허기를 덜 느끼고 사레들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오일과 연근물을 섭취했다.
단식 11일 후부터는 고형 음식을 모두 끊었고 이틀 뒤 연근물도 끊었다.
18일째부터 숙면하는 시간이 길어지더니
21일째 되는 날 어머니는 편안한 얼굴로 떠나셨다.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흔들림 없는 강인한 의지를 보였고, 가족들도 평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며
서로의 생각을 공유해왔기에 어머니의 결정을 존중해주었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흘러간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단식하는 과정에서 육체적인 괴로움을 호소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가족들은 가슴을 움켜쥐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남매에게 이 모든 과정은 어머니가 해주신 수업이기도 했다.
반세기 전에는 집에서 임종하는 사례가 흔했지만, 현재는 약 80퍼센트가 병원이나 요양 기관에서 사망한다.
나카무라 진이치는 임종 직전에 병원에 실려가 무의미한 치료를 받고, 심폐소생술까지 행하는
‘의료사’ 대신 집에서 자연사하는 것을 권장하며 그것이 다음 세대에게 남기는 마지막 유산이라고 했다.
달라이 라마는 죽음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래되고 낡고 찢어진 옷은 바꿔 입어야 하는 것처럼 육체도 망가지면 이와 같은 이치다.
죽음이란 이처럼 간단하며, 신비하거나 어두운 일이 아니다.”
또한 병원에서는 가족끼리 충분한 시간을 보내다가 작별 인사를 나누기 어려운 경우가 많지만
집에서 자연사하면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아 마음을 나눌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
실제로 저자의 가족은 생전장례식을 치르면서 어머니와 함께 그동안의 삶을 회고하며
어머니가 얼마나 훌륭한 분이고 열심히 살아오셨는지에 대해 존경과 감사를 나눈다.
이를 통해 떠나는 사람과 남겨지는 사람 모두 회한 없이 가족 간의 깊은 정을 느낄 수 있다.

단식존엄사 / 비류잉
이 책은 굳이 안 읽어도 된다, 제목이 이미 다 말해주고 있다.
단식존엄사, 단식으로 존엄하게 죽는 방법도 있다고 알려준다.
그 방법이 생각보다 고통스럽지 않고 자연스럽다.
옛날 오늘날과 같은 인위적인 기계장치로 연명하던 시대가 아닌 옛날에는
대부분 환자들의 마지막이 단식존엄사 아니었겠는가?
어릴적에 동네에서 어른들이 하던 얘기가 있다.
"00할머니 (할아버지)가 곡기를 끊었대요, 얼마 안 남았대요"
이런 얘기를 가끔 들었다.
인간은 존엄하다.
존엄함이 훼손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제 힘으로 먹지도 못하고 화장실도 못가는 순간이 아닐까?
화장실을 못가는 순간이라면 나는 단식으로 서서히 소멸하고 싶다.
그러니까 곡기를 끊고 싶다.
스콧니어링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서서히 단식으로 소멸하고 싶다.
의사인 딸이 어머니의 단식 존엄사를 도와드리는 내용의 책이다.
독극물을 처방하여 숨이 끊어지도록 하는 것보다 존엄하지 않은가?
모든 인간을 결국 죽는다. 죽는 일도 좀 가볍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너무 심각하지 말자.
모두가 죽는다는 게 정한 이치인데 어떻게 평화롭게 잘 죽을 수 있을지 고민해야 되지 않겠는가?
왜 전국의 병원마다 요양원마다 온갖 의료기기에 묶여서- 밧줄에 묶여있는 걸리버처럼 -
그렇게 꼼짝달싹 못하고 입도 벌린체 죽어가야 하는가.
스스로 어떤 결정도 행위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연명하고 있는 게 존엄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루 하루 끊임없는 고통으로 괴로움만 더한다면
인위적인 수액이나 영양공급으로 연명하는 게 환자 입장에서 뭐가 좋겠는가?
차라리 평온하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서서히 소멸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의사인 저자가 말하길, 단계적으로 음식 투여를 중단하면
보통 노쇠한 노인은 열흘이나 2주 정도면 눈을 감을 수 있다.
[출처] 단식존엄사 / 비류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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