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고전의 가치와 잡지 『문장』파 근대예술가들의 지향점
-월북 작가 정지용 시인의 활동상을 중심으로.
Ⅰ.서론
잡지『문장』의 위상은 한국문학사에서 매우 높다. 그 이유는 1940년대 초 일본 군국주의의 물결이 한반도의 파고를 넘어 아시아와 세계로 넘실거릴 때 풍전등화와도 같은 상황에서도 꺼져가는 한국적 촛불을 지키려고 매달렸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어 교육을 봉쇄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할 뿐 아니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마저도 폐간한 현실 속에서도 문장 편집자들은 최후까지 잡지간행을 시도 했었던 점은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시인 정지용은 이병기와 함께 詩분야와 고전분야를 각각 책임지고 있었다. 이병기가 일제에 맞서 우리글과 말을 고집하고 고전문화 유산을 수집하고 게재한 것은 『문장』의 토대에 민족주의담론과 전통성의 본질이 자리하고 있음을 세상에 각인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여기에 정지용이 자신의 한적시(산수시)를 다른 매체에는 발표하지 않고 문장을 통해서만 발표함으로써 잡지의 품위와 기품을 배어나가게 하는 데에도 큰 기운을 불러 넣어주었다.
이렇듯 정지용은 한국 시문단에 큰 자취를 남겼으나 민족상잔의 비극으로 말미암아 40여 년간 그의 작품을 대할 수 없었던 것은 한국문단의 큰 비극이었다. 본문에서는 문장지에서 추구했던 고전의 가치추구와『문장』파 근대예술가들의 지향점, 그리고 월북작가 정지용 시인의 활동상에 대해서 논하기로 한다.
Ⅱ본론
1.고전의 가치추구와 『문장』파 근대예술가들의 지향점
1.1. 고전의 가치추구
잡지 『문장』은 독특한 편집상의 특성과 미학적 취향 그리고 정신적인 지향성을 나타내고 있었다. 먼저 『문장』에는 주도적인 지도자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형식상으로는 이태준이 편집주간을 맡았다고 하나 사실상 편집은 정인택. 조풍연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당시 편집기자인 조풍연이 판매를 빼고는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문장』은 각 분야를 나누어 몇 사람이 편집을 주도했는데, 소설은 이태준, 시는 정지용, 시조와 고전 발굴소개는 이병기로 영역이 분명하게 나눠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세 사람에 『문장』지 장정과 표지화를 담당한 김용준을 포함시키면 문장파는 구색을 갖추게 된다.
문장파라는 말에 대해 최승호는 “소위 문장파의 주체세력은 무엇인가? 그들이 바로 이병기, 정지용, 이태준, 김용준 등이다. 이병기는 주지하다시피 바로 문장파의 정신적 지주였다. 문장파의 정신적 지향이 소위 선비문화였다면 그 선비의 한 전형이 이병기였던 것이다”라고 하여 ‘문장파’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사실 ‘문장파’라는 용어는 김윤식 교수가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문장파는 왜 상고주의 즉 고전에 탐닉했을까? 그들이 고전을 탐구한 이유에 대해 전위예술가 조우식이 『문장』에 쓴 「고전과 가치」와 이태준의 「고완품과 생활」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상실해가는 우리들의 예술유산을 두 가지 수단으로써 계승하자는 것이다. 하나는 동양예술의 동양화적 계승과 한 가지는 동양예술의 서양화적 계승이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물론 후자다. ... 나는 고전을 사랑한다. 사랑하기에 전위를 해왔다. 나는 우리들의 전통을 지키겠다. 그 수단이 어떠한 것이든 그러나 동양화적 계승의 수단은 취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골동품적인 존재는 되고 싶지 않으니까.
“고전이라거나 전통이란 것이 오직 보관되는 것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주검이요 무덤의 대명사일 것이다. 우리가 돈과 시간을 드려 자기의 서재를 묘지화 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청년층지식인들이 도자기를 수집하는 것은 고서적을 수집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완상이나 소장욕에 그치지 않고 미술품으로 공예품으로 정당한 현대적 해석을 발견해서 古物 그것이 주검의 먼지를 털고 새로운 미와 새로운 생명의 불사조가 되게 해주어야할 것이다. 거기에 정말 고완(古翫)의 생활화가 있는 줄 안다.”
1.2. 『문장』파 근대 예술가들의 지향점
잡지 『문장』의 편집진들이 추구한 지향점은 광포한 군국주의와 포악한 민족정신의 말살정책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적 정치색에 맞선 ‘전통주의적 정신주의’와 ‘문화적 민족주의’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과거로의 희귀나 퇴영으로 몰고 가지 않기 위하여 실학파의 ‘법고창신’과 ‘탁고개제(托古改制)’의 정신을 계승하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즉 자신들의 전통지향이 도피적인 안주와 문화적 퇴행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추진동력을 얻기 위한 전통의 본질과 의미를 찾는 이념운동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한편으로 난세극복의 혜안일 수도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민족문화사의 단절을 막아보려는 고육지책일 수도 있다.
『문장』의 전통주의적 입장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전의 발굴과 복원작업이었다. 『문장』은 순수 문예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전과 학술분야에 상당한 지면을 배정하였다. 한중록, 도강록. 호질. 인현왕후. 고시조선. 서대주전, 토별가. 요로원야화기 등이 이윤재. 양주동. 이병기 등에 의해 실렸다는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다. 그것은『문장』편집인들이 얼마나 고전문화 유산 발굴과 민족적 특성부각에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또, 잡지『문장』은 국학이라고 할 수 있는 고전문학과 국어학 그리고 고미술분야의 논문과 평론을 대대적으로 실었다. 창간호부터 이희승의 ‘조선문학연구초’. 양주동의 ‘근고동서기문선’. 김용준의 ‘이조시대의 인물화, 신윤복과 김홍도’. 조선어학회의 ‘외래어표기법’. ‘봉산 가면극 각본’, 조윤제의 ‘조선소설사 개요’. 정인승의 ‘고본훈민정음연구’. 최현배의 ‘한글의 비교연구’ 등을 게재하였다. 이렇듯 우리의 국학을 수용하고 고전적이고 전통지향적의 편집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2. 정지용 시인과 근대예술가
그러면 전통지향적 성향의『문장』을 통해 정지용은 어떠한 태도를 보였는가? 정지용의 세계관이나 정신적 지향성을 볼 수 있는 글로는 몇 편의 시론과 신인들을 추천하면서 쓴 「시선후」, 그리고 「문학의 제문제 좌담」에서의 발언 등이 있다. 창작에만 주력하고 시론을 거의 발표하지 않았던 정지용은『문장』을 통해서 비로소 시 비평을 내놓게 된 것이다. 정지용은 「시의 옹호」에서 전통 계승론에 비평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것은 상고주의와 전통지향의 성향을 보여온 『문장』의 편집인으로서 당연히 취해야 할 정신적 태도로 보여진다.. 그는 교양인의 자세를 강조하면서 시인은 꾀꼬리처럼 생명에서 튀어나오는 발성으로 노래를 불러야 진부하지 않고 자연의 이법에도 충실한 것이라고 하면서 우수한 전통이야말로 비약의 발 디딘 곳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정지용은 이렇게 말했다.
“고전적인 것을 진부로 속단하는 자는 별안간 뛰어드는 야만일 뿐이다. 꾀꼬리는 꾀꼬리소리밖에 발하지 못하나 항시 새롭다. 꾀꼬리가 熟練에서 운다는 것은 불명예이리라. 오직 생명에서 튀어나오는 항시 최초의 발성이야만 陳腐치 않는다.”
계속해서 정지용은 시학과 시론 그리고 예술론에 관심을 가지라고 시인과 시인지망생들에게 권유하고 있다. 특히 정지용은 무성한 甘藍(감람)한 포기가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는 태양. 공기. 토양. 雨露. 농부 등 자연과 인간의 헌신과 노력을 비유하면서 시인은 감성과 지성을 한데 어우르는 유기적 통일의 원리에 충실해야한다고 충고한다. 그리고 ‘감성. 지성. 체질. 교양, 지식들 중의 어느 한 가지에로 기울지 않는 통히 하나로 시에 對陣하는 시인은 우수하다’라고 평하면서 시인은 예술론 중에서도 동양화론과 서론에서 시의 방향을 찾아야 하며 ‘경서와 성전류를 심독하여 시의 원천에 침윤해야’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정지용은 1936년부터 1942년 무렵까지 그 이전의 모더니즘적 경향과 카토릭시즘의 서구적 시 경향에서 벗어나 동양적인 달관과 유유자적의 시 세계를 개척한다. 정지용은 시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라고 인식하면서도 “시는 언어의 구성이라기보다 더 정신적인 것의 열렬한 정황 혹은 왕일(旺溢)한 상태 혹은 황홀한 사기임으로 시인은 항상 정신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을 조준한다.”라고 주장하여 자신의 시적 인식태도로서 ‘정신주의’를 앞세우고 있다.
이러한 정지용의 시적인식태도는 완당 김정희의 서법과 조선 후기의 문인화 그리고 골동품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이태준, 이병기. 김용준 들과 같은 성향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특히 남종화풍의 문인화에서 시의 방향을 찾으라고 하는 것은 김용준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장』지 장정과 표지화를 담당한 김용준은 서양화를 집어치우고 동양화로 전향하면서 식민지적 현실과 화가의 생활고 때문에 관변측 유력자에 붙거나 민간의 유지들에게 아첨을 하는 예술가들의 치졸한 행태가 현대예술을 망치고 있다고 자탄하면서 “이러한 행위는 음부나 창녀의 한 짓이어든 양심있는 예술가들로서 어찌 묵과할 바이야”라고 분을 삭히지 못한다. 그래서 캔바스와 물감을 집어 던지고, 내공을 쌓기 위해 매달린 것이 벼루와 붓이었다.
이에 대해 『문장』편집을 주도했던 이태준은 “조선 미술이란 조선 문학에 대어 얼마나 풍부한 유산을 가졌는가? 그런 유산을 썩혀두고 멀리 천애의 에펠탑만 바라볼 필요야 굳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까 나는 서양화에서 동양화에로 轉筆로부터 조선화의 부흥을 위하는 맹렬한 운동이 일어나기를 어리석도록 바라는 자다” 라고 했다. 이러한 이태준의 글에서 그가 조선 미술의 전통을 문학적 전통보다 높이 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한편, 정지용과 김용준은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한 모습을 지닌 예술가다. 두 예술가 모두 똘레랑스 정신(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은 현대시를 쓰는 시인이라면, 김용준은 전위적이고 아나키즘적인 화풍을 자랑하던 화가라는 점이 근원적인 차이점이다. 그러나 이 예술가가 공유하는 ‘간택스트성’은 무엇인가? 당시 식민지적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고전의 전통에서 우리의 것을 찾아 상고주의에 젖었고, 남종화의 문인화풍을 즐기면서 깊은 내면의 정서에 침잠하는 ‘정신주의’에 골몰했다는 점. 두 예술가가 모두 ‘고요’와 절제미에 근거한 ‘여백의 미학’, 몰아일체의 ‘정경교융’의 동양적 시학 등을 예찬함으로써 광포한 식민지 현실에서 한발 빼고 소극적 저항의 포즈를 취하려고 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장』이라는 잡지의 편집동인이라는 연결고리는 이들의 거리감을 완전히 없애는 정서적인 유대감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3. 월북 작가 정지용 시인의 활동상
3.1. 남북문학사에서의 정지용
정지용 시인만큼 파란 만장한 시인도 드물다. 한동안 그는 남북 문학사에서 동시에 사라져 버리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산물이기도 했다. 남한에서는 그가 월북문인으로 오해되어 거론될 수 없었고 북한 문학사에서는 모더니즘 작가로 평가되어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남한에서의 정지용 시인에 대한 연구를 검토해 보면 해방이후 1950~60년대에 접어들어 김춘수와 송욱에 의해 정지용의 시는 다시 거론된다. 송욱은 정지용을 김기림과 함께 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피상적으로 언어를 다루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지용론에서 「향수」「바다2」「비」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향수」는 감각적 언어만이 있고 시의 깊이를 보장하는 내면성은 없다고 격하했고, 「바다2」는 시각적 인상을 단편적으로 적은 시라고 폄하했다.
1970년대 들어서는 김현은 한국문학사에서 정지용 시인을 ‘절제의 시인’이라고 명명하면서 식민지 후기의 운문작업에서 기록할만한 업적을 남긴 시인으로 시의 회화성에 집착하였다가 점차로 종교적인 무욕의 세계에 침잠하게 된 정지용과 자신의 내적 고뇌를 이상향에 대한 깨끗한 정열로 치환시킨 윤동주, 그리고 시조를 다시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이병기의 세 사람을 거론하였다. 김현에 의하면 정지용은 감정의 절제를 가능한 한도까지 본 한국 최초의 시인으로 평가하였다.
1980년대 들어서서 조동일은 『한국문학통사』에서 세련된 감각으로 시가 긴장되게 하는 수법을 개발하면서 음악이 아닌 회화에 근접하려한 점이 김영랑과 달랐다고 평가하였다.
「창」「바다」「고향」같은 대상에 관심을 집중시켜 시상을 응결시켜, 세 가지가 모두 형체가 모호해서 다루기 어려울 듯한데 색채감각을 뚜렷하게 묘사한 심상을 구현 했다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고향」을 노래할 때에는 어조가 무거워졌다고 하면서, ‘향수’라는 상투적인 제목을 붙인 작품을 길게 펼치면서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말을 다섯 번이나 되풀이 했다고 꼬집었다. 시「고향」에서의 고향은 현실이 아니고 관념이며 체험이 아니고 동경이어서 다루는 솜씨가 치졸해 졌다고 비판하였다. 1941년에 다시 낸 시집 「백록담」에 실린 작품도 사실은 잡다하기만 하다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해금된 이후 출판된 김학동의 「정지용연구」 또한 학계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이 책에서 지용의 전기적 생애에 대한 연구결과 뿐 아니라 지용의 문학 세계를 ‘근원회귀와 실향자의 비애’, ‘바다의 신비와 신성의 세계’ ‘산과 허정무위의 세계’ ‘삶의 좌절감과 자아성찰’의 네 단계로 구분하여 분석하였다.
유종호는 정지용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 문학포럼에서 발표한 「정지용의 당대 수용과 비판」에서 20세기 전반기의 우리 현대시에서 가장 읽을 만한 작품을 남긴 주요 시인으로 김소월. 한용운. 정지용의 세 명을 들면서 정지용을 시가 언어예술이라는 사실을 열렬히 자각했던 20세기 최초의 직업적 시인이라고 그 문학사적 위상을 평가했다.
그 외에도 정지용의 후기시에 대해 생태시학적 비평을 시도한 최동호의 ‘산수시’라는 장르명칭에 대해 오세영. 최승호 등의 ‘자연시’라는 주장과 박태상의 ‘한적시’라는 새로운 명칭 제시가 있어 학계의 흥미를 유발하였다.
한편 북한문학사에서도 정지용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남한에서는 정지용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북한 문학사에서의 정지용은 남한문학사에서의 감각적 시어를 활용하여 모더니즘의 세계를 개척한 공적과 산시편에서 나타나는 정신주의의 은일적 태도 등이 평가받고 있는 것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그 이유는 북한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문학관을 바탕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정지용은 해방 후 50여 년 동안 완전히 실종상태였다. 그런데 1994년부터 정지용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지용의 三男인 정구인이 쓴 통일신보 1995년6월17일자 기사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에게 환갑상을 보내면서 “정지용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창작활동을 한 애국시인의 한사람이었다고 분에 넘치는 평가도 해주시고...”라 했다고 정구인은 회상했다.
박산운은 북한 문학계에서 정지용이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에 대해서 “지용선생은 일제시기에 남긴 「향수」「고향」「말」. 그리고 「카페 푸랑스」「압천」기타 민족적 양심과 망국의 한이 서린 유명한 시편들과 함께 북의 동포들속에서 오늘도 같이 살고 있다. 북에서 발간된 현대조선문학선집의 1930년대 시인 선집에는 선생이 남긴 작품들이 김소월과 함께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북의 대학들에서는 선생의 시들과 문학적 업적이 강의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1990년대에 들어서서부터 정지용 문학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현상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1995년 김정일 시대를 대표하는 북한문학사인 15권으로 된 『조선문학사』 제9권에서 정지용은 화려하게 부활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 북한에서 간행되었던 어느 문학사에서도 정지용은 단 한 줄이라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3.2. 북한 문학사에서의 정지용 문학의 평가
지금까지 북한에서 펴낸 북한 문학사는 1956년부터 2000년까지 총9종류가 간행되었다. 그 중에서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문학사로는 흔히 세 종류를 거론한다.
첫째는 1959년 과학원 언어문학연구소에서 펴낸 『조선문학통사』가 있다. 이 책은 소위 마르크스-레닌주의 미학 이론에 바탕하여 쓰여진 문학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1920년대 문학에서 김소월을 대단히 큰 비중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김소월 시문학이 가지는 인민성, 애국성과 형상의 행동성, 시적언어의 음악적 풍부성 등으로 조선 인민의 해방투쟁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였으며, 조선 시문학 발전에 귀중한 재산을 기여하였다고 극찬하였다. 그리고 카프문학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문학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에 맞서 부르주아 반동문학이 극성을 부렸다고 하면서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현진건. 황석우. 오상순 등의 자연주의 문학은 이태준을 중심으로 한 ‘9인회’, 김광섭. 이헌구를 중심으로 한 ‘해외문학파’ 박영희. 림화. 김남천. 리원조. 최재서. 백철 등 반동문학가들에 의하여 자기의 유력한 후예들을 발견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정지용. 김기림. 백석. 이용악. 오장환 등의 모습이 발견되지 않는다.
둘째로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에서 펴낸 전5권으로 된 『조선문학사』가 있다. 이 책은 주체미학이론으로 쓰여진 최초의 문학사이다. 이 책에서는 특이하게 김일성 주석의 부친인 김형직의 혁명적 문학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1920년대 전반기의 시문학에서는 이상화, 류완희 등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1920년대 후반기부터 30년대의 시문학에서는 리찬, 류완희. 박아지. 김창술. 송순일. 권환. 박세영 등을 이 시기의 수작으로 제시하였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김소월, 정지용, 김기림, 백석, 이용악, 윤동주 등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박팔양의 그림자도 사라져 버렸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1993~1994년부터 북한의 문학사전과 문학사에서 커다란 변화의 물결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김정일이 사실상 북한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우선 1994년 북한에서는 『문예상식』이라는 문예사전과 문학사의 통합적 성격을 지니는 책이 출판된 것이 특징이다. 『문예상식』에서 최남선. 김소월. 한용운, 이상화. 윤동주 등 1960년대 이후 40년 동안 사라져 버렸던 시인들이 거론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하지만 정지용, 김기림. 백석 등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해방 후 문학예술’에서는 박팔양. 리찬. 이용악 등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즉 박팔양이 부활한 것이다.
하지만 1995년 『조선문학사』2 권 7에 오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한용운을 9쪽에 걸쳐 장황하게 다루면서 우리나라 시문학의 애국주의적 전통을 살리며 자유시의 영역을 다채롭게 하는데 특색 있는 기여를 하였다고 그 공적을 평가하였다. 한편 류만이 집필한 『문학사』2의 권9에서는 1920년대 후반기~1930년대 중엽 문학에서 김창술. 류완희. 권환, 박세영. 리찬. 안용만. 김우철. 송순일. 박아지. 리흡 등의 작가를 거론하면서 김동환과 정지용 그리고 조운, 이은상 등을 경향적이며 현실비판적인 독특한 시풍을 보여주었다거나, 민요적인 아름다운 시풍으로 1920년대 민족시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높은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특히 그동안 부르주아 반동문학으로 취급하여 북한문학사에서 거론조차 되지 않았던 정지용문학에 대한 대부활을 시도하였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정지용 문학은 총 4쪽에 걸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그렇다면 정지용 시인이 『북한문학사』와 『조선대백과사전』에서 부활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인덕정치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김일성주석이 생전에 “김정일 동지는 각계각층 군중을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당의 두리에 묶어 세우기 위하여 광폭정치를 실시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돌봐주고 있습니다.”라고 강조한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김정일은 과거 여러 이유로 숙청되었던 인물들에게 재생의 기회를 주어 자신의 새로운 정치에 동참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인 적이 있다. 예술분야에서 한설야와 박팔양의 90년대 부활이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된다. 그밖에 구소련 연방의 해체와 동구권의 변혁.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측근 테크노크라트들의 부상으로 나름대로의 자율성과 과학적 객관적인 학문적 성과를 실용성이라는 관점에서 정리할 수 있게 된 점. 남한에서의 학문적 성과를 반영하는 측면들에 힘입은 바가 크다.
3.2 정지용 시인의 마지막 행적에 대하여
해방 후 정지용시인은 좌우익의 갈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당시 문단은 조선문학가동맹과 전조선문필가협회로 양분되었는데 정지용은 임화가 주도한 조선 문학가동맹에 아동문학분과위원장이 되었으나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해방시단의 좌익이던 조선문학가동맹의 시부위원회에는 정지용의 이름은 빠져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 정지용은 좌익 경력인사들의 사상적 선도를 명분으로 결성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을 수 없었고, 1950년 1월에는 「소설가 이태준군 조국의 서울로 돌아오라」는 글도 썼다.
6.25직전 정지용은 국도신문의 청탁을 받아 남해를 여행하며 한려수도 기행문을 쓰고 있었다. 유족들에 의하면 정지용은 녹번리 초당에서 6.25를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해 7월에 평소 안면 있는 젊은이 몇 명이 찾아와 대화를 나누다가 그들과 함께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정지용 시인의 삶에서 남북한 간의 첨예한 대립을 보이는 것은 그의 마지막 행적에 대한 것이다. 남한에 살고 있는 장남 정구관은 부친의 해금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1985년 3월 육군범죄수사연구소에 제출한 민원 회신에 따르면 “노무자 또는 비군인 등으로 동원된 사실 없었음이 확인되었으나, 평양감옥에 부친과 같이 수용되었던 계광순 씨 등의 저서내용으로 보아 귀하의 부친께서는 북괴군에 납치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평양감옥으로 납북되어 수감 중 폭격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바입니다”라고 명기되었고, 이 서류가 근거가 되어 1988년에 정지용문학은 해금이 되었다.
하지만 북한측의 증언은 전혀 다르다. 우선 『조선대백과사전』은 정지용의 사망일을 1950년 9월25일로 명기하고 있다. 그 근거로는 시인 박산운의 증언을 제시할 수 있다. 북한 박산운 시인의 『통일신문』 기고 회고록(1993년 4월 24일부터 총 3회)은 한국전쟁 때인 9월 25일경 자진해서 월북하던 중 동두천의 소요산에서 미군의 폭격에 의해 사망했다고 시인 박산운은 석인해 교수의 목격담을 근거하여 사실인 것처럼 포장하여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정지용시인의 부활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정지용 시인의 사망을 조기천(북한종군작가)식으로 미화시키려는 북한 특유의 고도의 정치적 전략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즉 이러한 현상은 북한 당국이 그동안 정지용 시인을 기교에만 치중하는 부르주아 반동작가라고 매도했다가 갑자기 애국시인으로 긍정적인 평가로 돌아서야 하는 부담감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Ⅲ, 맺는 말
이상으로 고전의 가치와 잡지 『문장』파 근대예술가들의 지향점, 그리고 정지용 시인의 활동상 등을 살펴보았다. 1930년대 암울한 일제치하에서 당시 문인들이 『문장』 잡지의 간행에 힘썼다는 것은 조선인의 주체적 긍지 면세서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1939년 2월에 창간된 『문장』에 이태준과 이병기 그리고 정지용이 각각 소설과 시조. 시의 추천을 담당하는 등 사실상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음은 전술한 바 있다. 해방 후 동족상잔의 6.25를 겪으면서 파란 만장한 시인 정지용은 사망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마지막 행적의 모호함으로 인해 한동안 그는 남한에도 북한에서도 그의 작품은 발붙일 곳이 없었다. 전쟁 후 40여년 만에 남과 북에서 그는 시인으로서, 또 작품으로서의 모든 것이 활발하게 읽혀지고 연구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의 깊이에서도 다른 어떤 시인보다도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순수 서정의 시세계를 보여주기도 하고 서구적 모더니즘의 세계로도 나아갔으며 다시 전통주의적인 정신주의에 몰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 시인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은 우리민족에게 커다란 자산이며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Ⅳ.참고문헌
박태상. 정지용의 삶과 문학. 깊은샘.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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