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 중 민담 2편을 선택하고 각 민담이 갖는 의미에 관하여
Ⅰ.들어가며
민담(民譚)이란 무엇인가?
신화·전설·동화 등을 총괄하여 이르는 말로 구술(口述:口碑, 口傳)문학 또는 민속문학이라고 불리고 있는 작품들 가운데서 산문 서사문학(散文敍事文學)의 테두리에 드는 것을 통틀어 ‘민담’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국내 학계에서 더러는 설화(說話)라는 말로 바꾸어 부르기도 한다. 민담은 민속문학이다. 민담은 언제 누가 지었는지도 모르게 그저 옛날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진 옛이야기이고, 동시에 들은 그대로를 남들에게 전해 주는 옛이야기이다. 지역성과 시대성, 그리고 전하는 사람의 개성이나 생활사 등에 의해서 변화를 일으키면서 민담은 전해져 가되, 그 변화의 밑에 변화하지 않는 불변의 보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민담의 전승은 신화나 전설과는 다른 점이 있다. 신화는 신성한 것이기에 신성성을 인정하는 민족에 속하는 사람으로서는 전승이 일종의 의무이기도하다. 전설의 전승은 증거물과 결부되어 있다. 증거물을 늘 대하는 사람들은 자연히 이것들과 관계시켜 전설을 전승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민담에서는 신성성도 없고, 전승의 이유는 오직 이야기 자체의 흥미와 의미일 따름이다.
Ⅱ.본론
여러 민담 중에서 「해님 달님」의 이야기와 「달래 고개」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을 민담을 분석해 본다.
1. 「해님 달님」
옛날 한 집안에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그리고 어린애 다섯 식구가 살았다. 어느 날 어머니는 산 너머 마을로 길쌈을 하러 갔다. 날이 저물었는데도 어머니는 오시질 않아 아이들은 문을 걸어 닫고 엄마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길쌈을 하러 간 마을은 열두 고개를 넘어가야 했다. 길쌈을 다하고 그 삯으로 떡을 받아서 머리에 이고 오는데 한 고개를 올라가니까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서 “할멈, 할멈. 그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그래서 떡을 한 개 집어주고 또 한 고개를 올라가니까 또 호랑이가 “할멈, 할멈. 그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그래서 또 한 개를 집어주고 또 한 고개를 넘어가나니까 또 호랑이가 나와서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그래서 이제 떡이 한 개밖에 남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올라가니까 호랑이가 또 나와서 그것을 주고 다시 고개를 올라가니까 호랑이가 “할멈, 팔 하나를 떼어주면 안 잡아먹지.”그래서 팔을 하나 떼어주고 또 한 고개를 올라가니 호랑이가 나와 팔 하나를 또 떼어 줬다. 또 한 고개를 올라가니 호랑이가 나와서 다리 하나를 떼어주고 또 한 고개를 넘어가니 호랑이가 나와서 나머지 다리를 마저 떼어 주었다.
그래서 다음의 고개에 있던 호랑이는 이 할머니를 잡아먹고, 그 옷을 갈아입고, 그 할머니네 집으로 갔다. “얘들아, 얘들아. 문 열어 다오.”하니까 애들이 나와 “우리 엄마 목소리가 아닌데?” 그러니까 호랑이는 “고개 너머 갔다가 감기가 들어서 그렇다.”고 했다. 애들이 “그럼 손을 내밀어 보세요.”해서 호랑이가 손을 내밀어 보였다. 애들이 그것을 보고“털이 있는 것을 보니 우리 어머니 손이 아닌데.” 그런데도 이 호랑이는 길쌈을 해서 그러니 어서 문을 열라고 했다. 애들이 문을 열어 주었다. 호랑이는 방에 들어와서 어린애를 안고 어린 애 손을 오도독 오도독 깨물어 먹으니, 딴 애들이 그 소리를 듣고 “엄마 무엇을 먹우?”하고 물었다. “뒷집에서 콩볶음 준 것 먹는다.”고 했다. 이 애들은 그때야 자기 어머니가 아닌 줄 알고 무서웠다.
계집애가 꾀를 냈다. “엄마 똥 마려.” “요강에 누렴.” “아버지가 들어오셔서 꾸중하시게.” “그럼 마루에 나가 누렴.” “아버지가 들어오시다 밟으세요.” “그럼 이 새끼를 매고 마당에 나가 누렴.” 그래서 결국 새끼줄을 몸에다 동여매고 한 끝을 호랑이한테 주어 아들과 딸은 마당에 나와 똥을 누는 것처럼 하다가 도망쳤다. 새끼줄을 절구통에 붙들어 매놓고 빠져 나가 우물가에 있는 버드나무 위로 올라갔다. 호랑이는 기다리다가 새끼줄을 잡아당겨 보니 끌리지가 않았다. 이상해서 나와 보니 어린애들은 간 곳 없고 새끼 끝은 절구통에 매어 있었다. 호랑이는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다가 우물가 까지 갔다.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그 속에 애들이 있다. 이것을 보고 호랑이는 그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것을 본 아이들이 깔깔대고 웃었다. 호랑이가 웃음소리에 나무 꼭대기를 쳐다보니 그 위에 애들이 올라가 있었다.
호랑이는 나무 위로 올라가려고 애를 썼으나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 “애들아, 너희들 어떻게 올라갔니?” 애들은 “뒷집에 가서 참기름을 얻어다 바르고 올라왔지.” 하고 대답하니 호랑이는 뒷집에 가서 참기름을 얻어다 바르고 올라가려 하니 미끄러워서 도무지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 또 애들에게 “어떻게 올라갔니?”하고 물었다. “뒷집에 가서 도끼를 얻어다 찍으면서 올라왔지.”했다. 그래 호랑이는 도끼를 얻어다 찍으면서 나무 위까지 거의 다 올라갔다. 아이들은 무서워서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 저희들을 살려 주시려거든 새 동아줄을 내려 주시고, 저희들을 죽이시려거든 썩을 동아줄을 내려주십시오.” 했더니 새 동아줄이 내려와서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호랑이도 “하나님. 하나님. 나를 살려주시려거든 새 동아줄을 내려 주시고, 나를 죽이시려거든 썩은 동아줄을 내려 주십시오.”하니 새 동아줄 같은 것이 내려와서 좋다구나 하고 타고 올라갔다. 그런데 이 동아줄은 썩은 헌 동아줄이기 때문에 반쯤 올라가다가 동아줄이 끊어져서 수수밭에 떨어져 죽었다. 그래서 수숫대에 피가 묻어 빨개졌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하늘에 올라가서 처음엔 남자 아이는 해가 되고 여자 애는 달이 됐다. 그런데 여자애는 밤에 다니기가 무섭다고 해서 서로 바꿔 여자는 해가 되고 남자는 달이 됐다고 한다.
1.1. 類話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있는 이야기로서 지방에 따라 더러 차이가 있다. 다른 지방의 결말부문에서는 하나님의 명으로 “여기는 놀고먹지는 못하는 곳이다. 오빠는 해가 되고 누이는 달이 되거라.” 라는 부분이 빠져있고, 여자애가 낮에 다니려하니 여러 사람들이 쳐다보아 부끄러우므로 강렬한 빛을 내어 보는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태양을 바로 쳐다볼 수 없다고 한다. 라는 결말 부분이 빠져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설화에서 ‘어머니와 여러 아이’의 등장을 명시하고 있는데, 유독 아버지의 존재는 별로 큰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아이들이 도망 갈 때 아버지를 핑계를 대어서 도망가는 구실을 찾기만 할뿐 아버지가 전혀 그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 없을 정도로 미약하다. 이런 이야기는 본래 ‘母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인데 뒤에 어떤 話者가 ‘아버지’를 넣어 거기 따라 이야기의 구조를 약간 바꾼 것이다.
1.2. 사건의 전개
1)어느 유형에서나 사건의 전개는 어머니가 아이들을 두고 밖에 나감으로써 시작된다. 이 설화에서도 세 아이를 거느리고 사는 어머니의 가난을 좀 더 의식적으로 강조함으로써 모자간의 애틋한 정과 이들이 처한 가엾은 상황을 처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가난한 어머니가 아이들을 두고 품팔이를 갔다가 떡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산 고개에서 호랑이를 만나 떡도 四肢도 모두 다 빼앗기고 무참하게 죽는데, 그 표현이 ‘죽었다’로 되어 있지 않고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죽음의 고통은 표현되어 있지 않고, 가령 어머니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조금도 아프다는 말없이 한 팔을 떼어 호랑이에게 준다. 이러한 표현 수법은 사실 설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설화 속에서 ‘죽음’이란 마치 원시인들이 ‘죽음’에 관해서 가지고 있는 관념처럼 가변적이며 유동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의 ‘꿈’속에서 사람들이 몇 번씩 살았다 죽었다 할 수 있듯이 설화속의 ‘죽음’도 합리적으로 머리가 굳어진 현대인들이 생각하듯 절대적인 인생의 종말은 아니다. 이 설화에서 나오는 어머니의 죽음 혹은 겁탈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어머니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고 호랑이가 어머니의 모습으로 꾸며 아이들의 집으로 간다는 이 설화의 과정은 상징적으로 보면 어머니의 구체적인 ‘죽음’이라기보다는 어머니가 호랑이로 변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잡아먹는다.’는 것은 보통 同化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2)호랑이의 의미
호랑이는 한국 사람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동물이다. 호랑이는 사람을 잡아먹는 짐승이다. 소를 몰고 산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나자, 소의 주인은 그만 무서워 소를 그냥 놓아둔 채 줄행랑을 쳤다. 소가 호랑이를 물리치고 집으로 와서는 자기를 내 팽개치고 도망간 주인을 들이 받아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산길에서 호랑이를 만나자 소 주인은 얼른 소의 가랑이 밑으로 들어가 소의 부랄을 감싸니, 소가 힘을 얻어 호랑이를 뿔로 박아 죽였다. 호랑이가 소를 공격할 때 제일 먼저 소의 급소를 물어뜯는다는 것을 주인은 알았던 것이다. 소는 호랑이를 죽임으로서 주인의 은혜에 보답했다는 이야기다. 호랑이에 대한 민담을 몇 가지 더 소개해본다.
「호랑이와 곶감」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호랑이가 어린아이를 잡아먹으려고 어느 집안으로 들어갔다. 창문 아래 숨어서 방안을 엿보고 있으려니 마침 방안에서 어린 아이가 심히 울고 있었다. 아이 어머니는 “애비. 호랑이 온다.” 하고 말했으나 아이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호랑이는 이 말에 깜짝 놀랐다. 아이 어머니가 호랑이 온 것을 알고 말하는 것 같았다. 호랑이는 숨을 죽이고 창밑에 쭈그리고 있었다. 아이 어머니는 “옜다. 곶감이다.”하니 아이의 울음소리는 뚝 그쳤다. 호랑이는 아이가 호랑이가 왔다고 해도 울음을 그치지 않더니 곶감이라고 하니 그치는 것으로 보아 아마 호랑이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나보다 싶어 방안에 있는 아이를 잡아먹을 것을 단념했다.
호랑이의 보은에 대한 이야기다. 옛날 한 촌 양반이 산길을 가는데 큰 바위 뒤에서 호랑이가 노루를 잡아다 놓고 뜯어 먹다 말고 입을 벌려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촌 양반은 호랑이 우는 소리가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아 두려움도 없이 떡 벌린 호랑이 입안을 들여다보니 뼈다귀가 목구멍에 걸려 있었다. 그래서 촌 양반은 팔을 걷어붙이고 호랑이 입안에 쑥 집어넣어서 그 뼈다귀를 빼냈다. 호랑이는 비명을 멈추고 반가운 듯이 꼬리를 흔들었다. 호랑이는 촌 양반의 가랑이 사이로 들어갔다. 촌 양반을 등에 실은 호랑이는 그야말로 비호처럼 달려 순식간에 서울 남대문 앞에 내려다 놓고 저는 인왕산 쪽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며칠을 걸려서 걸어야 할 서울 길을 촌 양반은 힘 안들이고 쉽게 올 수가 있었다고 한다. 산짐승일지라도 제 목숨을 건져준 은혜는 안다는 것이며 못된 사람보다 낫단다.
이렇듯 호랑이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의 이중감성은 좋으면서도 싫고 무서우면서도 우러러보는 따위의 두 가지 틀리는 감정이 동시에 한 대상에게 향하게 되는 짐승이었다. 민담에서 호랑이가 다 어리석게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설화에서와 마찬가지로 호랑이는 무서운 존재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다만 무서운 면뿐 아니라 그 약점도 묘사함으로써 그 성격의 일방성를 해체하고 그것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궁리하는 과정에서 마음속의 어떤 문제의 성격과 처리과정을 역어 가고 있는 것이다.
3)대결과 구원
어린아이의 본능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며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까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위 설화에 나오는 어린이들도 어머니를 가장하고 문을 두드리는 존재가 뭔가 진짜 어머니와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한다. 아이들은 ‘엄마 목소리’가 아니라고 하고 ‘손’이 엄마 손과 다르다고 한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의혹을 일으키기는 하였으나 그 의혹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호랑이의 거짓말에 쉽사리 속고 만다.
그러나 아이들은 집요하게 호랑이의 실체를 추구한다. 지금 먹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호랑이는 한 번 속였다가 결국 먹던 아기의 손가락을 내줌으로써 자기의 실체를 노출하고 만다. 재미있는 것은 설화에 나오는 악한 괴물들은 자기의 비밀을 우연한 동작이나 언동 등으로 누설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비밀을 알아차린 사람들로 하여금 싸우거나 도망가거나 하는 결정적인 행동을 시킨다. 호랑이가 틀림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자 아이들은 그 때부터 꾀를 쓰기 시작한다. 호랑이는 끝까지 아이를 잡아먹으려는 음흉한 속셈을 숨기며, 아이들도 겉으로는 호랑이를 어머니 같이 대하면서 끝까지 그 흉계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아이들은 나무 위에 피신한다. 구원의 장소로서 나무는 흔히 설화 속에 등장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나무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으므로 순차적인 공간 상승을 가능하게 한다. 나무위의 아이들은 일단 난을 피하지만 밀고자와 같은 우물이 있어 그들은 호랑이에게 들키고 만다. 여기서부터 호랑이의 어리석고 융통성 없는 인식능력이 점차 뚜렷하게 드러난다. 우물에 비친 아이들을 보고 바로 뛰어 들어가려고 할 만큼 그 비추어진 그림자를 그대로 믿어 버리는 호랑이의 순진성은 아이들의 판단 능력보다 훨씬 유치하다.
무시무시한 악이 입을 벌리고 다가올 때 아이들이 어디다가 빌 것인가. 어린아이들이 무시무시한 호랑이와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싸우다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있을진대 하늘에 빌어 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이러한 채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어린 마음 상태에서 가지고 있는 어떤 종교적 행위를 통해서 온누리를 비치는 ‘해’와 ‘달’이 된다.
2. 「달래 고개」
옛날 조실부모한 남매가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마음씨 착하고 의좋기로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누구나 칭찬하는 처지였다. 부모가 없는 탓으로 과년하도록 혼인을 하지 못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두 남매는 재 너머 밭으로 일을 하러 갔다.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나서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오는 길인데 고갯마루에서 소나기를 만났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여서 피할 인가도 없어 두 남매는 큰 나무 밑에서 서 있었으나 심한 비 때문에 옷이 흠씬 젖도록 비를 맞고 말았다. 비에 젖은 두 남매의 꼴은 가관이었다. 여름 모시옷을 입었는데 비에 젖은 옷이 살에 착 달라붙었다. 알몸이 다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다. 오라버니는 누이동생에게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여태껏 느끼지 못한 복잡한 감정이 솟아 올라왔다. 비에 젖은 살결과 머리카락이며 연적처럼 둥글게 솟은 젖 몽울을 보니 참을 수 없이 흥분되었다. 그러나 오라버니는 마음을 억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비가 개었다. 오라버니는 누이에게 빨리 앞서 가라고 했다. 누이는 제 살결이 들여다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앞서 길을 재촉했다. 누이는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점심을 다 지어 놓아도 오라버니가 오지 않았다. 누이는 수상히 여겨 비를 피했던 고갯마루로 가보았더니 나무 밑에 오라버니가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었다. 오라버니는 누이를 앞세워 보내 놓고, 육친에게서 춘정을 느끼고 흥분했던 것이 부끄럽고 죄스러워 돌을 주워 다가 자기 생식기를 찍어 자살했던 것이다. 이 꼴을 본 누이는 “죽지 말고 차라리 달래나 보지.”하며 울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론 마을 사람들은 이 고개를 ‘달래 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2.1. 類話
이와 같은 이야기는 민담으로 전할 뿐 아니라 전설이 되어 전국 여러 곳에 전파되어 있다. 즉 ‘달래 고개’ ‘달래 강’ ‘달래 꽃’ 등은 모두 같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야기가 이처럼 비극적으로 끝나지 않고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남매의 혼인」이라는 이야기다.
옛날 어느 해 석 달 열흘 동안 비가 내려 큰 장마가 들었다. 몇 달이 지난 뒤에 물이 모두 빠져서 남매는 마을로 내려왔으나 살아남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니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남매는 집도 새로 짓고 농사도 시작했다. 그러나 남매는 난처한 문제에 봉착했다. 남매인 까닭에 결혼을 할 수도 없고 자식이 없으니 적적할 뿐 아니라 일손도 모자라서, 이렇게 살다가는 인종이 끊어질 염려가 겹쳤다. 남매는 맷돌을 가지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산꼭대기에서 두 손을 모아 하느님께 빌었다. “우리는 남매이니 서로 혼인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인종을 끊어지게 할 수 없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하면서 오라버니는 수맷돌을 동쪽으로 굴리고, 누이동생은 암맷돌을 서쪽으로 굴려 내려 보내고 두 사람은 산을 내려 왔다. 산을 내려와 보니 이상하게도 동서의 정 반대쪽으로 굴렸던 맷돌이 공교롭게도 포개어 있었다. 남매는 ‘이것은 분명 두 사람이 결혼을 해도 좋다는 하늘의 뜻’이라고 해석하고 혼인을 했다. 두 사람의 혼인은 인류의 멸종을 면했으며, 오늘날의 사람들은 모두 그 남매의 후예들이라고 한다.
2.2.사건의 전개
두 남매간의 이야기인 것에서는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첫 번째 예와 두 번째 예의 구성방식에서는 천양지차가 난다. 누이에게 욕정을 품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 자살한 오라버니와, 세상에 남매 둘 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자손의 번영을 위해서는 사소하다고 할 오빠와 누이간의 인륜을 대승적 차원에서 저버린 경우와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어느 경우가 옳고 그르고를 판단할 수도 없다. 옛 사회가 전통적 유교사회였다고 가정할 경우, 또는 단순 원시 사회이었을 경우에 따라 판단의 기준은 달라진다.
프로이트는 정신의 구조를 原初我(id), 자아(ego), 超自我(superego)의 세 가지 개념으로 정리했다. 원초아는 인간의 생물학적 토대에 기초하고 있으며 모든 욕구의 에너지 근원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면 음식에 대한 욕구, 성적욕구. 공격적 욕구 등이 원초아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원초아는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에너지를 방출시켜 긴장을 감소시키고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쾌락의 원리라고 했다.
초자아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의 도덕이나 윤리규범을 의미한다. 초자아는 현실적인 조건들과 효율적으로 타협하고 조절하는 것보다는 절대기준을 가진 도덕성에 더 비중을 두기 때문에 초자아가 강한 사람은 흑백논리식 판단이나 완벽함을 추구한다.
자아는 원초아의 쾌락추구, 초자아의 완벽추구와는 달리 현실을 추구한다. 즉 자아의 기능은 초자아의 요구에 맞추어서 원초아의 욕구를 만족시키거나 표현하려고 한다. 이러한 자아의 기능방식을 현실 원리(reality principle)라 한다.
이 이론을 대입해 볼 때, 「달래 고개」 이야기는 누이에게 욕정을 품을 것을 부끄럽게 여겨 자살한 오라버니는 초자아가 강한 경우다. 절대기준을 가진 도덕성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 죽어 마땅하다는 결론을 얻었기에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러나 두 번째 「남매의 혼인」이야기의 남매는 자아의 현실적 원리에 따라 자손을 번성시키자는 쪽을 택했다. 물론 여기에는 산에 올라가 맷돌을 굴려 神意를 물어보는 단계가 덧붙여지기는 했다. 신의를 얻은 남매가 혼인을 하여 그의 자손이 지금 현실의 우리라고 결론을 지었다. 이들 이야기를 가지고 선악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단지 불행한 결말이냐 행복한 결말이라는 두 가지로 범주화 할 수 있을 뿐이다.
2.3. 양상과 그 의미
「달래고개」는 모두 4개의 국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국면에서는 오라버니와 누이동생, 또는 이들과 세상에 대한 대립은 없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적이고 행복하기까지 하다. 제2국면 3국면에서는 자연이 인간을 시험하는 듯하다. 비를 뿌려 온몸을 적셔 옷이 몸에 착 달라붙게 함으로써 누이동생을 육친이 아닌 여인으로 보게 만들었다. 하늘에서 내린 소나기로 인해 누이동생을 일순 여인으로 느끼게 만든다. 소낙비가 오라버니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사내로서의 욕정을 일깨운 것이다.
제4국면은 ‘도덕성’이라는 사회적 굴레가 비극을 초래한다. 1에서 3국면 까지는 일응 그럴 수 있는, 있을 수 있는 전개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성을 회복한 오라버니의 생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일순간이나마 누이동생에게 욕정을 품었던 자신을 한없이 원망하며 결국은 자신의 생식기를 돌로 찍는다. 자신의 눈이나 머리를 돌에 부딪치지 않고 생식기를 돌로 찍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눈으로 보아 머리에서 느낀 것이니 당연히 눈이나 머리를 害하여야 할 터인데 다만 말초에 있는 생식기를 해한 것은 견지하고 있던 도덕성이 밖으로 불경스레 표현된 것에 대한 화풀이이자 자기연민일 뿐이다.
Ⅲ.결어
이상과 같이「해님 달님」에 대한 이야기와 「달래 고개」에 대한 이야기를 검토하였다. 민담이 다만 우스갯소리이거나, 나와 같은 사람들이거나 나보다는 조금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이야기속의 의미는 어느 정도의 교훈적인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이야기를 통해서 어린아이들은 선악 또는 그른 것과 옳은 것을 배울 수 있고, 어른들은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해야 할 일과, 하면 안 되는 일들을 배울 수 있다. 이런 것들이 문학이 갖는 효용성이며 민담이 갖는 이의라 생각된다.
Ⅳ. 참고문헌
1.한국의 민담. 서문문고 031. 임동권 지음. 서문당 1972.7.
2.한국 민담의 심층분석. 이부영 저. 집문당1995.11.20.
3.인간과 교육. 조화태 외. knou press. 2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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