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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의 시대구분 방법과 각 시기의 언어적 특징에 대하여

甘冥堂 2014. 5. 30. 06:04

 

국어사의 시대구분 방법과 각 시기의 언어적 특징에 대하여

 

.서론

국어의 역사를 연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 민족의 역사 전체에서 볼 때 우리는 오랜 역사를 통하여 국어로 서로 의사를 소통하면서 하루하루의 생활을 영위하였고 국어로 사색하고 고민하였다. 따라서 국어사는 우리 민족 역사의 일부로서 우리 민족의 정신적 물질적 생활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둘째. 국어사 연구는 국어로 쓰인 고전 문학 작품들을 올바로 읽게 하는 길잡이가 된다. 15세기의 국어를 연구하지 않고는 龍飛御天歌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셋째. 국어의 역사에 관한 지식은 오늘날 우리들이 날마다 사용하고 있는 현대국어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현대국어는 옛 국어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국어사의 연구방법에는 어떠한 방법이 있나?

먼저 문헌 자료에 의존하는 것이다. 모든 역사가 다 그렇지만 특히 언어는 문자로 기록되어 보존되므로, 언어사의 연구는 무엇보다도 먼저 문헌 자료에 의존하게 된다. 다음으로 언어의 변화에 대한 연구이다. 언어의 변화는 음운, 문법, 어휘 등 언어 체계전반에 걸쳐서 일어난다. 음운 변화는 어떤 일정한 시기에 동일 환경 속에 있는 어떤 음의 변화는 동일하게 일어나는 강한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 규칙성은 언어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작업 원칙이 되어 왔다.

세번째로 언어사에 있어서 그 外史內史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외사는 그 언어 사용자들의 거주지 또는 이주에 대해서, 다른 언어 사용자들과의 접촉이라든가 사회적 문화적 환경의 변동이라든가, 하여튼 그 언어에 어느 형태로나 영향을 미친 모든 사실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며, 내사는 그 언어의 구조 자체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실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다.

네 번째로 문법체계의 변화도 연구의 대상이다. 어떤 문법 범주가 없어지거나 새로이 생기거나, 또는 문법범주는 그냥 있으면서 그것을 나타내는 형태가 바뀌는 등의 변화가 있다.

마지막으로 언어체계 중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입는 것이 어휘다. 어휘의 변화에는 예전에 쓰이던 단어가 소멸되거나 (: 중세국어의 고유어 수사 ()’, ‘즈믄()’등이 현대국어로 오면서 사라졌다). 새로운 단어가 생성(: 네티즌, 댓글. 훈남, 얼짱)되거나, 단어의 의미가 변화(: 중세국어의 가엽다의 의미를 가진 어엿브다가 후에 예쁘다의 의미로 변함)된 것이 좋은 예다.

 

.본론

1. 국어의 계통

오늘날 우리가 말하고 있는 국어의 조상은 어떤 언어였나. 그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언어들 즉 국어와 친족관계에 있는 언어들은 어떤 것들인가. 국어는 언제부터 이 땅에서 말해지게 되었는가.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가 의존하는 것이 비교방법이다. 이 방법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언어들의 친족관계를 수립해주는 것이다. 즉 이 언어들이 아득한 옛날의 어떤 한 언어(공통조어)에서 분화되어 서로 다르게 변화한 결과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더 나아가 비교 방법은 그 공통조어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再構케하며 그로부터의 각 언어의 발달 과정을 밝혀 주기도 한다.

친족관계에 있는 언어들을 동일계통의 언어라고 하며, 同系의 언어들은 語族을 형성한다. 세계의 언어들을 어족으로 묶는 것을 계통적 분류라고 한다.

계통적 분류의 예로는 인도 유럽어족, 세미트어족, 하미트어족, 우랄어족. 알타이어족, 아시아제어, 말레이 폴리네시아 語族 등으로 분류한다.

 

그렇다면 국어의 계통은 어떠한가?

19세기와 20세기의 교체기에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우리 국어는 우랄 알타이 계통설(->알타이 계통설)과 일본어와의 동계설이 유력하다고 하였다.

알타이어족으로 분류되는 여러 언어들을 알타이 제어라 부르며, 크게 터키 어군, 몽골어군, 퉁구스 어군의 세 어군으로 나눈다.

 

알타이 제어의 공통 특질은 이들 언어 사이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모음조화 특히 전설모음과 후설모음이 대립하는 조화가 있다는 것과 두음법칙 그리고 모음교체나 자음 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음운론적 특징과, 모든 단어의 파생과 굴절은 접미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교착성이 있으나, 관계 대명사와 접속사가 없다는 문법적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어와 알타이 제어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특징만으로는 친족관계를 결정적으로 증명할 수 없고, 친족관계의 증명은 우연이나 차용의 결과로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을 배제하고 資材的 세부의 일치를 발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국어와 알타이 제어를 비교할 경우 음운의 비교, 문법의 비교 및 어휘를 비교해 보았을 때, 국어의 계통적 위치는 이러한 비교방법을 적용하기에 불리한 점이 있는바, 각 어군의 고대자료가 적고, 각 어군에 속하는 언어들 사이에 차이가 적고, 많은 언어가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소멸해버렸기 때문이다.

 

국어를 알타이 어족의 일원으로 보고 그 속에서의 위치에 대한 가설을 세운 사람은 람스테드(G.J.Ramstedt)와 포페(N.Poppe). 여기에서 포페의 가설은 다름과 같다.

한국어는 알타이어의 요소가 존재한다.

한국어의 言語材는 퉁구스제어와 제일 가깝다.

퉁그스제어는 음운론 적으로 터키제어보다 몽골제어에 가깝다.

한국어가 알타이 조어에서 맨 먼저 분리되어 나갔다.

한국어가 분리된 후에도 터키. 몽골. 퉁구스제어 단일시대는 꽤오래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 다음 오늘의 터키 제어의 조상이 분리된 뒤에도 몽골. 퉁구스 제어 단일시대가 어느 기간 존속했을 것이며 최후로 원시 몽골어와 원시 퉁구스어가 분리되었을 것이다.

이로 보건데 우리 국어의 아득한 조상이 알타이 조어와 자매관계에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2. 국어의 형성

오늘날 우리 민족은 단일 언어를 말하고 있다. 특히 중국 문화의 영향속에서도 고유한 언어를 이어온 것은 일찍부터 우리 민족이 높은 문화적 역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아득한 옛날에는 오늘의 한반도와 만주에 걸친 넓은 지역에 여러 언어들이 널려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불행히도 이들은 모두 소멸해 버리고 말았다. 다만 옛 사서에 토막기록들이 더러 전하여 이 언어들의 모습을 어렴풋이 엿볼 수 있을 뿐이다.

 

2.1. 고조선의 언어

고조선에 관해서는 檀君’ ‘王儉阿斯達에 도읍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일컬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고구려나 신라의 언어들에 비추어 볼 때 은 신라어의 ()’과 비숫하고 은 고구려어의 ()’과 비슷한 점이 눈길을 끈다.

 

2.2. 부여계 제어

서력 기원을 전후한 시기의 한반도와 만주의 언어 상태에 대해서는 중국에서 편찬된 三國志(289)魏志 東夷傳에 적힌 기록을 통해 그 한 자락을 볼 수 있다. 이 책은 고구려에 대해 東夷舊語 以爲夫餘別種 言語諸事 多與夫餘同 其性氣衣服有異.(동이의 옛말에 부여의 별종이라 한다. 언어와 여러가지 일이 많이 부여와 같다. 그 성품과 기질과 의복에는 다름이 있다.)라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부여, 고구려, 옥저. 예의 언어는 서로 매우 비슷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부여계 중에서 고구려라는 강대한 국가가 있어 부여어, 옥저어, 예어 등은 거의 아무런 자료를 남기지 않고 고구려어 속에 흡수된 것으로 생각된다.

 

2.3. 한계 제어

삼한 즉 마한지역의 백제, 진한지역의 신라, 변한 지역의 가야가 일어났다. 이들은 한반도 남쪽에 치우쳐 있으면서 여러 소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진한어의 단어라 하여 몇 예를 들고 있다.

各國爲邦 弓爲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나라를 이라 하고 활을 고라하고 도둑을 라하고 잔질을 하여 술을 돌리는 것(行酒)를 행상이라 하고 서로 부르기를 다 라고 한다.) 여기에 든 예들은 모두 중국어로 해석될 수 있는 것들이니 辰韓이 중국 진()나라의 난을 피해서 온 사람들이 세운 나라나는 말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 기록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 필시 辰韓과 중국의 이 같은 발음인데서 생긴 조작이다.

 

고대 언어의 역사에서 제기되는 중대한 문제의 하나는 앞에서 말한 부여계 제어와 한계 제어의 관계가 어떠했던가 하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책들은 언어에 관심을 가졌으면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한편 우리의 삼국사기를 비롯한 우리나라 역사책들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언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오늘날 전하는 언어 자료의 검토를 통해서 해답을 찾는 길밖에 없다.

 

2.4. 고구려어

고구려어는 적으나마 현전 자료를 가진 유일한 부여계 언어다. 三國史記 地理志에 음독명인 , 忽 旦을 석독명 水 城 谷이라고 했다. 여기서 고구려의 언어에서는 물()()’라 했고, ()’이라 했으며 골짜기를 ()’이라고 했음이 드러난다. 어떻게 買忽이라 쓰든지 水城이라 쓰든지 이를 다같이 매홀이라 읽었을까? 이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은 언제나 으로 읽지만 그 새김은 하늘’‘이라 읽기도 했다는 것이 이미 고구려에서도 있었음을 앞의 지명표기들은 보여주고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고구려어는 분명한 알타이계 언어로서 신라어와 가까우면서 퉁구스 제어와도 가까운 일면을 보여주며 일본어와도 각별한 친족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5. 백제어

백제는 부여계의 한 갈래가 지금의 서울 부근의 한강 유역에 세운 나라였다. 따라서 이때에는 고구려어와 같은 부여계의 한 언어를 말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오늘날 남아 있는 백제어의 편린은 이 언어가 신라어와 매우 가까웠음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 지명의 특징의 하나로 夫里를 들 수 있다. 중국의 『周書(636)異域傳백제조에

夫餘郡本百濟所夫里郡

陵城縣本百濟厼陵夫里郡

夫里는 신라 지명에 자주보이는 ’, ‘’(새김으로 읽어서 ’)과 같은 것으로 사람들이 보여 사는 곳을 의미한 것으로 추정된다. 龍飛御天歌·마 나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백제어의 잔영이 아닌가 한다. ·는 중세국어의 ()’에 대응되는 古形이다. ‘·의 제 2음절 모음은 일본어의 kuma()의 그것과의 일치에서도 확인된다.

 

2.6. 신라어

신라는 진한의 부족 중에서 오늘의 경주 지방에 있던 서라벌이 주위의 부족들과의 연맹형식을 통하여 낙동강 동쪽을 지배하게 되었다. 7세기 후반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이로써 신라어 중심의 한반도의 언어적 통일이 가능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 신라의 성립은 국어 형성의 역사상 최대의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통일 신라가 10세기 초까지 계속되는 동안 金城(慶州)중심의 신라어가 점차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까지 파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리하여 上代 신라에서 下代신라에 이르기까지, 서라벌의 언어가 신라어의 중심이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2.7. 중세국어

10세기 초에 고려의 새 왕조가 開京(개성)을 중심으로 하여 건설되었다. 이리하여 정치적 문화적 중심이 경주에서 개성으로 옮겨졌다. 이것은 언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때까지의 경주 중심에서 반도 중심의 개성이 放射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까지 계속되고 있으므로 오늘의 국어는 직접적으로는 10세기 이후에 개성에서 형성된 고려 中央語에 소급하는 것이다. 이 단계를 우리는 중세국어라 부른다. 그런데 개성은 고구려의 옛 땅으로서 신라의 변방이었고 그 주민들은 고구려의 전통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적으로는 신라의 한 방언이라고 규정할 수 있기에 우리는, 중세국어는 신라어를 근간으로 형성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3. 문자체계

3.1 한문의 정착

한자는 우리 조상들이 접한 최초의 문자였다. 국세가 팽창하고 국정이 복잡해 짐에 따라 지배계층은 기록의 절실한 필요를 느끼게 되었으며 이를 위해 한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두 방향의 노력이 싹 텃을 것임을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첫째는 중국어로 쓰는 것이요, 둘째는 자국어로 쓰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한문정착의 과정이나 연대를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려우나 고구려에서는 국초에 留記 100권이 있었던 것을 600년에 新集으로 改修하였으며 백제에서는 375년에 書記를 편찬하였으며 신라에서는 545년에 國史를 편찬하였다고 하니 한문이 매우 일찍부터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한문은 19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며 그 결과 우리 민족은 입으로 말하는 언어(口語)와 글을 쓰는 언어(文語)의 불일치를 오랫동안 가지게 되었다. 이런 기형적인 상태를 20세기 초엽의 학자들은 言文二致라는 말로 불렀다.

 

3.2. 고유명사의 표기

한자는 본질적으로 중국어를 위하여 만들어진 문자체계였다. 따라서 이 문자는 중국어와 다른 구조를 가진 언어를 표기하는 데는 매우 부적합하였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이 문자를 가지고 자국어를 표기해 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서 탄생된 것이 고대 삼국에서 볼 수 있는 漢字借用表記法이었다. 그 표기법의 원리는 다음의 두 가지였다.

각 한자는 表意的 기능과 表音的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표의적 기능은 버리고 표음적 기능만을 취한 것이 그 첫 번째 원리였다. 가령 자는 그 의미와는 관계없이 단순히 라는 음을 나타내는 기호로서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자의 육서(六書)假借의 원리에 통하는 것이요, 실제로 고대 중국인들이 외국 고유명사의 표기에 이 방법을 시용했으며 이 원리에 따라 사용된 한자을 音讀字라 부른다.

둘째 원리는 한자의 표음적 기능을 버리고 표의적 기능만을 살리되, 이 표의성을 자국어의 단어로 고정시키는 원리였다. 고구려에서는 자를 그 음과는 관계없이 란 단어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고 신라에서는 자를 이란 단어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다. 의 새김(또는)이라고 하며 이렇게 사용된 한자를 釋讀字 또는 訓讀字라고 한다.

그리하여 한 인명이나 지명을 두 가지로 표기하는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買忽 一云 水城(고구려)

(2)居柒夫 或云 荒宗(신라) --> ‘은 석독자로 표기되었으며 의 새김이 '거츨-(현대국어 거칠-’)이었음으로 이들은 다 거츨이라 읽힌 것이다.

 

3.3. 이두

이두는 고구려에서 싹텄지만 본격적인 발달은 신라에서 이루어 졌다. 이두는 쉽게 말하면 한문이 극도로 우리나라 식으로 고쳐진 것으로 단어의 배열이 국어의 문장구조를 따르고 조사와 어미까지 표기한 것이다. 신라 이두의 예는 壬申誓記石에서 볼 수 있다.

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임신년 6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늘 앞에 맹세한다.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집지하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이 글의 한자들은 그 본래의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그들의 결합은 한문의 어순과는 아주 다르다. 이글은 한자를 신라어의 어순에 따라 배열한 것이다. 한문이라면 自今이라 할 것을 今自로 되어 국어의 지금부터와 같은 어순을 보여준다.

南山 新城碑辛亥年二月二十六日 南山新城作節 如法以作 後三年崩破者...(신해년 226일 남산 신성을 지을 제, 법대로 지은 후 3년에 붕파하면...) 여기서 은 후대의 이두에서 디위로 읽히며 는 조격의 으로로 읽힌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석독 되는 점이 주목된다. ‘에서 보듯이 문법형태의 표시에서도 그 한자의 본래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초기 이두의 특징인 것으로 생각된다.

 

3.4. 구결

구결은 입겾또는 입겿의 한자 차용 표기이다. ‘은 읊고, ‘은 사물의 곁다리의 뜻이다. 흔히 ()’라고 하기도 한다. 구결이란 한문을 읽을 때 문법적 관계를 표시하기 위해서 삽입하는 요소들을 말한다. 童蒙先習의 한 구절이다.

天地之間萬物之衆厓 唯人伊 最貴爲尼 所貴乎人者隱 以其有五倫也羅.

여기서 이두에서 쓰이는 , , , 등이 구결에서도 쓰이는 사실을 발견한다. 구결이 이두와 다른 점은 한자의 약체를 사용하기도 한 사실에서도 볼 수 있다. ソ(), (), (),

(), () . 구결의 약체 가운데에는 일본문자(片假字)와 같은 모습의 것들이 있고 또한 그 성격도 같아서 큰 주목을 받아왔다.

한편 이두와 구결의 차이점은 구결은 구결의 요소들을 전부 제거하고 나면 한문의 원문이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데 반해 이두는 문법적 요소를 제거하였을 경우 한문 원문이 그대로 회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3.5 향찰

향찰은 신라에서 있어서 한자를 이용하여 자국어를 표기하려는 노력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표기 체계로서 향찰은 아무런 새로운 원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이미 발달되어 있은 체계들, 즉 고유명사 표기법과 이두 및 구결의 확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자를 이용한 고유명사 표기법이나 이두가 그랬듯이 향찰도 신라어를 표기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실질적 의미를 가진 부분(어간)은 석독표기로 문법적 요소(접미사, 어미)는 음독표기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지만, 국어의 음절구조가 복잡하고 그 수가 많은 것으로 말미암아 국어를 만족스럽게 표기하지 못했다.

오늘날 남아있는 향찰의 자료는 매우 드물며 향가에 국한되어 있는바, 신라시대에 향찰은 실제로 향가의 표기 이외에 사용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3.6. 훈민정음

훈민정음은 세종 25(1443)12월에 이루어졌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국어의 완전한 문자화라는 오랜 민족적 소망을 달성한 것이었다. 한자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음소적 문자체계로 실현된 것은 하나의 역사적 필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입으로 말하는 국어를 그대로 만족스럽게 적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훈민정음이 가지는 두드러진 특징은 독창성과 창조성이다. 그 제자원리인 상형과 가획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훈민정음 제자 원리는 解例 制字解正音二十八字 各象其形而制之(정음 28자는 각각 그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체계에 있어서 각 문자와 그것이 표시하는 음소 사이에 직접적이고도 체계적인 관계가 있었다. 예를 들어 '은 혀가 윗잇몸에 닿은 모양(舌附上齶之形)을 본뜬 것인데. ‘''과 같이 혀가 윗잇몸에 닿아 만들어지는 소리이면서도 '보다 강하기 때문에 글자를 만들 때에 가획(加畫)한 것이다.

 

이 과학성은 훈민정음이 깊은 음운 이론의 기초위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중국이론이나 세종대왕의 이론이 음절을 출발점으로 전개되는 점은 같았으나 그 근본적 차이는 이 음절의 분석에 있었다. 중국 음운학은 한 음절을 이분하여 첫 음(자음)이라 하고 나머지를 이라 했음에 대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초성. 중성. 종성의 삼분법을 취하였던 것이다. 이 삼분법의 기초위에서 훈민정음은 진정한 음소적 문자 체계에 가까워 질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창제 이후에도 이미 굳어진 한문의 지위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으며 궁중 나인이나 사대부 부녀자들 사이에 보급되다가 차츰 평민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19세기와 20세기의 교체기에 와서야 온 국민의 문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4. 고대국어

고대의 한반도와 그 주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언어가 있었으나 7세기 후반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들 땅의 언어는 新羅化됨으로써 한반도의 언어적 통일이 성취되었다.

신라어에 나타나는 중요한 현상의 하나는 중국어의 영향이다. 이 영향은 어휘에 가장 현저하였다. 정확지는 않으나 적어도 고대국어의 후기(통일신라 시대)에는 상당한 수요의 한자어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8세기에 地名을 중국식으로(한자2자로) 개명한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이런 영향은 그 뒤 인명에까지 일반화 되었으니, 국어의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4.1. 자료

신라어 연구에 이용될 수 있는 자료는 역사책에 나오는 고유명사 표기. 이두. 향찰. 중국역사책인 梁書新羅傳에 신라어 몇 단어. 그리고 고대 일본어에 들어간 차용어와 우리나라 전통적 한자음(東音)에 신라어의 음운체계가 반영되어 있어 그 再構에 참고 된다. 고대국어(신라어)연구에 직접적으로 이용되는 자료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린 고유명사 표기와 삼국유사의 균여전에 실린 향가 자료, 그리고 우리나라의 전통적 한자음 등이 있다.

고유명사표기의 예로서 삼국사기 권1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진한 사람들은 (표주박 호)’이라 불렀는데 시초에 큰 알이 박과 같았으므로 박으로 성을 삼았다.

4-2. 음운

또한 고대국어 음운은 모음조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자음 체계에서 된소리 계열이 없었다고 추정되고, 유기음이 있었다해도 매우 미약하였으며 모든 자음이 음절말 위치에서 변별되었다. 예를 들어 현대국어의 한자음에 된소리가 없는(, , 제외)것도 된소리 계열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우리나라 한자음은 중국이나 일본의 한자음과 다르다. 이 한자음을 흔히 한국 한자음이라 부르며 줄여서 동음(東音)이라 부르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가 고 있는 한자음은 이미 신라시대에 전반적으로 확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한자음의 가장 큰 특징은 중국의 상고음 또는 중고음의 입성 운미 -k,-t,-p 중에서 -t로 발음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로 지명표기에서 자로 ’(), 향가에서 대격어미로 자를 사용한 사실이다.

 

5.전기 중세국어

중세국어의 시기는 10세기에서 16세기까지 7세기 동안에 걸친다. 그리고 이 시기는 14세기를 경계로 전기와 후기로 양분된다. 전기 중세국어의 시기는 대체로 고려왕조에 해당하며 후기 중세국어의 시기는 조선 왕조의 처음 200년에 해당한다. 그리고 전기 중세국어는 주로 한자로 표기된 자료에 의하며, 후기 중세국어는 주로 훈민정음 자료에 의하여 대표한다.

 

5-1. 전기 중세국어의 성립

10세기 초에 고려 왕조가 서고 開京(開城)이 정치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가 됨에 따라 그 방언이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여기에 이 방언을 토대로 우리나라의 새로운 중앙어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 중앙어가 오늘날 까지 그대로 계속되고 있으니, 그 성립은 국어사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5.2.자료

중세국어의 중요한 문헌자료로는 鷄林類事鄕藥救急方이 있다. 계림유사중 方言天曰漢날과 같이 한자로 당시의 국어 단어 또는 어구 350여항이 기록되어 있는데 편찬자 孫穆이 직접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표기를 읽으려면 당시의 중국 한자음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필요하다. 향약구급방은 우리나라의 오랜 의약서중의 하나이며 이 책에는 약재로 사용된 180여종의 동식물에 대한 요약된 설명이 실려 있는바, 여기에桔梗鄕名道羅次”. “桔梗俗云刀와 같은 한자 차용 표기로 鄕名들을 적은 것이 있어 당시의 국어 음운체계에 관한 중요한 사실들을 밝힐 수 있기에 국어 자료로서 소중한 것이다.

향약구급방의 표기법은 고대의 한자차용표기법의 전통을 그대로 이은 것으로 석독 표기와 음독표기, 그리고 혼합표기가 사용되었다. 가령 황금(黃芩)精朽草또는 所邑朽斤草이라 표기되었는데 하나는 순수한 석독 표기요 또 하나는 혼합 표기로서 솝서근풀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하여 을 석독 하면 소읍()’이 되며 를 석독 하면 서근이 되는데 은 이 제2음절을 나타낸 것이다.

 

5.3. 전기 중세국어의 음운체계

전기 중세어의 자료들은 음운사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들을 밝혀준다. 계림유사는 12세기 초엽의 상태를, 향약구급방과 몽고어 차용어들은 13세기 중엽의 상태를 보여준다. 이들과 15세기의 후기 중세어를 비교해 볼 때 14세기에 현저한 음운변화들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자음체계에 있어 된소리 계열의 등장을 그 특징으로 볼 수 있으나 아직 어두 자음군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파찰음의 발음이 현대 서울말의 그것과 같았다. ‘[ʧ], [ʤ]로 발음되고 있는데 13세기에는 이 발음이 [ts], [dz]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모음체계는 몽골어 차용어의 검토에 의해서 분명히 드러난다. 몽골어 차용어는 주로 13세기 후반에 들어왔고, 15.6세기 문헌에 정음문자로 표기된 것이 가정 정확한데, 중세 몽골어의 모음들이 차용어에서 볼 수 있다. 중세몽골어 [o. u], 은 이들 차용어[]가 들어온 13세기 국어에 후설 원순 고모음은 하나밖에 없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만약 당시에 []였고 [u]였다면 이런 결과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ü]13세기에 [ü]였을 것임을 추정케 한다.

 

전기 중세국어에서 한자어가 격증하였는데, 이는 고려 광종 9(958)에 과거제도를 실시한 것도 하나의 자극이 되어서 문인 학자들은 구어로서는 우리말을 사용하고 문어로서는 한문을 사용함으로써 엄청난 한자어에 압도되기 시작하였다.

 

6. 후기 중세국어

1446. 훈민정음을 반포하면서 이 문자로 많은 문헌이 간행됨으로 15세기 중엽은 국어의 역사적 연구에서 각별한 주목을 받아왔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가 중세국어의 전기와 후기의 경계를 짓는 사건은 아니었으며, 다만 이전의 한자 차용 표기가 보여주던 단편적 언어 사실들이 이제부터는 전체적으로, 그리고 분명히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6.1. 15, 6세기 간행 자료

훈민정음창제 이전의 자료로는 중국어와 외국어의 대역 어휘집인 조선관역어가 있으며 훈민정의 창제 이후로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동국정운, 월인석보, 내훈. 두시언해, 악학궤범 등이 있으며, 16세기 간행자료로는 속삼강행실도, 번역노걸대. 이륜행실도. 훈몽자회, 천자문 등의 자료가 있다. 15, 16세기의 정음 문헌은 거의가 중앙의 간행물이며 대부분의 정음 문헌은 언해자료이다.

 

6.2. 훈민정음체계와 맞춤법의 원리

초성 17자는 상형과 가획의 원리에 따라 만들어 졌으며, 중성 체계는 중국 음운학에 해당되는 것이 없어서 독자적으로 만들었다. 중성의 세 기본자는 . . 人 三才의 모양을 본떴다고 하였으며 나머지 중성자 8글자는 이 기본자들의 합성으로 만들어 졌고, 종성에 대해서는 終聲復用初聲이라 하여 따로 문자를 만들지 않았다.

15세기 맞춤법의 1차적 원리는 한마디로 음소적이라고 할 수 있다. , 각 음소를 충실히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훈민정음 해례 종성해가 ㄱㅇㄷㄴㅂㅁㅅㄹ八字可足用也라하여 8종성만을 쓴 것도 음소적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7.3 음운 체계

훈민정음 체계는 당시의 국어에 대한 훌륭한 음운 분석의 소산이었으므로 당시의 음운체계를 잘 반영하고 있다.

 

6.3.1.자음

된소리-국어단어에는 濁聲이 있는데 그 한자음에는 그것이 없다. 15. 6세기의 우리나라 한자음에는 된소리가 없었다. 오늘날 , , 이 있으나 훈몽자회에 이들은 ’, ‘’, ‘으로 나타난다.

유성마찰음-훈민정음 창제 당년에는 유성마찰음으로 , , 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모두 유성적 환경에서만 나타남을 특징으로 한다. ‘은 일반적으로 w로 변하였다.

은 훈민정음 해례에서 불청불탁의 반치음이라고 규정하였다. ‘[z]로 실현되었음을 추정케 한다. ‘은 어두음이 모음임을 표시하거나, 보다 적극적인 기능을 가진 것이다. 예를 들어 -’()의 활용형 알어늘, 알오‘*알거늘, *알고등에서의 변화인데 이는 이 하나의 자음인 데서 생기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음절말 자음-후기 중세국어의 음절말에서의 자음 대립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훈민정음 해례 종성해는 8종성의 사용을 규정하였는데. 이는 첫째 , '이 어떻게 대립할 수 있었을까. 두 번째 문제는 에 관한 것으로 이는 '이 중화되어 [z]로 실현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런 위치에 한해서 이 음절말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15세기 중엽에는 음절말에 9자음의 대립이 있었다는 결론이다.

 

6.3.2 모음

15세기 국어에 ㆍ ㅡ ㅣ ㅗ ㅏ ㅜ ㅓ7개 단 모음이 있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또한 후기 중세 국어는 풍부한 이중모음 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특징으로 한다. 여기에서 상향이중모음으로 ㅑ ㅕ ㅛ ㅠ'로 표기되었다. 하향 이중모음으로는 ㅣ ㅐ ㅔ ㅚ ㅟ ㅢ 로 표기되었다 여기서 iy가 없음이 눈에 뜨인다.

 

모음조화-중세국어의 모음 연결 규칙 중에서 가장 현저한 것은 모음조화였다. 그 일반 규칙은 한 단어 안에 양모음 또는 음모음만이 있을 수 있고 그들의 공존은 허용되는 않는 것이다. 중립모음은 어느 것과도 연결될 수 있었다. 모음으로 시작된 조사나 어미는 모음조화의 일반규칙을 따랐지만, 자음으로 시작된 것들은 모음조화의 일반규칙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성조- 중세국어는 성조 언어였다. 이것은 중세국어와 근대국어를 구별하는 가장 큰 특징의 하나이다. 성조는 방점으로 표기되었다. 훈민정음언해의 주석에 평성은 저조, 거성은 고조 상성은 처음이 낮고 나중이 높다'고 설명한 사실과 이의 표기를 2점으로 한 사실은 이것이 저조와 고조의 복합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6.4. 문법체계

15세기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자료는 국어의 문법체계를 전체적으로 또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이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후기 중세국어의 문법 체계는 근대국어에서는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중 조어법과 체언의 곡용, 특수조사에 대해서 살펴본다.

6.4.1. 조어법

둘 이상의 형태소가 모여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방법, 즉 복합어가 만들어지는 방법을 조어법이라고 한다. 중세국어의 단어도 현대국어와 마찬가지로 크게 단일어와 복합어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단일어는 한 형태소로 이루어진 것을 말하고, 복합어는 둘 이상의 형태소로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복합어에는 합성어와 파생어가 있으며, 합성어는 대등한 형태소끼리 결합된 것이고, 파생어는 기본이 되는 형태소(어기)에 부차적인 형태소(접)가 붙어서 형성된 것을 말한다.

6.4.1.1. 합성어

체언의 합성은 현대어에서와 별로 다름이 없다. 그러나 합성용언에서 현저한 특징이 있으니 비통사적 합성용언의 형성이다. , 합성동사: 빌먹-(乞食), 것곶-(折揷), 듣보-(聞見), 죽살-(死生) . 합성형용사로는 됴쿶-(-, -)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용언 어간이 직접 연결되어 새로운 합성용언을 만들어 내는 방식은 중세국어에서 매우 생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6.4.1.2. 파생어

명사에서 파생된 ‘-가 연결되어 부헝이, 그려기, 아비, 어미, ‘-’  ‘-’ [: , 터럭(), . 기동(), 아지(숑아지, 강아지) 등이며,

파생동사의 용언에서 파생된 것으로 사동와 ‘--'가 있어 말음이 ', , --, ','이면 ‘--’로 그밖의 자음이나 모음이면

‘--'로 나타났다.

6.4.2.곡용

중세국어의 곡용에서는 무엇보다도 체언 어간이 교체를 보여준 사실이 특기할 만하다. 현대국어에서는 체언의 어간형은 자동적 교체만 보여 줄 뿐, 비자동적 교체는 용언의 어간에서만 볼 수 있는데, 중세국어에서는 체언도 용언과 같이 비자동적 교체를 보여주는 경우가 있었다.

 

6.5.활용

7.5.1 중세국어의 활용 어간은 많은 교체를 보여 주었다. 자동적 교체를 보인 것과 비자동적 교체를 보인 것이 있었는데, 이들 비자동적 교체의 일부는 현대국어에 까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용언 어간의 비자동적 교체에는 현대어에서도 볼 수 있는 -/-(), ’ -/-’(),외에 시므-’()의활용형 시므고, 시므디, 심거, 심굼등이었다.

 

선어말 어미 중 의도법은 현대국어에서는 볼 수 없는 중세국어의 문법 범주로 특기할 만한 것이다. 의도법은 선어말 어미 ‘-/-’로 표시되었다. 이 어미는 과거 시상 ‘--’와 결합하면 ‘--’, ‘--’와 결합하면 ‘-(또는 --)’, 경어법의 ‘--’와 결합하면 ‘--’ 계사와 결합하면 ‘-이로-’가 되었다.(; 붓그리다니, 얻과라. 弟子로라.

경어법에는 겸양법, 존경법, 공손법이 있었고, 시상의 선어말 어미에는 현재의 ‘-ㄴ-', 과거의 ‘--’, ‘-/-’ ‘--’. 미래의 ‘--’등이 있었다.

어말어미에서 동명사의 어미에는 -ㄴ,-ㄹ,-ㅁ,-등이 있었으며 정동사 어미는 서법(화자의 태도)을 나타낸 것으로 평서법의 어미로는 ‘-가 명령법에는 하쇼서, ‘하쎠,. ’하라체 등으로 표시되며, 이 가운데 가장 높은 등분은 ’‘-쇼셔이다.

 

중세국어 문장의 가장 큰 특징은 단문은 거의 없고, 복합문과 합성문이 뒤얽힌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종속절의 주어가 속격형으로 변형되며 한 문장에서 동격으로 사용된 명사들은 마지막 것만이 필요한 격조사를 가진다는 것이다.

 

6.5.2. 어휘

고유어

모음의 대립이 의미의 미묘한 차이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용된 예들이 후기 중세어에서 확인되는데, 주로 양모음과 음모음의 양 계열의 대립이 이용되었다.

한자어

15세기에 이미 한자어는 대량으로 침투해 있었으며, 문화적 개념에 충당된 단어들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명사나 동사도 한자어가 고유어를 격퇴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불교의 영향으로 많은 불교 용어가 국어 어휘 속에 들어왔다. 한편 한자어의 대량 유입뿐 아니라 중국어 어휘도 차용되어. 16세기의 번역박통사. 번역노걸대. 훈몽자회 등에 기록되어 있다.

 

7.근대국어

근대국어의 시기는 임진란이 지난 직후 즉 17세기 초엽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임진란은 중세어와 근대어와의 사이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제변화의 요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음운상의 변화뿐 아니라 문법상의 여러 중요한 변화가 이미 임진왜란 이전인 16세기 말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임진왜란이 지난 뒤 국어는 근대적 면모를 띠고 나타나게 된다. 근대국어의 시기는 17세기 초에서 19세기 말까지 3세기 동안에 걸친다. 한편 근대국어에서 현대국어의 여러 특징이 형성되었다는 관점에서 볼 때, 근대국어는 중세국어에서 현대국어에 이르는 하나의 과도기였다고 볼 수 있다.

 

7.1. 자료

근대국어 자료 중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初刊本들이다. 전후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이 지난 뒤 맨 처음으로 나온 국어 문헌은 아마 諺解痘瘡集要, 諺解胎産集要의 두 의서인 듯하다. 선조말년 1608년에 간행된 것이다. 17세기 후반의 자료로는 효종대의 辟瘟新方警民編諺解(1656)이 있다. 18세기 들어 영조 정조 때에 간행된 문헌들은 언해와 역학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조선왕조는 통역 및 번역에 관한 사무를 맡은 관청으로 사역원을 두었는데, 여기에는 한학(중국어학), 몽학(몽고어학), 여진학(여진어학) 청학(만주어학) 왜학(일본어학)四學이 있었다. 중요한 국어 자료로 윤음이 있었다. 윤음은 임금이 백성에게 내리는 詔勅으로 20여종의 정조 윤음이 전한다.

 

7.2.문자 체계와 표기법

임진왜란 이후의 문자 체계와 맞춤법의 특징으로는 방점이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ㅇ'자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반치음 자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근대국어에서는 맞춤법의 혼란이 있었는데, 어두 합용병서의 혼란으로 17세기에 ㅴ ㅵ이 소멸되었고 의 이체로 이 등장하여 이 공존하였다. ②된소리 표기의 혼란으로, 동일한 된소리에 서로 다른 표기가 자의적으로 선택되었고, 종성 ㅅ''ㄷ'은 점차 없어지고 표기상 ㅅ'으로 통일되는 경향이 있었고 모음 간에서 ㄹㄹㄹㄴ이 혼용되고 있다.

 

7.3. 음운

17세기에 어두자음군이 된소리가 되었고 그 완성은 17세기 중엽이며, 이 시기에 의 된소리가 있었다. 평음의 된소리화는 근대에 들어 더욱 일반화 되었다.

모음‘ · ’16세기에 제2음절 이하에서 첫 단계의 소실을 경험했는데 18세기 후반에 와서 어두음절에서도 소실되는 둘째 단계의 소실이 일어남으로써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추었다. 둘째 단계의 변화 공식은 ‘ ·>였다.

‘ · ’의 소실로 제1음절의 이중모음 ㅣ'ㅐ'로 변했는데, 그 얼마 뒤에 .는 각각 [ɛ][e]로 단모음화하였으며 이중모음 .의 단모음화는 18세기 말엽에 일어났으나, ‘, ㅟ'의 단모음화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구개음화는 17세기와 18세기에 일어났으며 음소 ‘ · ’의 소실이 모음조화의 붕괴를 가져왔다.

 

7.4.3 문법

17세기의 근대어 문헌들을 보면 그 언어가 15세기의 중세어 문헌들과 판이하게 달라졌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주로 16세기에 일어난 여러 중요한 변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차이는 18세기에 더욱 심해지고 그리고 19세기로 오면 사뭇 현대어와 비슷하게 된다. 이것은 주로 근대어에서 일어난 개신들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조어법에서 중세어에서 동명사 어미는 ‘-(/)'으로 동사 파생명사와 구별되었는데 근대어에서는 이 구별이 없어지고, 사동 어간을 파생시키는 접미사는 ’--‘, ’‘--’가 남고 나머지는 비생산적이라 하여 사라졌다.

곡용에서 중세의 말음 명사들은 근대후기에 와서 이 탈락하고, 주격조사 ‘-의 등장으로 17세기 문헌에서 그 존재가 뚜렷이 확인되며, ‘-만이 속격의 기능을 가지게 되고 은 사이시옷이 되었으며, 대명사에서는 1인칭과 2인칭의 주격형으로 내가, 네가가 사용되는데 이는 중세어의 주격형에 다시 ‘-가 연결된 것이다.

 

8. 현대국어

현대국어란 대체로 20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사용되는 국어를 의미하며 비록 100년 정도에 불과하지만 내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어, 전기에는 일본어에 의해 우리 국어가 크게 수난을 받았고, 후기에는 남북분단으로 인해 서로 다른 변화를 입게 되었다.

 

8.1.문자 체계와 맞춤법

언문일치의 필요성 속에 국문체와 국한문체의 대결이 있었으며 한글전용운동 등으로 점차 국문체의 세력이 확장되었다. 또한 한글맞춤법통일안(1933)이 제정되어 오늘날 문자 생활의 규범이 되었다. 이는 종래의 관용을 존중하면서 최소한의 개혁을 한 것으로 ‘ · ’ 을 없애고 된소리 표기에 합용병서 대신에 각자병서를 채택한 것이 개혁의 전부였다. 맞춤법의 기본 원리는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하는 형태음소적 원리를 채택하였다. 이것은 일찍이 周時經이 그의 여러 저술을 통하여 주장한 원리로서 15세기의 정서법의 그것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한편 1988한글 맞춤법표준어 규정을 문교부 고시로 공표하여 시행되고 있는데 이전의 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고 한 것을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새롭게 규정했다.

 

8.2. 음운

현대국어의 자음체계는 구개음화가 일어난 뒤인 18. 19세기의 그것과 대체로 일치하며, 폐쇄음, 파찰음에 평음, 유기음. 된소리의 3 계열이 있으며, 마찰음에는 평음과 된소리만 있다.

비음[ŋ]과 유음 은 어두에 오지 않으며 비음 도 어두에서 ‘i, y'앞에 오지 않는다.

모든 자음은 음절말 또는 어말에서 반드시 미파음으로 실현되며 어두에 자음군이 허용되지 않으며 모음간의 자음 결합은 두 자음에 한한다.

현대국어의 모음체계는 전설 원순모음을 가졌다는 점에서 19세기의 모음체계와 다르다. ‘, 는 이중모음으로도 발음되나 치음이나 구개음 뒤에서는 단모음으로 발음된다.

현대 서울말의 모음체계(최대 체계)10모음체계로 ㅣㅟㅡㅜ, ㅔㅚㅓ, ㅐㅏ이다.

한편 서울말에는 음장이 있는데 이는 중세어의 성조가 없어지면서 상성의 음장이 남은 것이며, 모음조화는 극도로 쇠퇴했으나 아직 언중에 의해 분명히 인식되고 있다.

 

8.3. 문법.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현대어는 몇가지 흥미있는 문법적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말에 있어서는 중세어에서 비자동적 교체를 보여 준 모든 명사의 어간은 단일화되었다. 곡용에서는 주격의 ‘-/의 교체가 확립되었고, 속격조사였던 ‘-은 사이시옷이 되고 ‘-만이 속격의 기능을 가지고 되었고, 대명사에서는 1인칭과2인칭의 주격형으로 내가, 네가가 사용 되었다.

 

용언의 활용은 근대어와 대차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계사의 활용이 현대어에 와서는 용언의 활용에 유추되었음이 주목된다. 그러나 아직 부동사형의 이요’, 간접화법에서의 이라()’에 중세적 흔적이 남아 있다. ‘이요eogotyj이고가 역시 쓰이고 있으며, 직접화법에서는 이다로 굳어졌다. 경어법에는 하오하게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통사론에 있어서도 외국어의 영향이 보이는데 가령 근대어에서 특수조사 보다가 부사처럼 사용되게 되었고,(: 보다 위대하다). ‘이 역시 독립되어 사용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용법은 일본어의 직접적 영향이다.

 

현대어는 특히 어휘에 있어서 그 면모를 새로이 하였는데, 현대서양학문의 새로운 개념들이 대개 二字 또는 三字의 한자어로 번역되어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또한 ‘-’ ‘-主義’ ‘-등은 거의 무수한 파생어를 만들어내는 것으로서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신어 창조에서도 전적으로 한자에 의존하여 온 전통은 매우 완강하여, 순수한 우리말에 의존하려는 기도를 물리치고 있다. 文法말본’. 名詞이름씨紫外線넘보라살등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한편 현대어에서 나타나는 큰 특징 가운데 하나로 약어의 빈번한 사용을 빼 놓을 수 없다. (; 특위, 노조, 불백(불고기백반). ) 그러나 고유의 국어 어휘인 의성어 의태어의 풍부함은 현대국어의 가장 현저한 특징이 되어 있다. . 딸랑딸랑. 아장아장. 등 이런 단어들은 ‘-거리다’, ‘-대다등을 接尾시켜서 용언화 할 수가 있다. . 딸랑거리다. 아장거리다. .

 

. 결어

이상으로 우리 국어사의 시대 구분과 각 시기의 언어적 특징에 대해 살펴보았다. 언어는 언제나 변화의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어의 변화는 돌발적이 아니고 어느 기간에 걸쳐 일어나지만 수백 년을 두고 보면 그 변화가 자못 현격한 것이 보통이다. 이를 단순히 문자와 단어의 변화라고 생각할 수도 없거니와 옛날에 사용되던 단어들이 죽고 새 단어들이 생겨난 사실만을 나열하는 것도 전부는 아니다. 이러한 변화는 음운 문법 어휘 등 체계가 유기적으로 그 체계 전체에서 일어나는 변화인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어사를 연구하는 목적 중의 하나인 국어로 쓰인 고전 문학 작품을 올바르게 읽기위한 길잡이로서, 그리고 현대국어는 옛 국어의 연속이기에 우리말의 역사를 바르게 알고자 함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그 깊은 내용을 알지 못하고 겉만 훑고야 말았다.

 

. 참고 문헌

1. 新訂版 國語史 槪說. 李基文 著. 태학사.2001. 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