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탁오
레이 황(黃仁宇)의 '이탁오'론 (발췌)
레이 황은 <1587>의 제7장에서 이지(李䞇, 卓吾)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이탁오를 공부하는 데 출발점으로 삼을 만하다.
몇 대목을 <중국소설연구회보> 제31호(1997. 9)에 실린 김혜경의 학술번역 "이지 - 자기모순과 갈등의 철학자"에서 옮겨놓는다.
1602년 이지는 옥중에서 면도하는 칼로 목을 따 자살했는데, 사후에는 그가 자아를 희생한 것이라고 일컬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평론은 의심스러운 바가 자못 적지 않다. 이지의 저작은 당시에는 용납되지 않아 여러 번 관방에 의해 금서조치 되었지만,
그를 흠모하던 사람들은 금지령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중판을 찍어냈다. 이러한 저작들은 비록 그 편폭이 굉장하긴 했지만
역사상에 어떤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낸 것은 아니었다. 이지는 결코 비겁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와 같은 유형의 작가들이
모종의 숭고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면 그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길 원하게 되고, 따라서 문장 안에는 자아를 불사르는 데 대한 만족과 쾌감을
표현하기 마련이다. 이런 특징을 이지의 저작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어떤 평자들은 이지가 하층 민중의 입장에서 농민을 착취하는 지주 계급을 비판하였다고까지 말하지만, 이런 논조야말로 정말로 근거 없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그는 1580년 요안지부(姚安知府)의 직무를 떠난 이후로 지주이며 신사(紳士)인 친구들의 도움으로 생활을 지탱해 나갔다.
하지만 이지 자신은 이러한 경제적 도움에 대해 전혀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다. 명대 사회는 그가 땀흘리지 않고도 살 수 있도록 허용하였지만,
그는 결코 체제에 대해서 아무러한 의혹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만약 어떤 면에서 그가 지주이거나 관료인 친구를 비판했다면 그것은 그 사람
개인의 성격이나 품행 때문이지 경제적 입장에 관해 거론한 것은 아니었으며, 동시에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에게도 똑같은 비판이 적용될 수
있다고 명확한 어조로 지적했다.
이지는 유교의 신도였다. 1587년 이전에 그는 유교의 윤리대로 응당 가정에 바쳐야할 일체의 의무를 완성했다. 그 다음해 그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는데, 그 해 나이 61세였다. 삭발의 원인은 그가 답답하고 구속감만 느껴지는 생활을 박차고 나와서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희구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환경이 진즉에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둔세(遁世)와는 전혀 달랐다. 이성적인 면으로
보거나 사회적 관계로 보거나 출가 후 그의 행동은 사실상 온 나라 문인들의 양심을 대표했기 때문이다.
퇴직 이후 십여 년 동안 이지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저술이었다. 그의 저작 대부분은 생전에 판각되어 간행되었는데, 지불원에는 간행된
목판을 쌓아두는 방이 따로 있었다. 저작의 내용은 대단히 방대했다. 유가경전의 해석, 역사적 자료에 대한 고찰, 문학작품에 대한 평론 및
윤리철학에 대한 내용이 모두 망라되었으며, 그 형식은 논문, 잡설, 시가, 서신 등으로 다양했다. 그러나 광범위한 섭렵이 반드시 다방면으로
조예를 갖추고 있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닌 것이다. 그가 서술한 역사는 사실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 결핍되어 있었고, 또한 체계가 형성된 흔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문장이 사서를 보고 옮겨 적은 것인데,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의 견해에 따라 장과 절을 바꾸고 차례를 엮고
배치하여 거기에 약간의 평론을 가한 것뿐이었다. 소설을 접할 때도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작품의 예술적 가치나 창작방식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이지는 작품의 주제의식이나 이야기의 구조, 인물묘사, 서술방법 등의 기교에는 전혀 주의하지 않았다. 그는 문학창작의 특질에 대한
탐구를 떠나서 오로지 소설속의 인물이 도덕적으로 고상한가의 여부와 행위의 정당성만을 따지면서, 마치 실존 인물이나 사실을 다루듯이 평론했다. 또 설령 철학적 이론을 천명하는 경우라도 대체로 매우 편면적인 부분만 손을 대서 소품문 비슷한 문장이나 썼을 뿐 계통적인 퇴고를 거친 결구가
근엄한 장편대작을 써내지는 못했다.
그의 각양각색의 저작은 결론이 모두 한 군데로 귀결되는데, 그것은 독서인의 개인적 이익과 공중에 대한 도덕감은 서로 융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출발한 그의 저작은 마치 각종 악기가 함께 울려 한 곡의 교향악을 연주하는 듯하다. 공과 사가 충돌할 때 어떤 방법으로 조화를 이뤄낼 수 있을까? 그가 설사 적절한 답안을 찾아내지는 못했을지 모르나 적어도 문제만큼은 일찌감치 제기해 놓은 상태였다. 독서인들에게 이 문제는 그들의 양심이나 지성의 완정성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아주 절박한 것이었다. 이지 자신의 경력은 그로 하여금 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인식하도록 만들었고, 표현도 더 신랄해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저작은 독자들의 호응을 불러낼 수가 있었다.
이지의 역사관은 대부분 전통적인 관점과 부합하고 있다. 예컨대 왕망(王莽)을 ‘왕위를 찬탈한 도적’이라고 확신한다거나, 장각(張角)을 ‘요망한
도적’이라고 질책한 경우가 그러하다. 그가 보기에 역사의 치란(治亂)은 거듭해서 순환할 뿐만 아니라 또 ‘문(文)’과 ‘질(質)’이 서로 연관된 것이었다. 일대의 어진 임금이 ‘文’에 치중해 문화를 극치의 상태로 끌어 올렸다면 그것은 벌써 동란의 기초를 열은 것이고, 반대로 난리를 평정하고 창업한
임금은 ‘質’에만 관심을 두게 되므로 그저 백성들의 질고를 해결할 방법이나 추구할 뿐 문화적 수준은 돌아보지 않게 된다. 이렇게 문화적 생활수준과 국가의 안전은 서로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인식하는 관점은 중국역사의 전통적인 산물이면서 관료정치의 특징이기도 하다.
중앙집권적 통치 아래서는 많은 관료가 억만의 농민을 다스리면서 그들을 획일화시키고 단위별로 나누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사람이나 특수한 성분이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키거나 새로운 법칙을 창조하는 일이 장려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문관 집단은 기술을 발전시킬 가능성을 이미 상실했으며 새로운 역사적 문제에 대처할 능력도 없었다. 사회의 물질문명(곧 이지가 말한 ‘文’)은 앞을 향해 발전해 나가는데 국가의 법률이나 조직기구가 그에 따라 개편되지 않았으므로 혼동이 발생하는 것도 필연이랄 수밖에 없었다. 시대적 한계로 말미암아
이지는, 역사의 순환은 피할 수가 없으며 정해진 운명이란 어떤 신비한 역량조차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힘들여서 어떤 새로운 해결방안을 찾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보면 이지의 유심론은 결코 철저하지는 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흥망치란은 결코 사람의 주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객관적 진실성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인심이 따라주지 않았다고 해서 치란조차 치란이 아니라고 우기는 그런 이론은 더욱 인정하지 않았다.
군왕이 일생동안 벌인 사업의 성패는 역사적 순환의 결과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지는 역대 군주를 평론할 때에도 그들에게 시대에 적응할만한 식견과 기백이 있었는가를 살피는 데 치중했다. 이지는 ‘천하라는 큰 책임’은 재상이나 대신이 짊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대신들에게서
기대한 것은 그들의 정치적 치적이었지 도덕적인 언사가 아니었다. 뛰어난 재주와 식견을 가진 사람이 백성의 복리를 위한 공헌을 만드는 과정 중에 있다면 명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앞뒤를 돌아보고 손익을 재다 보면 자신의 행동이 구속당하기 때문이다. 그는 욕됨을 참고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하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라도 사업상의 성공을 이뤄낼 수가 있어야 한다. 작은 절개를 버리고 대국을
바라보는 이런 행동이 정당한 것으로 인식되려면, 그 전제조건으로서 백성의 이익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를 논리적으로 해석하면 공중도덕은 개인의 도덕과 같을 수 없으므로 목적이 좋으면 수단이 불순해도 상관없다는 맥락으로 연결된다. 이지의 이러한 관점은 유럽의 철학자 마키아벨리(Machiavelli)와 매우 흡사하다.
이지는 역사상에서 재정경제문제에 대해 창조적 의지를 가진 집정자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전국 시대의 이리(李悝), 한대의 상홍양(桑弘羊), 당대의 양염(楊炎) 같은 인물은 존경했지만, 송대의 왕안석(王安石) 만큼은 좋아하지 않았다. 이는 물론 왕안석이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의 재주가 포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부강하게 하는 방법은 알지도 못하면서 기필코 부강해지려 한다”는 평론과 위에서 말한 논점을
서로 연계시킴으로써 이지는 한 명의 탐관오리가 미치는 해악은 작지만 청렴한 관리가 끼치는 해악은 매우 지대할 수 있다는 대담한 결론을 내렸다. 이지는 해서(海瑞)를 존중했지만 그가 전통적인 도덕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에 “영원한 푸른 풀”일 뿐이며, “찬 서리를 이겨낼 수는 있으되 동량이
될 수는 없는 자”라고 말했다. 유대유(兪大猷)와 척계광(戚繼光)에 대해서는 극도로 경도되어, “이 두 원로는 정말로 가경, 건륭 간에 혁혁한 업적을 남기셨으니, 천백세에 길이 전할 인물이시다”라고 찬양했다. 동시대의 인물 중에서는 장거정(張居正)을 가장 숭배하여, “재상 중의 재상”이라거나 “담력이 하늘만큼 큰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이지가 어떤 체계적인 이론을 창조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그의 단편적인 언론들은 자주 앞뒤가 모순되므로 독자들은 그가 반대하는
사물은 쉽게 식별해낼 수 있어도 그가 주장하는 내용은 알아내기가 그다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앞뒤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지의 가장
큰 결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창조적 능력이 있는 사상가가 과감한 자세로 입론하는 경우라도 그 언론에서는 종종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당시 이지의 불행은 오늘날 연구자의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가 남긴 상세한 기록 덕분에 우리는 당시 사상계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런 저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의 고민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측정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이 밖에도 공맹사상의 영향이나 주희, 왕양명의 시비장단이 이지의 분석과 논변으로 더욱 명확해졌다. 만력황제나 장거정,
신시행(申時行), 해서와 척계광(戚繼光)의 생활과 이상조차도 이지의 저작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또다른 각도에서 관찰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거대한 인구를 가진 국가에서 개인의 행동이 오로지 유가의 간단하고도 엉성하며 또 일정치 않은 원칙에 의해 제한되면서 거기다 또 법률까지도
창조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 사회가 발전해 나가는 정도는 반드시 제한당하기 마련이다. 취지가 아무리 선량하더라도 기술적으로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 만력 15년인 1587년, 간지상으로 정해(丁亥)년인 이 해는 겉으로는 사방이 태평하여 아무런 특기할 일이 없었지만, 실제로 우리의
대명 제국은 이미 발전의 끝머리에 다달아 있었다. 이 시기에 황제는 정신을 가다듬어 나라를 잘 다스릴 방법을 강구하기도 했고 안일과 탐락에
취하기도 했으며, 재상은 독재를 하거나 조화를 추구했고, 고급장성은 풍부한 창조력도 있었고 일시적인 안일을 탐하기도 했다. 문관은 청렴하게
멸사봉공하거나 탐욕으로 부패하기도 했고, 사상가는 극단적으로 진보했거나 절대적으로 보수화하기도 했는데, 최후의 결과는 선악을 가릴 것도
없는 실패였을 뿐 아무도 자기의 사업에서 의의 있는 발전을 이뤄내지 못했다. 어떤 이는 몸을 망쳤고, 어떤 이는 이름을 더럽혔으며, 또 어떤 사람은 패가망신과 오욕을 겸해서 감내해야만 했었다.
"童心說" (<분서>)
龍洞의 顔山農은 <서상기>의 말미에 자신의 감회를 이렇게 술회했다.
"뭔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나에게 아직 동심이 남아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대저 동심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만약 동심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이는 진실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무릇 동심이란 거짓을 끊어버린 순진함으로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처음 갖게 되는 본심을 말한다. 동심을 잃게 되면 진심이 없어지게 되고, 진심이
없어지면 진실한 인간성도 잃어버리게 된다. 사람이라도 진실하지 않으면 최초의 본마음을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사람의 처음 모습이요, 동심은 마음의 처음 모습이다. 대저 최초의 마음이 어찌하여 없어질 수 있는 것이랴! 그러나 동심은 왜 느닷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원래 그 시초는 듣고 보는 것이 귀와 눈으로부터 들어와 안에서 사람을 주재하게 되면 동심이 없어지는 데서 발단한다. 자라서 道理가 견문으로부터 들어와 사람의 내면을 주재하게 되면 어느덧 동심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도리와 견문이 나날이 쌓이고 아는 바와 느끼는
바가 나날이 넓어지게 되면 또 美名이 좋은 줄 알고 이름을 드날리려고 애쓰다가 동심을 잃어버리게 되고, 좋지 못한 평판이 추한 줄을 알게 되면
그것을 가리려고 애쓰다가 동심을 잃게 된다.
무릇 도리와 견문은 모두가 많은 책을 읽어 義理가 무엇인지 아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옛날의 성인이야 어찌 글을 읽지 않은 적이 있으셨을까!
하지만 공부하지 않아도 동심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설사 많은 책을 읽고 난 다음이라 해도 이 동심을 보호하여 그것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셨으니,
보통 공부하는 자들이 많은 책을 읽고 의리를 깨우침으로써 도리어 동심을 가리는 경우와는 매우 다르셨던 것이다.
공부하는 자들이 많은 독서로 의리를 깨우치다 자신의 동심을 가리게 되었다면, 성인들은 또 어째서 많은 책을 지으시고 말씀을 남기셔서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동심을 가리게 하셨을까? 동심이 가려지고 나서 말을 하면 그 말은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게 되고, 천거를 받아 정치를
하게 되면 정사에 기초가 없어지며, 저술한답시고 문장을 지으면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게 된다. 문장의 외적인 아름다움에 비해 내용이
칠칠하지 못하고 내포된 바가 독실해 빛이 발휘되는 것도 아니니, 한 구절 덕스러운 말이나마 구하려 해도 끝내 얻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동심이 가리어진 마당이라 외부로부터 들어온 견문과 도리가 마음자리를 다 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견문과 도리가 마음이 되고 나면 말하는 바는 모두 견문과 도리의 말이요 동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게 된다. 언사가 비록 아름다워도 나에게
의미가 없는 것은 어찌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을 내뱉으며 거짓 일을 꾸미고 거짓 문장을 지어낸 때문이 아니겠는가? 원래 그 사람이 거짓되면
거짓스럽지 않은 바가 없게 마련이다. 이렇게 해서 거짓말을 거짓된 사람에게 말해주니 거짓된 사람이 기뻐하며, 거짓된 문장을 거짓된 사람과
토론하니 거짓된 사람이 기뻐하게 된다. 거짓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기뻐하지 않을 바도 없는 것이다. 온 장내가 거짓이니 구경하던 난쟁이가
무슨 말을 재잘거릴 것인가?
그렇다면 이 세상에 비록 최고로 잘된 문장이 있었다 하더라도 거짓된 사람에 의해 인멸되어 후세에는 볼 수 없게 된 글들이 또 어찌 적다 하리오!
어찌하여 그럴까? 천하의 명문은 동심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동심을 항상 지닐 수만 있다면 도리가 행해지지 않고, 견문은
행세하지 못하며, 언제 지어도 훌륭한 글이 되고, 어떤 사람이 지어도 좋은 글이 되며, 어떤 체재의 글을 지어도 빼어난 글이 아닌 경우가 없게 된다.
詩는 왜 꼭 古詩에서 뽑아야 하고, 문장은 왜 꼭 先秦의 것이라야 한단 말인가? 후세로 내려와 六朝시대가 되자 시는 바뀌어 近體가 되었다.
또 변해서 傳奇가 되고, 院本이 되고 雜劇이 되었으며, <서상곡>-<수호전>이 되기도 하고, 오늘날의 과거문장이 되기도 하였다. 이 모두는 죄다
고금의 명문으로 시세의 선후만 갖고는 논할 수 없는 글들이다. 이렇듯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나는 동심에서 우러나온 명문들에 감격하고 말았으니, 거기에 무슨 <육경>을 말할 것이 있으며 <논어>-<맹자>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무릇 <육경>이나 <논어>-<맹자>는 사관들이 지나치게 추켜세워 숭상한 말이 아니면, 그 신하와 자식들이 극도로 찬양하고 미화시킨 언어일
뿐이다. 또 그런 것이 아니라면 세상물정 어두운 문도와 멍청한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기억해낼 때 앞뒤는 잘라먹거나 빠뜨린 채 제멋대로
자신의 견해를 책에다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후학들이 이를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성인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고 지껄이며 경전으로 지목해
버렸는데, 그 대부분은 성인의 말씀이 아닌 줄 누가 알리오?
설사 성인께서 하신 말씀일지라도 요컨대 목적이 있으셨으니, 병세에 따라 그때그때 적당한 약을 처방하여 이들 멍청한 제자와 물정 어두운
문도들을 일깨우려 하셨을 따름인 것이다. 거짓된 병을 치료하는 데 드는 처방은 고정불변인 것이 되기 어려우니, 이것들이 어떻게 만세의 지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육경>과 <논어>-<맹자> 따위는 도학자가 내세우는 구실이고 거짓된 무리들의 소굴일 뿐이니, 그것들이 결코
동심에서 나온 말이 아님은 너무나 자명해진다. 오호라! 나는 또 어찌해야 동심을 잃지 않은 진정 위대한 성인을 만나 그와 한 마디 말과 글이나마
나눠볼 수 있을 거나!
'한문 그리고 늦깍기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장자 인간세 - 접여의 노래 (0) | 2015.10.13 |
|---|---|
| 경포대 - 십이난간벽옥대 (0) | 2015.09.23 |
| 程子四箴 (0) | 2015.09.16 |
| 思親 / 申師任堂 (0) | 2015.09.13 |
| 囉嗊曲 (나홍곡) 二 / 成侃 (0) | 2015.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