偶題碁局 / 無名子 尹愭
바둑판에 우연히 쓴 글
父敎丹朱 요(堯) 임금이 단주(丹朱)를 가르치니
子分黑白 아들이 흑백을 구분하였네
縱橫十九 가로세로 줄 수는 열아홉이요
冷暖三百 바둑알 모두 합해 삼백이라오
淸簟疏簾 성긴 발 드리운 시원한 대자리 (簟: 대자리 점.簾:발 렴)
古松流水 물 흐르는 시냇가 노송(老松) 숲에 어울리네
無所用心 마음 쓰는 일 없이 멍하니 있기보다
猶賢乎已 바둑으로 두뇌 활동 하는 게 낫지
[주1]바둑판에 …… 글 : 작자 나이 20대 후반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본서는 대체로 창작 연대별로 편찬되었으나 부분적으로 연대가 뒤바뀐 경우가 보인다. 이 작품의 앞으로 두 번째 작품이 29세(1769) 때의 작품이고, 뒤의 작품이 25세(1765) 때의 작품이다. 따라서 편차 순서가 뒤섞인 경우이기는 하나, 그 사이에 있는 작품 둘은 25세~29세 때의 작품일 것으로 판단된다.
바둑의 유래와 도구를 언급한 다음, 바둑과 관련된 두보(杜甫)와 소식(蘇軾)의 시구와 공자(孔子)의 말을 끌어와서 바둑의 효용을 말하였다. 白과 百, 水와 已를 운자로 한 사언(四言)의 운문으로 이루어진 명(銘)이다.
[주2]요(堯) 임금이 단주(丹朱)를 가르치니 : 원문은 ‘父敎丹朱’인데, 바둑의 기원을 상고 시대 요(堯) 임금이 아들 단주(丹朱)를 가르치기 위해 고안한 것으로 보는 설에 근거한 말이다. ‘父’는 요 임금을 가리킨다. 순(舜) 임금이 우매한 아들 상균(商均)을 가르치기 위해 고안했다고도 한다. 바둑은 지혜가 없으면 두는 법을 습득할 수 없기 때문에 교구(敎具)로 사용했다고 한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42 技藝部 堯舜敎子》
[주3]아들이 흑백을 구분하였네 : 원문은 ‘子分黑白’인데, 중의적 표현으로, ①‘요 임금의 아들 단주(丹朱)가 사리를 분별하게 되었다’, ②‘바둑알을 흑백으로 구분하였다’의 두 가지 뜻을 모두 포함한 말이다. 참고로 명(明)나라 전여성(田汝成, ?~?)의 《서호유람지(西湖遊覽志)》 권1에 “단사로 바둑판 선을 긋고 바둑알을 흑백으로 구분하였다.〔丹砂爲局 子分黑白〕”라는 말이 있다.
[주4]바둑알 : 원문은 ‘冷暖’인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옥 바둑알〔冷暖玉棋子〕’의 줄임말이다. 옛날 일본국(日本國)의 왕자가 중국 황제에게 이런 바둑알을 바쳤다고 한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바둑알의 뜻으로 쓰였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42 技藝部 冷暖棋子》
[주5]성긴 …… 대자리 : 원문은 ‘淸簟疏簾’인데,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7월 1일에 종 현령(終縣令)의 물가 누각에 쓴 시 2수〔七月一日題終明府水樓 二首〕〉에 “초강과 무협 일대는 구름 끼고 비 오는 날이 절반이니, 시원한 대자리 성긴 주렴 안에서 바둑 구경 하노라.〔楚江巫峽半雲雨 淸簟疏簾看弈棋〕”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로, 한가롭고 시원하여 바둑 두기에 좋은 장소를 이른다. 《杜詩澤風堂批解 卷17》
[주6]물 …… 숲에 : 원문은 ‘古松流水’이다. 송(宋)나라 소식(蘇軾)의 시 〈바둑 구경〔觀棋〕〉의 서문에 “나는 본디 바둑을 둘 줄 몰랐다. 한번은 혼자서 여산(廬山)의 백학관(白鶴觀)을 유람하였는데, 관(觀) 사람들이 모두 문을 닫고 낮잠을 자서, 물 흐르는 시냇가 노송(老松) 숲에서 바둑 두는 소리만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에 기분이 좋아져 나도 모르게 바둑을 배우고 싶어졌다.
〔予素不解棋 嘗獨游廬山白鶴觀 觀中人皆闔戶晝寢
獨聞棋聲于古松流水之間 意欣然喜之 自爾欲學〕”라고 한 데서 따온 말이다.
이 역시 한가롭고 시원하여 바둑 두기에 좋은 장소이다. 《蘇東坡全詩集 卷41》
[주7]마음 …… 낫지 : 원문은 ‘無所用心 猶賢乎已’이다. 마음 쓰는 일 없이 멍하니 지내서는 안 됨을 강조한 말로, 《논어》 〈양화(陽貨)〉의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을 원용하였다. “하루 종일 배불리 먹기만 하고 마음 쓰는 일이 없으면 덕(德)을 갖추기 어렵다. 장기와 바둑이 있지 않은가? 이런 거라도 두는 편이 가만히 있는 것보다 낫다.
〔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弈者乎 爲之猶賢乎已〕”
(장달수의 한국학카페에서 옮긴 글)
[作者]
尹愭 1741(영조 17)∼1826(순조26).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경부(敬夫), 호는 무명자(無名子). 아버지는 광보(光普)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일서(一瑞)의 딸이다. 이익(李瀷)을 사사하였다.
1773년(영조 49)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20여년간 학문을 연구하였다. 1792년(정조16)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초사(初仕)로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예조·병조·이조의 낭관으로 있다가 남포현감(藍浦縣監)·황산찰방(黃山察訪)을 역임하였다.
이 후 다시 중앙에 와서 『정조실록』의 편찬관을 역임하였다. 벼슬이 호조참의에까지 이르렀다. 저서로 『무명자집』 20권 20책이 있다.
'세상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소(牛)보다는 일찍 일어나야지 (0) | 2016.10.14 |
|---|---|
| 中鋒直筆 (0) | 2016.10.13 |
| 맹자집주 해설 (0) | 2016.10.08 |
| 기록은 모두 역사다 (0) | 2016.10.06 |
|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0) | 2016.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