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西安)과 낙양(落陽)
두 도시 이야기: 도시를 노래하다 -서안(西安)과 낙양(落陽)
/ 염정삼
[개요] 황하지역을 중심으로 서북쪽의 상류에서는 서안(西安)이, 중원을 중심으로 한 중류지방에서 낙양(洛陽)은 정치문화경제의 중요한 거점도시로서 역할을 해 왔다. 주무왕(周武王)이 당시 중원을 차지하고 있던 은상(殷商)왕조를 물리치고 위수(渭水) 지역을 근거지로 서북방을 포함하는 거대한 왕국을 세웠을 때부터 서안은 낙양과 함께 ‘중국’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문화적, 민족적 집합체의 수도로서 당당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 이후로 수많은 왕조의 건설과 멸망을 거치면서도, 소위 중국은 서북방에서의 외세방어와 정복이 주를 이루는 때에는 ‘서안’을 중심으로 삼고, 왕조의 안정과 유지를 꾀할 때에는 ‘낙양’을 중심으로 삼는 경향이 강했다. 대표적으로 서주(西周) 시기와 동주(東周) 시기가 그랬고, 전한(前漢) 시기와 후한(後漢) 시기가 그랬다. 그리고 후한 시기부터는 이 두 도시는 극명하게 대비되어 문인들에 의해 노래불리기 시작하였다. 이 두 도시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발전되어 중국인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을까. 이 글은 한대(漢代)의 역사를 중심으로 두 도시의 연원과 변화를 설명하고, 두 도시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기억되었는지 고찰하면서, 두 도시의 주요 건축물들의 상징성을 해석해보고자 쓰인 것이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두 도시의 연원과 역사 2.1 전한 시대의 장안(長安) 2.2 후한 시대의 낙양(洛陽) 3. 도시를 노래하다 3.1. 두 도시는 어떻게 노래되는가 3.2. 장안(西都)의 주요 건축 3.3. 낙양(東都)의 주요 건축 4. 나오는 말
1. 들어가는 말
지금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를 들라면, 우선 먼저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동안 많은 영향을 끼친 두 도시를 꼽는다면 단연코 시안(西安)과 뤄양(洛陽)1)이 될 것이다.
황하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중원(中原) 지역에서 낙양은 정치문화경제의 중요한 거점 도시로서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당시 중원을 차지하고 있던 은상(殷商)왕조를 물리치고 위수(渭水) 지역의 서북방을 포함하는 거대한 왕국을 세웠을 때부터 서안은 낙양과 함께 ‘중국’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문화적, 민족적 집합체의 수도로서 당당하게 자리를 잡았다.2) 그 이후로 수많은 왕조의 건설과 멸망을 거치면서도, 소위 중국은 서북방에서의 외세방어와 정복이 주를 이루는 때에는 ‘서안’3)을 중심으로 삼고, 왕조의 안정과 유지를 꾀할 때에는 ‘낙양’을 중심으로 삼는 경향이 강했다. 대표적으로 서주 시기와 동주 시기가 그 랬고, 전한 시기와 후한 시기가 그랬다.4) 그런데 후한 시기부터 이 두 도시는 극명하게 대비 되어 문인들에 의해 노래불리기 시작하였다. 이 두 도시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발전되어 중국인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을까.
2. 두 도시의 연원과 역사
서안(西安)은 ‘서쪽에서 천하의 사람들을 편안하게 다스리게 하는 수도’라는 뜻이다. 그래서 ‘서경(西京)’으로도 불린다. 서안은 오랜 세월 장안(長安)으로도 불렸다. 이 단어는 ‘오래도록 (長) 편안하고 안정된(安) 왕조를 누릴 수 있음’을 뜻하므로, 수백 년을 지속한 제국의 수도로 서, 견융, 돌궐 등 외세의 숱한 침략에도 중국을 지킨 수도의 이름으로 중국인들에게 강한 상 징성을 가진다. 오래전부터 주(周)나라의 수도 서기(西岐)와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수도 함양 (咸陽)이 장안 부근에 있었다. 기원전 202년 전한(前漢)의 수도가 되면서부터 장안이라고 불렀 으며, 위진남북조의 오랜 열국 시대가 끝나고 581년에 수(隋)나라의 수도가 되었고, 618년에 는 당(唐)나라의 수도가 되어 300년간 국제도시로서 융성하였다. 주(周) 왕조가 중원을 차지하 는 기원전 11세기 무렵부터 기원후 6세기~9세기의 당대에 이르기까지 그 일대가 수도권으로 서 기능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히 이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라고 할 수 있다.
[위수와 장안의 위치]
2) 서안과 낙양을 주대에는 각각 ‘종주(宗周)’, ‘성주(成周)’라고 불렀다. 3) 서안은 황하 유역의 관중평원(關中平原) 중부에 위치한다. 남쪽으로는 진령(秦岭)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위하(渭河)에 임한다. 시안의 지세는 동남쪽이 높고 북서쪽이 낮다. 주변으로 경수(涇水), 위수(渭 水) 등의 많은 강이 흐른다. 4) 그 후로도 수당대(隋唐代) 역시 마찬가지의 패턴을 보여주었다.
그에 비하여 낙양(洛陽)이라는 이름은 도시가 낙수(洛水)의 북쪽에 위치한 데에서 유래되었 다. 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해는 강의 남쪽 부분에서 뜨기 때문에 햇빛은 항상 강의 북쪽 부분이 받게 된다.5) 낙양은 몇 세기 동안 낙읍(洛邑), 낙주(洛州)와 같은 다양한 이름으 로 불렸다.6) 또한 후한 시대 이후로 당나라 때까지 동쪽의 수도라는 의미로 동도(東都)라 불 렸다. 낙양의 북쪽에 있는 북망산(北邙山)은, 왕후나 공경(公卿)들이 죽은 후에 묻혔던 산으로, 본래 이름은 망산(邙山)이다. 망산이 낙양의 북쪽에 위치하기에 북망산이라 불린다. 하나라, 상나라, 그리고 주나라 때에도 이곳을 주요 도시로 삼았으며, 유방(劉邦)이 세운 한나라 때 대 도시로 발전하였고, 황하를 통한 물류의 유통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발달한 도시로 거듭난다. 그 이후 후한의 광무제 유수(劉秀)가 다시 낙양을 수도로 정하고, 도시 발전에 힘을 쓴 결과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 도시가 된다. 그 후 위(魏) 나라가 세워지고 나서 조조(曹操)의 아들 문제(文帝) 조비(曹丕)가 낙양을 다시 정비하였고, 당 시에 낙양에는 새로이 황궁이 들어서고 많은 백성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가장 화려하고 번창 한 도시로 부활하였다. 위(魏)를 이은 서진(西晉) 역시 수도를 낙양에 두었다. 또한 당(唐)나라 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낙양은 장안 다음으로 큰 도시가 된다. 이렇듯 낙양은 역대로 중요한 거점 도시였으며, 기원전 771년 동주(東周)의 수도가 된 이래 후한(後漢), 조조(曹操)의 위(魏) 등을 거쳐 오대(五代)시대 후당(後唐)까지 아홉 왕조의 수도였다. 기원전 8세기로부터 당대 기 원후 9세기 무렵까지 주요 왕조의 수도로 세워졌던 낙양 또한, 서안만큼 수천여 년 이상의 역 사를 가진 중요한 고도(古都)이다.
2.1 전한 시대의 장안(長安)
전한 시기 장안의 역사는 기원전 202년, 한 고조 유방(劉邦)이 지금 섬서성에 있는 위수 계 곡에 수도를 세운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수도를 어디로 정할지 고민하던 한고조가 루경(婁敬) 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함곡관(函谷關) 안쪽으로 들어갈 때, 그가 보았던 장안의 모습은 경악스 럽고 침통한 것이었다. 그보다 4년 전 기원전 206년 그가 진의 수도 함양을 점령하고 화려한 궁궐에 놀랐지만, 유방은 그곳을 떠나면서 보물들을 그대로 넣어둔 채 모든 궁궐을 봉인했다. 그러나 그 후에 도시를 점령한 항우(項羽)는 통째로 그곳을 3개월 동안 불태워서 진(秦)의 능 묘는 약탈당하고 300여개나 되던 진시황의 이궁(離宮)들도 잿더미로 변하였다. 위수 남쪽에
5) 이것 또한 중국의 도시에 대한 오래된 작명 방식이다. 6) 주나라 시절에는 낙양(雒陽), 낙양(洛陽) 등의 표기가 공존했고, 진(秦)나라는 水德(물의 덕)을 표방했으므로 ‘낙양(洛陽)’을 공식화했다. 한(漢)나라는 火德(불의 덕)을 숭상했으므로 ‘洛(낙)’자의 삼수변을 꺼려 ‘낙양(雒陽)’을 사용했으나, 위(魏)나라 때에는 土德(흙의 덕)을 내세웠으므로 다시 낙양(洛陽)으로 표기하였다. ‘위경(魏京)’이라는 호칭도 있는데, 지금도 낙양의 다른 비공식적 이름으로 사용된다. 이는 낙양이 삼국시대 위나라 수도였기 때문이다.
여름 별장인 흥락궁(興樂宮)이 겨우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폐허가 된 흥락궁이 있던 터에, 고조의 승상인 소하(蕭何:?-기원전 193)가 이 건축물을 수리, 보수, 확장하였고, 그 기간은 약 1년 반이나 걸렸다. 장락궁(長樂宮)이라고 다시 명명된 이 궁궐은 14개의 전각들이 자리 잡은 건축군이었다. 그 중에 전전(前殿)이라 불린 궁전은 길이가 100미터 이상이었다. 이것들이 전한 시대 수도 장안에 처음으로 나타난 건축이었다. 그러나 ‘장안 궁성’, 혹은 ‘장안성’이라고 불린 이 도시에 고조는 거의 머물지 않았다. 수리가 끝 난 기원전 200년 2월에 장안을 방문했지만 공식 조회의례를 한 차례 가진 뒤에는 곧 그해 4월 낙양으로 떠났고, 기원전 198년 10월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두 번째 장안 방문은 미앙궁(未央宮)의 낙성식 때였으며, 그는 죽을 때까지 장안에 거주하지는 않았다. 고조의 재위 시기 장안은 단지 정치적 상징이며 의례의 중심지였을 뿐이었다.7) 고조 7년 새로 수리된 장락궁에서 한대 최초의 공식적인 조정 의례가 열렸다. 그 때 고조가 비로소 ‘오늘에서야 황제의 존귀함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을 정도였다. 이것은 궁전의 완공 의식 뒤에 숨은 ‘정치적 심리학의 변화’를 보여준다. 2년 뒤 기원전 198년 완성된 미앙궁은 진령(秦嶺)도 보이고 북산(北山)도 바라보이고, 풍수 (灃水)와 패수(㶚水)에 감싸여 용수산(龍首山)에 기대어진, 백만 년 제업의 기반이 되는 그런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이었다.8) 전체 크기 가로 350미터, 세로 200미터나 되는 몇 개의 축대가 만들어졌고, 전전(前殿)이라는 궁전의 중심건축이 있는 북쪽으로 가면서 점점 높아지게 만들어졌다. 높은 토단 위에서 서 있는 궁전은 지휘 중심부를 이루면서 새로운 사회 지식인들의 점증하는 권력과 자부심을 역설한다. 이곳에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하나는 미앙궁이 가진 제국의 상징성이고, 또 하나는 소하로 대표되는 문관들이 갖는 역할의 성장이다. 소하에게 가장 높은 공로를 준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장수들에게 고조는, 이렇게 비유한다. 장수들은 짐승을 잡는 사냥개이고 소하는 사냥개를 풀어 짐승을 잡게 하는 사냥꾼이니, 당연히 그의 공로가 높다고. 미앙궁은 바로 이런 역할을 상징한다. 예컨대 궁궐의 실제 건축가였던 양성연(陽成延)은 평범한 장인에서 제후로까지 승격하였다. 하지만 고조의 재위 기간에 미앙궁이 행정의 중심지였다는 증거는 없다. 유일한 활동은 궁전이 완성되었던 고조 9년 초의 조회뿐이었다. 장락궁, 미앙궁과 함께, 무고(武庫), 태창(太倉), 대시(大市)가 장안의 초기 건축물이었다. 한 고조 시절에 처음 관심을 기울인 것은 오로지 자신의 궁전이었고, 장안에서 황제의 궁전을 제외한 또 하나의 중심부는 황제의 무덤이었다. 궁전은 위수의 남쪽, 무덤은 위수의 북쪽에 만들어졌다. 전한 시대 황실의 능묘에는 능읍 (陵邑)이 붙어 있었는데, 이곳은 후대 크게 발전하게 될 주거 및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능읍은 고조의 아버지를 위해 바친 만년읍(萬年邑)이다. 이곳은 태상황의 봉읍인 역양(櫟陽) 안에 위치한다. 이 노인은 자신의 고향 산동 풍(豊)땅에서 멀리 떨어진 빈 궁궐에서 홀로 지내기 싫어하여. 이전 풍땅의 사람들과 거리 모습을 그대로 옮겨 오게 하고 그 이름도 신풍(新豐)으로 바꾸었다. 태상황은 그런 편안한 환경에서 몇 년을 살았고 자신의 봉읍에서 22리 떨어진 만년릉에 묻혔으며, 그에게 그 봉읍인 영양이 릉읍으로 바쳤다. 수천 명의 호족들이 전국 각지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고조 자신의 능묘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져 7) 장락궁에서 거행된 의례는 사기와 한서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산동 지역 출신의 유가 의례 전문가 숙손통(叔孫通)이 주관한 것이었다. 그는 고조에게 이미 얻은 나라를 지키려면, 의례가 도움이 된다고 건의하고, 100여 명의 학자들을 조직하여 그 자신이 만든 유가 의례를 연습한 뒤에 황제를 위한 시연회를 열고, 그 후에 공식적인 조정 의례를 열게 하였다.
장릉(長陵)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그에게도 또한 작은 능읍이 바쳐졌다. 혜제(惠帝)의 시대에 오면, 장안에 중요한 변화가 나타나는데 바로 성벽의 건설이다. 고조 당시의 장안성의 성벽은 궁전의 벽이었다. 최근 고고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장락궁은 길이가 10km에 달라는 거대한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고, 기초 부분은 두께가 20m이상이었다. 그런데 사기와 한서의 기록에 의하면, 혜제 원년부터 장안 성벽 건축이 시작되었고 혜제 6년에 마쳤다고 되어있다. 대략 기원전 190년 말경에야 완성되었고 완공기념의례는 기원전 189년 정월에 거행되었다. 성벽 건축 작업은 보다 전통적이고 보다 권위적인 상징을 가진 수도를 만들려는 거대한 기획의 일부였다. 이는 한대 초기 정치와 사상의 변화와 관계가 깊다. 정치적 초점이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에서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로 점차 바뀌고 있었다.
이런 변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물은 육가(陸賈)와 숙손통(叔孫通)이다. 고조 시절부터 의례를 담당하던 숙손통과 육가는 혜제의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역사와 의례에 강한 관심을 가진 유자들이었다.9) 특히 15세에 즉위한 혜제가 3년 후 기원전 192년에 치른 ‘관례(冠禮)’는 유가의 예서에 매우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혜제는 숙손통의 제자였고. 장안의 새 성벽과 다른 구조물들도 그의 재위 시기에 건축되어 당시의 정치적 변화의 경향을 반영한다.
첫째, 황제가 미앙궁으로 옮겨가 거주하였고, 고묘(古廟)를 궁전의 동쪽에 새롭게 지었다. 궁전과 종묘를 나란히 두는 것은 주례「고공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둘째 기원전 189년 서시 (西市)라는 새로운 관영시장이 미앙궁 북쪽에 세워졌다. 이것도 그 기록과 맞는다.
셋째 미앙궁 내부에 릉실(凌室)이 첨가되었는데, 이 또한 주례의 기록과 일치한다.
넷째 혜제는 자신의 능묘인 안릉(安陵)을 고조 능묘 서쪽에 지어서 소목(昭穆)의 예를 따랐는데, 이도 또한 주례에 기록된 것과 같다.
다섯째 궁전, 종묘, 시장이 성벽에 의해 둘러싸이게 되는데, 이도 또한 「고공기」의 기록과 합치한다.
여섯째 장안이 사각형의 모습, 12개 성문, 성문마다 3개의 통로를 가진 형태로 계획된 것도 「고공기」의 기록과 맞는다.
일곱째 고조의 궁전은 동쪽을 향해 있고 서쪽으로 신하를 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정작 장안성의 방향은 남쪽을 향하도록 바뀌었다. 이것도 「고공기」의 수도 설계와 부합한다.
전통적이고 경전적인 의미가 강조되면서 종묘와 능묘가 새롭게 건축되었고, 그와 연관된 사 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하나는 배총제도가 확립된 것이고, 또 하나는 일련의 능읍이 건설된
고조의 첫 번째 조정 의례를 담당한 숙손통의 영향력은 그때에 그치지 않고 혜제 시기 내내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고조의 승상인 소하나 조참, 수많은 개국공신들이 장릉(長陵) 근처에 묻혔다. 본인들의 가족묘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 황제 가까운 무덤에 위치하면 대단한 영광이었으며, 신하와 군주 사이의 관계가 가까운 친척보다 중요하다고 믿었다는 증거이다. 배총은 계속해서 증가했다. 예를 들어 주발(周勃; 기원전 169년 사망)의 무덤은 장릉 가까이에 있었고 무덤의 입구가 100여m나 되고 묘실 남쪽 10개의 제사갱에서만 1,800개 이상의 보졸과 580개의 기병을 포함 한 2,400개의 토용들이 출토되었다. 황제의 무덤을 그대로 본뜨면서 그 주변에 위치한 배총은 그 자체가 작은 능묘였다.
능읍을 건설하는 전통은 여태후가 기원전 182년 죽은 자신의 남편에게 장릉읍(長陵邑)을 바 치면서 시작되었다. 이 도시는 남북이 2,200m, 동서가 1,245m이다. 혜제의 무덤에 붙은 능읍 은 능원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길이가 1,548m였다. 능읍의 중요성은 규모가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있었다. 그들은 오래된 지방 호족이거나 새로운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장 안 근처에 능읍을 세운 것은 단순한 제례 관행이 아니라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 다. 호족들을 지방에서 수도로 이주시키는 계획은 이미 고조 때부터 실시되었다. 이 계획을 입안한 사람도 루경(婁敬)10)이었다. 루경의 감독 하에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도로 이주 하였다. 이런 이주 정책은 그 뒤 황제들에 의해 되풀이되었다. 그 결과 많은 인구가 점차 장 안 교외의 능읍으로 집중되었다. 심지어 장안성의 인구보다 능읍들의 인구가 더 많았다는 연 구조사가 있을 정도이다. 이들 능읍의 거주민들은 지방의 최고 부호와 명문 출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전 왕조의 왕이나 귀족들의 후예였다. 이들은 재정적으로도 부유한 출신들이었다. 능읍의 경제력에 맞게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도 컸는데, 전한 시기에 이들 능읍에서 고위 관 직과 주요한 인사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혜제 시기의 장안 건축을 검토해보면, 새로운 계층구조가 출현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제국의 수도는 한 왕조 정권의 제도화를 상징하였다. 궁전, 중앙정부의 부 서, 관청, 제사 및 상업의 중심지로서의 도시, 그것을 둘러싼 많은 위성도시가 황제의 능묘에 붙어서 발전하였다. 능읍들은 제2의 정치적 사회적 중심지가 되었다. 수많은 배총들도 자신만 의 성벽과 배총들을 다시 갖게 되면서 점차 아래로 내려가는 사회조직의 단계를 보여준다. 장안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바로 무제(武帝)이다.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시절 장안은 급속한 확장을 갑자기 멈춘다. 세금과 정부 지출을 줄이려는 새로운 경제 정책 때문이 었다. 그러면서 고의적으로 건축에 관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과도한 건축’을 피한다는 여 론형성에는 궁전과 능묘가 대중적, 정치적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개인적 욕망과 관 련된 것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이 두 황제는 장안 궁전의 기념비성을 바꾸어버렸 다. 그런데 그 뒤를 이은 무제가 세운 건축물들은 무제 자신의 불사(不死)의 꿈을 이루기 위한 개인적 상징 및 소유물로서 지어진 것이 되었다. 평화로운 선왕 시절에 쌓인 부와 기나긴 재 위기간(54년)으로 인해, 무제는 자신의 목표를 이룰 시간과 자원을 가질 수 있었다. 수많은 도 가적 방사(方士)들이 황제의 불사(不死)를 위한 방법을 개발하였고 황제는 제국을 누비며 성스 러운 산마다 발자취를 남겼다. 미앙궁과 장락궁은 새롭게 장식이 되었고 명광궁(明光宮), 계궁 (桂宮), 북궁(北宮)이 새로 지어져서 장안의 성벽 안쪽을 채웠다. 황제의 사냥터인 어마어마한 상림원(上林苑)과 전각들이 장안성 서쪽과 남서쪽에 세워지고 거대한 제사 중심지인 감천궁(甘 泉宮)도 북서쪽에 세워졌다.
루경(婁敬)10) 그는 후에 공적을 인정받고 황실의 성을 수여 받아서 유경(劉敬)으로 개명하였다. 그는 황제에게 전국시대 육국의 후예들을 관중지역으로 이주시키라고 건의하면서 그것이 강본약말(彊本弱末) 정책이라고 설득하였다.(사기2720 한서2123, 권99. 「유경열전(劉敬列傳)」 참조.)
이 새로운 건축 형태에 영감을 준 그룹은 방사(方士)와 문인(文人)들이었다. 방사들은 기괴하고 이상한 영혼과 운명 등을 다루어 무제에게 신임을 얻었다. 그런 인물로는 이소군(李少君), 류기(謬忌), 소옹(少翁) 등을 들 수 있는데, 감천궁의 건립은 바로 소옹이라는 방사의 마술 덕분이었다. 이곳에는 익수관(益壽觀), 연수관(延壽觀), 통천대(通天臺)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통천대처럼 100장 이상 되는 높이의 구름을 뚫을 정도로 높은 누대는 인간 군주를 위한 것이 아니라, 누대에서 살기를 좋아하는 초자연적인 신선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신령을 유인하려면, 선인의 세계와 똑같이 재건축되거나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사들은 곧 거짓말을 한 것이 드러나고 하나씩 제거되었다. 반면에 문사들의 작품은 어떤 증거도 필요하지 않은 허구적 세계를 만들고자 하므로, 상상의 세계를 마음대로 탐험하고 즐기게 한다.
무제에게 허구적인 낙원을 현실적으로 창조할 수 있도록 기여한 문인들의 대표는 바로 사마 상여(司馬相如: 기원전179-117)였다. 그가 쓴 부 작품을 읽고 감탄한 무제는 그를 찾아서 새 로운 「상림부(上林賦)」를 헌사 받고 황실 원림을 새롭게 꾸미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138년 직 후 전국의 관리들은 진귀한 식물들을 공물로 바치도록 장려하였다. 전국의 진기한 식물들과 동물들이 모두 상림원으로 옮겨졌다. 군사정벌과 외국의 공납을 통해서도 기이하고 진기한 물 건들이 도착하였다. 예를들어 기원전 121년에 코끼리와 앵무새가 외국으로부터 들어왔다. 상 림원은 마법의 땅처럼 만들어졌다. 광상관(觀象觀), 백록관(白鹿觀)을 비롯한 많은 관람 장소 가 이러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상림원에는 12개의 성문, 36개의 정원, 12개의 궁전, 25개 의 관이 있었다.’ 기원전 121년 황제는 상림원 안에 거대한 곤명지(昆明池)를 만들어 견우직 녀 석상을 두어 은하수를 상징하도록 하고, 돌로 만든 고래를 두어 바다를 상징하도록 하였 다.
그러다가 기원전 104년 건장궁(建章宮)의 대대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기획 역시 사마상여의 마지막 작품 「대인부」에 의해 영감을 받고 허구적 낙원을 만들려는 데 몰두한 것에 기 인한다. 건장궁에는 바로 감로를 받는 신선의 금동상이 있었다. 건장궁의 중심 건물은 창합(閶 闔)이라는 천문(天門) 뒤의 옥당(玉堂)이라는 반투명의 흰돌로 만들어진 높은 망루이다. 이 옥 당이 상림원을 지배하고 있었다. 건장궁은 그가 상림원에 세운 마지막 건축이었다. 전한 시대 말엽에는, 장안에서 의례상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 세워졌다. 바로 왕망(王莽)의 명당(明堂)이다. 기원후 1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당시 섭정이었던 왕망은 무제의 화려한 건장궁과 상림원의 많은 건축물들을 파괴하고 그것으로 유가적 전통건물을 짓는데 활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건축이 바로 명당이었다. 스스로 성왕의 정통계승자임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기 왕망의 명당은 유가 경전에 근거한 심오한 정치적, 사상적 변화가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래서 명당은 고문헌을 종합하고 재해석한 위에 지어졌다. 1956년 장안의 남쪽 지역에서 그 유적이 발견되었다. 남북과 동서의 길이는 42m정도였고 향토층 위에 올려져있다. 그러나 이 명당의 의미가 제대로 부각되기에는 후한 시대의 변화를 또한 기다려야 했다.
2.1 후한 시대의 낙양(洛陽)
낙양이 서안과 함께 두 개의 대표적인 수도로서 대비되고 노래되는 시기는 바로 후한 시대부터이다. 그 첫 번째 시작을 연 사람은 바로 역사가이자 문장가였던 반고(班固)이다. 서안과 낙양이 함께 대비되어 노래된 첫 번째 작품은 그가 지은 「양도부」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중요성과 의미를 이해하려면, 반고가 생존했던 후한 초기, 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년), 명제 (明帝: 재위 58-75년), 장제(章帝: 재위 76-88년)의 시대는 어떠했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우리가 후한 왕조를 열었던 광무제의 시기를 이해하려면, 전한 말기의 역사부터 살펴봐야 하는데, 전한 시기 무제의 황제권력 절정기를 지나고 나면, 전한 말기로 갈수록 환관과 인척의 세력이 정치를 주도하게 된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신(新) 왕조를 세운 왕망 (王莽: 기원전 45년~기원후 23년)이다. 왕망은 새로운 국가 건설을 기획하고 있었고, 그 제도를 다듬고 실행하는 일을 유흠(劉歆: 기원전 53년-기원후 23년)에게 많이 의존했다. 그들이 복원하고 재천명하려는 제도는 대부분 ‘주대의 의례[周禮]’라는 것에 기탁한 것이었다.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천명했지만, 전한 시기 제례는 아직 불안정하였다. 특히 종묘제와 교사제가 많은 혼란을 야기했는데, 그것을 해결하고 국가제도로 정착시켜 후대의 중국 왕조가 답습하는 기본적인 국가의례로 만든 것은 바로 왕망 정권이었다.11) 특히 당시에는 고례에서 중시되던 명당(明堂) 제도의 문제가 첨예하게 대두되었다. 명당은 천자가 사시를 바르게 하고 교화를 행하는 건물로서, 그 주위를 벽옹(辟雍)이라는 수류로 둘러쌌기 때문에 그 구조는 천하를 모방한 축도였다.
명당은 종묘 제사ㆍ교사제와 함께 천하를 통치하는 자가 그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건축물이었기에, 명당을 지음으로써 천자는 천지사해를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다. 명당을 짓는 것에 대해서는 전한 시기 문제 (文帝) 때부터 논의한 바가 있었으나, 도교를 신봉하던 두태후(竇太后)의 반대로 중지하고, 그 후에 무제가 태산 기슭에 명당을 건설해서 봉선제(封禪祭)를 거행하여 상제에게 제사지내고 고조를 배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정작 전한의 수도 장안에 명당이 건설된 것은, 전한 말기 왕망이 집권한 평제(平帝: 재위 1-5년) 원시(元始) 4년 2월 들어서였다. 그 다음 해 5년 정월에 명당에서 협제(祫祭)가 거행되었을 때에, 제후왕 28명, 열후 120명, 종실 관계자 900여 명이 참가하였다고 전해진다.12) 그후 후한 왕조를 창설한 광무제가 태산에서 봉선을 행한 후에, 낙양에 명당 벽옹을 건설 하는 일이 추진되었다.13) 이때의 설계는 모두 평제 시대의 것을 기본으로 했으니, 명당의 건설 역시 왕망이 창설한 것을 기준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왕망 시절에 예제와 학제의 개혁도 이루어져서14) 원시 4년 교사(郊祀)와 명당 제도를 확정했는데, 이것도 유흠의 지도에 따른 것이다. 평제 시대의 예제, 학제의 정비와 개혁은 모두 왕망의 섭정 아래 실현되었으며, 이 제도는 이후 중국 여러 왕조로 계승된다.
광무제 갱시(更始) 원년(23년) 곤양(昆陽)에서 광무제 유수(劉秀)가 이끄는 병력이 수십만의 왕망의 대군을 패퇴시키고 이 패전을 계기로 왕망의 멸망은 가속화되었다.15) 그 후 왕망 정권 내부에서 유흠 등이 주도한 반란이 사전에 발각되어 유흠은 자살했고, 갱시제와 호족들의 연 합군이 왕망 정권을 멸망시켰다. 갱시 2년(24년) 갱시제에게 복속되었던 적미 집단이 유수에 게 항복하여 유수가 더욱 세력을 증대하게 되고, 마침내 갱시 3년(25년) 하북 지역의 농민반 란세력을 진압하고 하북 평정에 성공한 유수는 6월에 제천의식을 행하고 황제에 즉위한다. 이 의식 또한 평제 원시 년간에 행해진 상제를 제사 지내는 의식에 따라 행해졌으니, 광무제는 왕망 정권을 멸망시켰지만 왕망이 만든 의식을 채용한 것이다. 이 해가 건무(建武) 원년이다.
건무 원년 7월 광무제는 갱시제의 무장 주유(朱鮪)가 지키고 있던 낙양을 포위하여 9월 항복을 받고, 10월 낙양에 입성하여 이곳을 수도로 정했다.16) 이듬해 건무 2년 낙양에 우선 고묘(高廟 고조 유방의 묘)를 성내에 세워 광무제가 한왕조를 부흥시켰음을 분명히 하고, 고묘 오른쪽에는 사직의 방단(方壇)을 세워 낙양이 한왕조의 수도임을 보였다. 그리고 성에서 남쪽 으로 7리(약3킬로미터) 떨어진 땅에 교조(郊兆)를 만들었다. 이때의 교조와 의례 또한 평제 연 간의 것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으니, 이처럼 왕망이 제정한 예제는 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후 중국 왕조의 예제로서 답습되었다.17)
후한서「예의지」에 의하면, 이때 건설된 교조, 즉 환구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중앙에는 2 단으로 구축된 원단이 있고, 그 상단에는 남향으로 상제와 후토를 제사지내고 하단에는 청제, 적제, 황제, 백제, 흑체를 각각의 방위에 배열해서 제사를 지냈다.18) 그 후 수도 낙양에는 명 당, 벽옹도 세워지는데 그것은 그로부터 32년 후 중원 원년(56년)의 일로, 역시 모두 왕망이 제정한 원시 연간의 고사를 답습한 것이었다.19) 광무제 이후 명제, 장제 때까지 후한 전반기는 대체로 안정된 정치를 유지하여, 황제 권력의 유지와 국내 통치는 순조로웠다. 중원2년(57년) 2월 광무제가 죽고 황태자 장(莊)이 즉위했는데, 그가 명제(明帝)이다. 명제는 30세에 즉위하여 18년 재위하고 영평18년(75년)에 죽고,
교조는 황제가 특권으로 천지에 제사지내는 제단으로, 남쪽에 세워졌고 상제를 제사지내는 圜丘이다. 이때 세워진 교조의 제도나 규모는 즉위 때의 제천의식과 마찬가지로 전한 평제 원시 연간의 고사를 모방해서 계획한 것이었다. 18) 니시지마, 상게서, 423-424쪽. 원단 주위에는 토루를 두 겹으로 두르고, 원단에서 그 문에 이르는 길이 네 갈래였는데, 거기에서 일월ㆍ북두를 제사 지냈다. 그리고 두 겹의 토루 내부에는 다시 1,514 명의 신을 배사했는데, 이들 여러 신은 오성ㆍ오악을 비롯한 성신, 산천의 신, 천둥과 바람의 신들이다. 1
그 아들 황태자 달(炟)이 21세로 즉위하니 그가 장제(章帝)이다. 그는 12년 재위하여 장화 2년 (88년)에 죽고, 그의 아들 황태자 조(肇)가 10세로 즉위하니 그가 화제(和帝: 89-105년 재위) 이다.20) 그리고 우리가 후한 시대를 예교주의의 시대라고 일컫게 되는 이유는, 후한 초의 황 제들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정치 상황 아래에서 유교를 장려하여 교육기관을 지방으로까지 보급하고, 예(禮)를 중심으로 한다는 윤리를 사회질서로서 존중되도록 예제를 확립하였기 때문 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전한 말기부터 고례를 부활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진 예제 개혁 문제 에서 이 예제를 최종적으로 정착시키고자 한 왕망 정권의 설계가 없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 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왕망과 그의 자문역인 유흠은 유교 국교화의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후한 시기 유교 교학의 진흥은, 건무5년(29년) 수도 낙양에 ‘태학(太學)’을 설치한 일로부터 시작된다. 태학은 낙양성 개양문(開陽門) 밖에 세워졌는데, 강당은 정면 폭이 10장(약 23미 터), 안쪽 길이가 3장(약 7미터)으로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광무제로부터 하사품을 받는 박사 제자라고 불리는 학생이 있었을 만큼 체제는 갖추어져 있었다. 수도의 태학 등의 관학과 함께 후한 시대의 교학 시설로서 주목할 것은 지방에 설립된 사학이다. 광무제 시절부터 출현한 사학은 갈수록 점차 각지에 건립되었으며 거기에서 배우는 제자들은 모두 수백, 수천 명에 달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정현(鄭玄)에게 수천 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한 다. 유교가 장려되어 학자가 많아지자, 학파 간 논쟁이 활발해져서 경전의 같고 다름에 대한 해석을 통일할 필요가 생겼다. 장제 건초(建初) 4년(79년) 조칙을 내려 백호관(白虎觀)에 여러 유학자를 소집하여 유가의 경전인 오경(五經)의 차이를 논하는 소위 ‘백호관회의’가 열렸다. 거기에서 나온 결론을 상주한 것이 ‘백호의주(白虎議奏)’이고, 그것을 정리하여 편집한 것이 반고의 백호통의(白虎通議)이다.21)
3. 도시를 노래하다 3.1. 두 도시는 어떻게 노래되는가
앞서 설명하였듯이 전한 시기 장안의 역사는 기원전 202년, 한 고조가 위수 계곡에 수도를 세운 때로부터 시작되었고, 마지막은, ‘수만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배고픔으로 죽고, 도시는 폐허가 되어버렸으며 화려했던 종묘와 능묘들이 파괴되고 약탈되었던’ 기원후 25년에 끝났 다.22) 그러나 여전히 그 이후에도 그 도시는 사람들에게 매혹적인 곳이었다. 사람들은 장안을 통하여 과거의 영화를 기념하고 비극적인 파괴를 슬퍼하고 사라진 도시의 이미지를 더듬었다. 본질적으로는 회고의 성격을 갖는 이런 기억은, 전한의 멸망을 지켜본 후한 시대의 두 사람의 문장가에 의해 출발한 것이었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역사가인 반고(班固)에 의한 것이고, 또 하나는 경학가인 장형(張 衡:78-139)에 의한 것이었다. 우선 반고의 「양도부」23)를 잠깐 살펴보자. 이 글은 서도빈과 동도주인의 대화체로 시작하는 일화, 위수 평원에 있는 장안을 수도로 세우게 된 일을 서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부분의 고조의 신하와 장군들은 낙양을 선호했지만, 루경(婁敬)이라는 보졸이 궁정으로 밀치고 들어와 황제 면전에서 ‘당신이 만약 주(周)나라보다 더 큰 나라를 만들고 싶다면’, 군사적 정복으로 이제 막 권력을 쥔 한나라가 같은 방법으로 통치를 유지해야 하고, 그렇다면 전략적 위치와 지세로 보아 장안이 가장 중요한 장소라고 주장하였다. 루경은 고조의 핵심 참모인 장량(張良:-기원전 189)의 지지로 고조를 납득시켰고 그날로부터 장안의 200년 역사가 시작되었다.24)
「서도부」에서 제일 먼저 소개되는 건물은 미앙궁(未央宮)이다. 그 후에 2대 황제가 세운 장 안의 성벽, 뒤이어 출현한 능읍과 그곳에서의 생활, 수도의 확대 과정, 건장궁(建章宮)과 상 림원(上林苑)을 포함하여 무제가 세운 새로운 많은 건축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부의 마지막 구 절에 서도빈은 “그 당시에 도시와 도시가 서로 바라보고, 마을과 마을이 이어져 있었다. 나라 는 10대에 걸친 기틀에 의지해 있고, 집안은 100년간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 나 제가 아는 것은 10의 1도 되지 않으니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라고 끝맺었다. 자세 히 생각해보면, 이 글을 쓴 반고의 입장에서는 서도빈을 통해 서술된 장안의 모든 역사가 폐 허의 흔적과 고로(故老)의 이야기에 기초하고 있으며, 실제로 장안 발전과 확장의 전 과정을 경험하거나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님을 짐작한다. 즉 그것은 파괴되어버린 도시에 대한 반고 자신의 기억이다.
장형의 「서경부」25)는 「양도부」보다 40여 년 후에 같은 주제, 같은 형식의 작품을 써서 바쳤는데, 그것을 모방하면서도 ‘반고의 작품을 가벼이 여기고 깔보아 그것에 대신할 새로운 작품을 썼다’고 하였다.26) 비록 주제는 같지만 장안의 역사적 성장보다, 장형은 이 도시의 상서로운 위치와 이를 알아보기 위한 점복 행위에 대한 긴 서술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곳은 하늘의 은혜를 받은 곳이고, 운명적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며 하늘의 안내가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한고조가 그 땅에 정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장형의 묘사 구조는 다음과 같다. 그 순서는 수도의 경계, 궁궐, 성벽과 교외, 원림과 사냥이다. 이것들은 매우 화려한 어휘로 묘사되어 장형이 장안을 사치와 낭비의 축소판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장안을 보다 소박한 후한 왕조의 수도와 비교하고 검소함으로써 후한의 황제를 찬양한다. 두 사람 모두 장안을 역사적 운명으로 묘사하고, 낙양을 인위적인 예의의 상징으로 묘사하였다는 점에서 후 한 시기의 역사관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제 그들이 묘사한 도시의 모습을 살펴보자.
3.2. 서안(서도)의 주요 건축 : 반고는 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전한의 도읍인 장안인 묘사하는 동시에, 후한 시대 도읍 인 낙읍(洛邑)을 그와 대비하여 예의 도덕의 도시로 묘사하여 찬양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한 제국의 정치, 문화적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역사적 사안과 당시 문인들의 부(賦)를 통한 글쓰기 행위와의 긴밀한 관련성에 주목할 수 있다. 정재서는 우리가 장안을 묘사한 작품에서 부를 국가 정체성의 확립 과정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 서사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특히 원유 (苑囿)라는 공간 묘사에 주목한다.27) 특히 황제의 수렵 공간인 상림원을 중심으로 제국의 서사를 전개한 사마상여(司馬相如)는 한무제 시기 제국의 정점기를 살았던 인물이었다. 황제에게 원유의 공간이 지닌 정치, 문화적 의미는 대단히 크다. 왜냐하면 그곳은 제국의 축소판으로서 정체성을 향한 제국의 온갖 욕망이 재현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사마상여는 ‘주체적인 방향 성’을 가진 지식인이기보다 제국에 종사하려는 의지를 가진 문인이었다. 그것은 사마상여가 한 제국의 패권주의를 적극적으로 실천했던 인물로서 주변 민족인 서남이 복속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던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28) 그는 특히 「봉선문(封禪文)」을 유작으로 남길 만큼 철저한 황권의 숭배자이기도 했다. “시인의 마음은 세계를 포괄하고 인간과 사물을 두루 살핀 다[賦家之心, 苞括宇宙, 總覽人物]”29)는 그의 유명한 말은 문학가의 측면에서 읽을 수도 있지만, 지배의 서사로서 부를 파악하는 그의 인식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한부의 여러 묘사 중에서 원유의 묘사가 중요한 것은, 그 공간 자체가 함유하는 본질 적인 의미가 상서로운 짐승들이 넘쳐나는 신성한 장소로서 제의적이고 종교적 성격으로 인해 우주의 축소된 모습으로 조성되어, 제단과 산과 호수, 동식물 등이 어우러진 하나의 통일된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한대의 상림원에 이르러서도 그 형상은 유지되어 산(남산)과 연못(곤명지), 궁실 그리고 진기한 동식물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한대의 원유가 표상하는 우주가 더 이상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영역에 그치지 않고, 황제의 통치 하에 놓인 제국의 영토임을 명시하는 것으로 확립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과거 신성시 되었던 동물들은 황제의 주기적인 전렵의 대상으로 변해갔고, 원유의 이러한 기능은 청대까지도 지속되었다. 따라서 사마상여의 대표작, 「상림부」에 가장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은 수렵하는 장면이다. 전체 서사는 수렵을 중심으로 그 전후와 중간에 원유의 지세, 경관, 그리고 동물식물광 물상, 궁실, 황제의 행락 등에 대한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반고는 전한시기의 과도함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그의 「양도 부」「서」에서 하고 있는 말을 들어보자.
사마상여(司馬相如)ㆍ우구수왕(虞丘壽王)ㆍ동방삭(東方朔)ㆍ매고(枚皋)ㆍ왕포(王褒)ㆍ유향(劉向) 등과 같은 문학으로 모시고 따르는 신하들이 아침저녁으로 토론하고 생각하여 날마다 달마다 황제에게 저작(著作)을 헌납 했으며, 공경대신(公卿大臣) 어사대부(御史大夫) 예관(倪寬)ㆍ태상(太常) 공장(孔臧)ㆍ태중대부(太中大夫) 동중서(董仲舒)ㆍ종정(宗正) 유덕(劉德)ㆍ태자태부(太子太傅) 소망지(蕭望之) 등이 때때로 틈을 내어 부(賦)를 지었다. 어떤 이는 아랫사람의 심정을 토로하여 풍유(諷諭)의 뜻을 나타내고 어떤 이는 윗사람의 은덕을 펴서 충효를 다하여서, 온화한 기풍으로 계발(啓發)하고 선양(宣揚)하여 후대에 이어지도록 저술하였으니 이러한 부(賦)의 가치는 또한 아(雅)와 송(頌)에 버금가는 것이다.30)
위 인용문에 의하면, 사마상여 등 언어구사에 뛰어난 부 작가들은 언어와 재능으로 날마다 황제를 모시는 신하의 위상을 얻게 되는데, 이들에게 부를 짓는 일이 주요한 업무가 되었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동중서와 같은 공경대신들도 황제의 덕을 선양하고 충효를 알리는 작품을 지어서 아(雅)와 송(頌)에 버금가는 부(賦)문학의 가치를 천하에 알리게 된다. 부를 통해 이들 은, 통치자의 아래에서 들어야 하는 실정을 간곡하게 말할 수 있고, 위에서 다스리는 사람이 덕을 베풀고 충과 효의 사상을 가르치고, 상하가 조화롭고 관대하게 살아가면서도 그 모범을 후세에 전하여 알릴 수 있게 된다. 이제 이렇게 당당하게 부의 위상을 알리는 반고의 「양도부 」가 어떻게 장안을 묘사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전한 시대의 장안을 묘사한 「서도부」에서는 가공의 인물 둘이 나와서 대화를 시작한다. 장안을 찬양하는 서도빈(西都賓)과 낙읍을 칭찬하는 동도주인(東都主人)이다. 「서도부」는 서도빈이 장안의 역사와 풍물, 궁전 등의 건축, 교외, 원림 등을 골고루 묘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도빈은 장안의 산수가 뛰어나서 역대로 도읍으로 책정된 일, 전한 시대에 누경(婁敬)의 건의로 장안이 도읍이 되었던 과정, 그리고 서도 장안의 토목 건설 과정을 성곽, 성문, 도로, 도 시, 성시 등과 교외의 현읍과 릉읍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 등을 차례로 묘사하고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경도 관할 지역의 자연과 산수, 북쪽 감천산의 감천궁, 그 근처의 비옥한 전답을 설명하고, 동쪽 교외와 서쪽 교외를 묘사하면서 이어서 상림원을 묘사한다. 그 뒤에 미앙궁과 이궁과 별전 등 궁궐 건축을 설명하고, 후궁의 전각들과 궁녀들의 모습을 설명하고, 그 다음으로 조정 백관들이 있는 곳, 그리고 천록각, 석거각 등 학문을 닦는 곳을 설명한다. 또한 상림원에서의 수렵 훈련을 자세히 묘사하고, 사냥 후의 연회 장면, 그리고 후궁에서의 연회 장면을 묘사하고, 황제가 장안 주변을 널리 유람하며 즐기는 모습을 찬양한다. 서도빈의 끝도 없이 장황하고 화려한 묘사는 장안의 화려함과 현란함이 얼마나 독자들을 지치게 만드는지 깨닫게 해준다. 구체적인 묘사에서 살펴보면, 단적으로 서도 장안의 궁전ㆍ이궁ㆍ별전ㆍ누대 등 건축물 이름의 나열에서부터 바로 드러난다.31) 그 중에 특히 대단히 아름답게 묘사된 미앙궁의 화려함을 잠깐 살펴보자.
“귀한 건축 자재를 써서 신기한 모양을 다하였으며, 용(龍)이 날아들 것 같은 무지개 모양의 휘어진 대들보를 높이 올렸습니다. 서까래를 나란히 진열하여 높은 처마가 새 날개를 펼치고 있는 듯하며, 마룻대를 올려서 짊어지고 있는 모습은 준마가 고개를 높이 치켜든 듯합니다. 옥으로 된 주춧돌에 조각을 하여 그 위에서 기둥을 받치 게 하고, 황금 옥을 마름질해서 그것으로 당옥(璫玉)을 장식하였으니, 궁전은 오색의 윤기 나는 색채를 발산하고 서까래 끝 황금 옥에 반사되어 나온 광휘는 찬란하여 어두운 그림자까지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32)
[미앙궁 유적지]
예컨대 서도빈은 다음과 같은 건물 이름을 나열하고 있다. ‘감천궁, 상림원, 그 안의 36개소의 이궁 과 별관, 금원, 현무궐, 창룡궐, 미앙궁, 자미궁, 청량전, 선실전, 온실전, 신선전, 장년전, 금화전, 옥당전, 백호전, 기린전, 후궁의 전각들로서 합환, 증성, 안처, 상녕, 채약, 초풍, 피향, 발월, 난림, 혜초, 원란, 비상, 소양전, 천록각, 석거각, 승명려, 금마문. 미앙궁의 비각에서 이어지는 계궁, 장락궁, 광명궁, 건장궁, 봉궐, 별풍궐, 태탕전, 삽사전, 예예전, 천량전, 신명대, 정간루. 당중지, 태액지, 비렴관, 상란관, 촉옥관, 장양궁, 예장관. 경기 지역을 유람하며 지나치는 궁관이 백여 곳’ 등이다.
용이 날아들고 준마가 고개를 높이 치켜드는 형상의 미앙궁은, 오색의 옥들과 빛나는 황금으로 번쩍거리고 있다. 화려함이 지나치다 보면, 사람들을 아득하고 어지럽게 만든다. 문학적 인 수사력을 동원하는 반고의 묘사에 의하면, 그처럼 아름다운 미앙궁은 ‘하늘을 나는 각도[飛 閣]’로 계궁(桂宮)에 이어지고 장락궁(長樂宮)을 거쳐서, 북쪽으로는 광명궁(光明宮)에 이르고, 각도(閣道)를 건너 서쪽 성벽으로 건장궁(建章宮)과 그 안의 건물로까지 통해 있다. 건장궁 부 근에 있는 네 개의 대전(大殿), 즉 태탕전(駘盪殿)과 삽사전(馺娑殿)과 예예전(枍詣殿), 천량전 (天梁殿)에 이르면, 그 웅장함과 아득함이 사람을 어질어질하게 만들 정도였다고 반고는 설명 하고 있다.
“살짝 솟아오른 처마 끝 위로 기와를 덮으니 햇살이 반사되어 전당들 안으로 빛이 가득합니다. 그곳에 신명대 (神明臺)가 웅장하게 우뚝 일어나 높이 위로 치켜 올라 솟아 있어, 그 태반(太半)은 비구름 위로 올라서 있고 무지개가 누각의 들보에 휘감겨 있습니다. 아무리 날렵하고 용맹한 자라 해도 놀라 휘둥그렇게 쳐다볼 뿐 한 층 한 층 올라갈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정간루(井幹樓)에 기어오르길 채 반도 하지 못한 채, 두 눈은 아찔해지고 의식은 혼미해져서 누각의 난간을 놓치고서 물러나 무엇엔가 기대고자 하여도, 마치 넘어져 떨어질 것만 같아서 또다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혼이 나간 듯 당황하고 균형을 잃고, 어서 돌아갈 길을 찾아 헤매며 낮은 곳으로 내려오려고 하게 됩니다. 누대에 올라서 멀리 바라보는 것은 이미 힘이 들고 두려운 나머지, 그저 내려와서 주위 를 돌아보며 방황할 뿐입니다.”33)
신명대와 정간루의 높이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이 문단을 통해서 짐작컨대, 거의 상상을 초월하는 지경이었을 것이다. 비구름 위에 건물의 반 이상이 솟아올라 있고, 무지개가 그곳을 휘감고 있을 정도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곳에는 반고의 문학적 과장법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고의 요점은 이들 궁전과 누대들의 웅장함과 까마득한 높이를 강조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얼마나 사람들의 혼을 빼놓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반고는 그곳을 오르는 사람들의 ‘넋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잡아야 하는 법도를 잃고 있다[魂怳 怳以失度]’고 묘사한다. 그래서 이곳에서도 장안의 ‘눈부신 화려함’과 낙읍의 ‘법도(法度)’는 잠재적으로 대비된다.
3.3. 낙양(동도)의 주요 건축
그렇다면 법도를 갖춘 도시 낙읍(낙양)은 어떠한 건축물을 가지고 있었을까. 반고는 우선 먼 저 「동도부」에서 후한 광무제의 낙양 도읍이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 기술한다.
“(광무제가) 하수의 낙읍에 도읍을 세우신 것은, 황폐해져버린 성왕들의 사업을 잇고 깨끗하게 교화를 완성해 내자는 뜻에 따르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원의 덕을 체현하여 제도를 세우고, 하늘의 뜻을 계승하여 그것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은 멀리로는 당요(唐堯)의 전통을 계승하고 가까이로는 전한(前漢)의 공적을 이어받은 것이니, 그것으로 모든 생명들을 번성하게 기르시고 사방의 강토를 넓히고 수복하고자 하셨습니다.”34)
위의 단락에 의하면, 광무제가 낙양에 도읍을 세운 것은 성왕들의 사업을 계승하고, 황제의 교화를 완성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전한 시대의 공적을 이어받으 면서도 중원에서 발원한 요(堯)임금의 전통을 계승하고, 백성들을 잘 살게 하여 영토를 넓히고 과거의 땅을 회복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외양에서는, 황제 중심의 정치력의 확장을 이 야기한다는 점에서 전한 시대의 장안의 의미와 다르지 않게 보인다. 그러나 명제 영평(永平) 년간부터 낙양이 중수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법도를 넘지 않는 사치와 사냥의 의례를 설명하 는 단락이 길게 이어진다. ‘서도부’에 묘사된 매우 화려한 장안의 모습에 비하여, 검소한 낙양 성을 강조해서 묘사하려는 의도는 아래의 인용에 의해서도 곧바로 드러난다.
“낙읍의 황성(皇城) 안은 궁실들은 빛나고 밝으며, 궁궐과 중정(中庭)은 신묘하고 아름답긴 하지만, 화사한 곳이라 해도 과도하지 않게 하였고 검약함을 지켜 사치를 부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35)
반고가 말하려는 초점은, 처음부터 예의의 법도를 구현하는 도시 낙양이다. 광무제의 낙양 도읍의 뜻이 그러했고, 명제 때 의례를 거행하던 낙양의 모습이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서도빈이 그렇게 줄줄이 꿰어 말하던 궁전, 이궁, 누대의 명칭들에 비해 동도주인 언급하는 건축물은 오직 한 가지이다. 바로 ‘삼옹(三雍)’이다. 이것은 의례를 거행하는 것과 아주 깊은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는 건물이다.
“명제(明帝) 영평(永平) 연간에 이르러 왕업은 더욱 빛이 나고 자주 조화를 이루어, 삼옹(三雍)에서 최고의 의례(儀禮)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는데, 황제께서는 그곳에서 곤룡의 법복을 갖추어 입으셨습니다. 그곳에서 위엄 있는 조서(詔書)를 내리시고, 아름다운 덕을 펼치셨으며, 세조(世祖)의 묘호(廟號)를 기리고, 아악(雅樂)을 바로 잡으셨습니다.”36)
「동도부」에 출현하는 유일한 건축물, ‘삼옹’은 바로 ‘명당’과 ‘벽옹’과 ‘영대’를 가리킨다. 이 들이 얼마나 의례에 부합하는 건물인지 설명하는 대목을 아래에 인용한다.
“명당(明堂)에서 제후들을 접견하고 벽옹(辟雍)에 친히 임하셔서 정교(政敎)를 펴시며, 빛나고 밝은 성덕(盛 德)을 드날리고 황제의 풍교(風敎)를 펴십니다. 영대(靈臺)에 올라 상서로운 징조를 고찰하고,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아 황제 자신의 덕에 대해 천지의 상(象)과 부합하는 지를 헤아립니다.”37)
동도주인은 명당과 벽옹과 영대에 대해 설명한 후, 봄에 제후들의 알현과 연회 과정을 설명 하고, 바로 그때 황제가 전장제도를 밝히는 조서를 내려서 천하를 예제로 인도하는 것임을 강 조한다. 그리고 나서 당시의 세태를 비판하고, 위대한 한 왕조의 덕이 유래가 어디인지 묻고, 서도와 동도를 비교하여 예의를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렇게 「동도부」가 마무리된다.
[명당의 평면도] [명당의 조감도]
4. 나오는 말
반고가 「양도부」「서」에서 장안의 화려함에 대비되는 낙양의 예의 ‘법도’를 강조하고자 했을 때부터 「동도부」의 마지막 ‘삼옹’ 등을 찬양하는 시에 이르기까지, 반고의 문학적 수사와 정치 적 의도의 두 축은 결코 분리되지 않았다. 가장 극명하게 서도와 동도를 대비하고 있는 대목 을 살펴보자. 「동도부」 마지막 단락에 동도와 서도의 여러 가지 점을 조목조목 비교한 대목이 다.
“서도(西都) 장안은 서쪽에 편벽되어 있고 서융(西戎)과 경계를 이루며 험준한 사방의 요새로써 그 방어를 구축하고 있으니, 그것이 어찌 동도(東都) 낙양이 국토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평탄하고 사방으로 통하여서 수레의 바퀴살들이 바퀴통으로 모이듯 만방이 다 각지에서 이곳으로 모이는 것에 비교될 수 있을까요? 진령(秦嶺)ㆍ 구종산(九嵕山)과 경수(涇水)ㆍ위수(渭水) 두 하천이 있는 서도(西都)가, 어찌 사독(四瀆)ㆍ오악(五嶽)이 받쳐주고 하수가 두르고 있고 낙수의 근원이 되어 圖書가 나온 연원이 되는 동도(東都)와 비교될 수 있을까요? 서도의 건장궁(建章宮)ㆍ감천궁(甘泉宮) 등에서 여러 신선들을 모시는 것이, 어찌 동도의 영대(靈臺)와 명당(明堂)에서 하늘과 인간을 조화롭게 통일시키는 것과 비교될 수 있을까요? 서도의 태액지(太液池)ㆍ곤명지(昆明池) 등이 짐승을 기르는 동산이 되는 것이, 어떻게 동도의 벽옹(辟雍) 등이 바다처럼 흘러넘치는 교화의 물결로 도덕을 풍요롭게 하는 것에 비교될 수 있을까요?”38)
반고는 수사적으로 네 가지를 반문한다.
첫째, 변방의 험준한 요새인 서도가 나은가, 아니면 물류와 교통의 중심지인 동도가 나은가? 둘째, 높은 산맥과 봉우리에 둘러싸인 서도가 나은 가, 아니면 문화의 근원이 된 하도낙서(河圖洛書)의 발생지인 동도가 나은가?
셋째, 신선을 모 시는 화려한 궁궐이 나은가, 아니면 하늘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예전이 나은가?
넷째, 짐승을 기르는 사냥터가 나은가, 아니면 도덕의 교화를 넘치게 하는 교육의 터전이 나은가?
반고의 「양도부」는 독자에게 너무나도 분명하게 대답을 유도하고 있다. 왜 서안은 주대(周代)에 이어 한대에도 도읍이 되어 오랜 세월 중시되었는가. 그에 비해 낙양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반고의 시절에 장안과 낙읍이 서도(西都)와 동도(東都)로 비교되는 특별한 이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결론적으로 우리는 위와 같은 질문들의 답을 반고의 부(賦) 작품을 통해 얻게 된다. 반고의 「양도부」는 바로 위와 같은 후한 시기 예제의 확립과 완성이라는 배경 아래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반고의 「양도부」를 통해, 문인들의 부(賦)의 창작의도를 되돌아보면서 전한 시대와 후한 시대의 변화와 계승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왜 반고가 부 작품 속에 도시 공간의 치밀한 묘사를 포함시키고, 그것을 유가의 정치적 이념과 대비하고 결합하려고 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을 문학적 수사를 절묘하게 동원하여 표현하려는지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한대 이후로 도시를 묘사하는 부(賦) 작품에서 중국의 문학적 수사[文辭]가 극대화되었고, 그 때문에 부는 그 이후로도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의의에서 가장 첫 번째로 꼽히는 문학 장르가 되었다. 부를 통하여 문인들은 천하를 통치할 인군에게 바람직한 도시의 모습을 묘사하였고, 그것이 바로 문학적인 언어로 완성할 수 있는 최고의 작품임을 증명하였다. 특히 반고의 「양도부」는 도시 공간을 입체적이고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최고의 통치자인 왕에게 윤리 적인 풍간을 행하는 형식으로, 한대 부의 특징을 보여주는 전형이 되었다. 반고는 ‘부’라는 문 학적인 장르를 통하여, 도시의 역사와 배경과 구조물을 나열하여 비교하고, 화려한 것과 검약 한 것을 대비시켜 서도와 동도의 도시 공간을 자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이상적인 군주가 살고 통치하는 도시를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그리고 바람직한 윤리를 갖춘 군주는 어떻게 도시를 건설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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