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피천득 시

甘冥堂 2024. 1. 29. 11:32

+ 너 / 피천득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동안
앉아 있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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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호수가 파랄 때는
아주 파랗다

어이 저리도
저리도 파랄 수가

하늘이, 저 하늘이
가을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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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백

정열
투쟁
클라이맥스
그런 말들이
멀어져 가고

풍경화
아베마리아
스피노자
이런 말들이 가까이 오다

해탈 기다려지는
어느 날 오후
걸어가는 젊은 몸매를
바라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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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

간다 간다 하기에
가라 하고는

가나 아니 가나
문틈으로 내다보니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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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

단풍이 지오
단풍이 지오
핏빛 저 산을 보고 살으렸더니
석양에 불붙는 나뭇잎같이 살으렸더니

단풍이 지오
단풍이 지오

바람에 불려서 떨어지오
흐르는 물 위에 떨어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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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너 나무들 가지를 펴며
하늘로 향하여 서다

봄비 꽃을 적시고
불을 뿜는 팔월의 태양

거센 한 해의 풍우를 이겨
또 하나의 연륜이 늘리라

하늘을 향한 나무들
뿌리는 땅 깊이 박고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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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월

친구 만나고
울 밖에 나오니

가을이 맑다
코스모스

노란 포플러는
파란 하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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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가

훗날 잊혀지면
생각하지 아니 하리라

이따금 생각나면
잊으리도 아니하리라

어느 날 문득 만나면
잘 사노라 하리라

훗날 잊혀지면
잊은 대로 살리라

이따금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살리라

어느 날 문득 만나면
웃으면 지나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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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정

따스한 차 한잔에
토스트 한 조각만 못한 것
포근하고 아늑한 장갑 한 짝만 못한 것
잠깐 들렀던 도시와 같이 어쩌다 생각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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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정

등덩굴 트레이스 밑에 있는 세 사발
손을 세사 속에 넣으면 물기가 있어 차가웠다.
왼손이 들어있는 세사위를 바른 손바닥으로
두들기다가 왼손을 가만히 빼내면
두꺼비집이 모래 속에 작은 토굴같이 파진다.
손에 묻은 모래가 내 눈으로 들어갔다.
영이는 제 입을 내 눈에 갖다 대고
불어주느라고 애를 썼다.

한참 그러다가 제 손가락에 묻었던 모래가
내 눈으로 더 들어갔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영이도 울었다. 둘이서 울었다.
어느 날 나는 영이 보고
배가 고프면 골치가 아파진다고 그랬다.
"그래 그래" 하고 영이는 반가워하였다.
그때같이 영이가 좋은 때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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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복

나무가 강가에 서 있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일까요

나무가 되어 나란히 서 있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일까요

새들이 하늘을 나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새들이 되어 나란히 나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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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회

산길이 호젓다고 바래다준 달
세워 놓고 문 닫기 어렵다 거늘
나비같이 비에 젖어 찾아온 그를
잘 가라 한 마디로 보내었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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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

아빠는 유리창으로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뒷머리 모습을 더듬어
아빠는 너를 금방 찾아냈다

너는 선생님을 쳐다보고
웃고 있었다

아빠는 운동장에서
종 칠 때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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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순간

이 순간 내가
별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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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때

긴 치맛자락을 끌고
해가 산을 넘어갈 때

바람은 쉬고
호수는 잠들고

나무들 나란히 서서
가는 해를 전송할 때

이런 때가 저녁때랍니다
이런 때가 저녁때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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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만이

아침 이슬 같은
무지개 같은
그 순간 있었느니

비바람 같은
파도 같은
그 순간 있었느니

구름 비치는
호수 같은
그런 순간도 있었느니

기억만이
아련한 기억만이
내리는 눈 같은
안개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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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이제

너는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가난도 고독도 그 어떤 눈길도

너는 이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조그마한 안정을 얻기 위하여 견디어 온 모든 타협을.

고요히 누워서 네가 지금 가는 곳에는
너같이 순한 사람들과 이제는 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다 같이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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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유화

오래된 유화가 갈라져
깔렸던 색채가 솟아오른다

지워 버린
지워 버린 그 그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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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씨와 도둑

마당에 꽃이
많이 피었구나

방에는
책들만 있구나

가을에 와서
꽃씨나 가져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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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아니다

너같이 영민하고
너같이 순수하고

너보다 가여운
너보다 좀 가여운

그런 여인이 있어
어덴가에 있어

네가 나를 만나게 되듯이
그를 내가 만난다 해도

그 여인은
너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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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노 젓는 소리

달밤에 들려오는
노 젓는 소리

만나러 가는 배인가
만나고 오는 배인가

느린 노 젓는 소리
만나고 오는 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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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으시구려

잊으시구려
꽃이 잊혀지는 것 같이
한때 금빛으로 노래하던
불길이 잊혀지듯이
영원히 영원히 잊으시구려
시간은 친절한 친구
그는 우리를 늙게 합니다.

누가 묻거든 잊었다고
예전에 예전에 잊었다고.
꽃과 같이 불과 같이
오래전에 잊혀진
눈 위의 고요한 발자국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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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절에 드리는 기도

이 성스러운 부활절에
저희들의 믿음이
부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그 마음이 살아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권력과 부정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정의와 사랑을 구현하는
그 힘을 저희에게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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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아(琴兒) 피천득 선생은 대한제국 시절인 1910529일 한성부(서울) 종로에서

아버지 피원근(皮元根)과 어머니 김수성(金守成)의 독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피원근은 서울 종각에서 종로5가 땅까지, 강남에서는 양재동 땅에 이르기까지

알짜배기 땅을 소유한 구한 말의 유명한 거부(巨富)였다.

 

피천득이 6살 무렵,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는 일본인 대신이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피천득이 10살이던 1920, 모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뜨자 삼촌 집에서 자랐다.

그의 호인 '금아'(琴兒)'거문고를 타고 노는 때 묻지 않은 아이'라는 뜻으로

서화(書畵)와 음악에 능했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춘원 이광수가 붙여준 호이다.

 

춘원 이광수는 피천득의 재능을 발견하고 중국 유학을 권유하였다.

피천득은 14살에 중국 상하이로 유학을 가게 되고, 상하이 공보국 중학교를 졸업한다.

20살의 피천득은 그가 존경하던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를 만나는 데 성공한다.

그는 훗날 수필에서 안창호에 대한 인간미를 회고하기도 한다.

 

1937년에는 후장 대학(滬江大學) 영문과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여

서울에서 미국계 석유회사 스탠다드 오일의 직원으로 근무하였다가, 경성중앙산업학원 교사로 근무했다.

1945년에는 경성제대 예과 교수를 지내고,

1946년부터 1975년까지 서울대학교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며, 미국 하버드 대학교 등에도 강의를 했다.

1975년 이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되었다.

 

피천득 선생은 2007525일 서울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98세였다.

슬하에 21녀가 있는데 그 중 외동딸이 미국 대학에서 물리학 교수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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