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절실 또는 치열

甘冥堂 2024. 1. 30. 12:38

끈기와 도전.
절실 치열.
내 생애 한 번이라도 이런 적이 있었나?

과골삼천(踝骨三穿), 복숭아 뼈가 3번이나 뚫릴 정도로...

繩鋸木斷 (승거목단)
水滴石穿 (수적석천/천석, 낙수천석)
切磋琢磨 (절차탁마)

낙수천석(낙수천석)이라는 성어는
'떨어지는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는 의미입니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하잘것없는 자그만한 물방울이 단단한 돌을 뚫어 버리고 맙니다.

부단한 노력으로 못할 일이란 없습니다. 불가능할 것 같은 일도 언젠가 이루어집니다.

人一己百 (인일기백)은 <중용>에 나오는 말로,
'남이 한 번 하면 나는 백 번 한다.'는 뜻입니다.
원문은
人一能之, 己百之 (인일능지, 기백지)
人十能之, 己千之 (인십능지, 기천지)로
'남이 한 번에 잘하면 나는 백 번을 하며, 남이 열 번에 잘하면 나는 천 번을 한다.'입니다.

어떤 사람이 능력이 뛰어나 한 번에 성공했다면
나는 백 번을 해서라도 이루고야 말겠다는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김득신의 좋은 사례가 있습니다.

백곡 김득신(1604~1684)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 대첩을 이끈 김시민 장군의 손자로,
백이전을 11만 3천 번이나 읽은 다독가이자
59세에 과거에 급제한 조선 중기 대표적인 대기만성의 지독한 공부벌레로 정평이 난 인물입니다.
노력하는 자가 성공한다는 말을 대표적으로 증명하는 백곡 김득신의 공부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백곡 김득신의 어린 시절
백곡 김득신은 1604년 선조 37년에 태어나 문명을 크게 떨친 인물로  
명문 사대부가(진주대첩의 명장 김시민 장군의 집안)의 자손인 김득신은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지각이 발달하지 못해 노둔한 편이었습니다.
겨우 10살이 되어서야 겨우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배우고 돌아서면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한심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득신의 아버지 김치는 이러한 아들을 질책하기보다 격려했습니다. "학문의 성취가 늦는다고 성공하지 말란 법이 없다. 그저 읽고 또 읽으면 반드시 대문장가가 될 것이다. 그러니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마라."
이에 김득신은 "그래, 열심히 읽다 보면 반드시 외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마음먹고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김득신은 그때부터 책을 잡으면 수없이 반복하여 읽었습니다.
'사기열전' 중 '백이전'을 11만 3천 번을 읽었고, 다른 책들도 1만 번 이상 읽었습니다.

그러나 남들은 과거에 합격하는 스무 살 때 비로소 글을 지은 김득신을 두고
과거를 위해서만 공부하는 것은 아니니 더욱 열심히 하라는 당부의 말을 하며
자식의 노둔함과 어리석음을 창피해하기보다는 성실히 노력하는 김득신의 자세를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2. 백곡 김득신의 공부법
이러한 아버지의 남다른 교육 철학 덕분인지, 김득신은 노둔함과 주변의 힐난이나 멸시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만의 특별한 공부방법을 찾아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습니다.
그 방법은 다른 사람이 몇십 번 읽을 때 자신은 몇백 번 혹은 몇천 번 읽고,
또 다른 사람이 몇백 번을 읽으면 자신은 몇천 번 혹은 몇만 번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독서 방법을 통해 김득신은 타고난 노둔함을 이기고
때늦은 나이였지만 59세 때 과거에 급제했으며,
당대를 대표하는 명시인의 반열에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인간승리의 독서법이었다고 할 만합니다.

백곡 김득신은 공부할 때에 옛 선현과 문인들이 남겨놓은 글들을 많이 읽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자신의 '독서기'에 여러 책을 읽은 횟수를 기록했는데,
그중 백이전은 1억 1만 8천 번(1억 번은 현재의 10만 번에 해당)이나 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서재를 '억만재'라 이름하였습니다.
또한 사서와 삼경, 사기와 한서, 장자 그리고 한유의 문장 등 여러 책 가운데
어떤 것은 6만 내지 7만 번씩 읽었는데, 아무리 적게 읽어도 수천 번씩은 된다고 합니다.

독서한 글과 횟수로 따지자면, 누구한테 뒤지지 않을 다산 정약용조차
"문자와 책이 존재한 이후 위아래로 수천 년과 종횡으로 3만 리를 모두 뒤져보아도 부지런히 독서한 사람으로는 단연코 김득신을 으뜸으로 삼을 만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무리 독서를 잘하는 선비라고 해도 하루 동안 '백이전'을 1000번 넘게 읽기는 힘듧니다.
하루에 100번을 읽는다면 1년 동안 3만 6천 번을 읽을 수 있습니다.
3년으로 계산하면 겨우 1억 8천 번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3년의 세월 동안 병을 앓거나 사람들과 왕래나 문답이 있을 수 밖에 없으니
김득신은 진실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도리를 실천하는 군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시인 백곡 김득신
김득신은 많은 시를 남겼는데 '용호', '구정', '전가' 등의 시에는
어촌이나 산촌과 농가의 정경을 그림같이 묘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한문 사대가로 불리는 이식으로부터 "그대의 시가 당금 제일이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문명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김득신은 특히 오언, 칠언절구를 잘 지었습니다.
저술이 병자호란 때 많이 타 없어졌으나 그의 문집인 '백곡집'에는 많은 시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시를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 시를 보는 안목도 높아, '종남총지' 같은 시화도 남겼습니다.
앞 세대의 유명 시인이나 당대 문사들의 시를 뽑아 거기에 자기 나름대로의 비평을 덧붙였습니다.

4. 백곡 김득신과 억만재
벼슬에 큰 뜻이 없었던 김득신은 61세 때 충청도 괴산으로 낙향해 선대의 묘 근처에 두칸 짜리 초당을 짓고 거처했습니다.
이때 김득신이 초당에 '취묵당'이라는 당호를 붙였는데,
깨어 있어도 입을 다물고 취해도 입을 다물어야 재앙을 모면할 수 있으니 침묵을 금으로 여기는 삶을 살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현재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괴강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김득신의 옛 집,
취묵당 안에는 '억만재' 라는 자그마한 서재 공간이 있습니다.
'억만재'는 글자 뜻 그대로 김득신이 글을 읽을 때 1만 번이 넘지 않으면 멈추지 않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김득신은 말년에 이르러서까지 억만재에서 수천 혹은 수만 번에 걸쳐 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조선의 선비들은 대나무 가지에 횟수를 표시해 가면서 독서할 정도로 글을 반복해서 읽고 외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김득신처럼 1만 번 넘을 정도로 글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읽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노둔함과 어리석음을 극복하기 위해 억만 번에 걸쳐 글을 읽어서 당대를 상징할 만한 명문장가의 반열에 오른 탓에,
후대의 학자들은 김득신을 두고 '둔한 재주로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이자
'우리 역사상 최고의 독서가'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충북 증평군의 증평군립도서관과 독서왕김득신문학관 일원에는 백곡 김득신을 활용한 생활 SOC형 스토리텔링 공간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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