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人口是碑

甘冥堂 2024. 4. 21. 23:08

인구시비(人口是碑)

'인구(人口)'는 사람 입이고, '시비(是碑)'는 비석의 의미로 사람의 입이 비석이라는 뜻이다.

당호 진묵(震默1562~1633)스님은 김제 만경 불거촌(佛居村) 사람으로 7세에 아버지를 잃고 전주 봉서사(鳳棲寺)에서 중이 되었다.
이름은 일옥(一玉)으로 영특하여 가르침을 받지 않고 불경의 깊은 뜻을 깨달았다고 '진묵조사유적고'에 전한다.

일옥이 '주자강목' 한 질을 빌려 읽고는 길바닥에 버렸다.
'왜 버렸느냐'고 묻자 '책속의 글을 줄줄 외면서 뜻만 취했으면 그만이지'라고 말했다.



'인구시비'는 입으로 전하는 구전(口傳)이 곧 비석이라는 말이다.
이는 구비문학(口碑文學)·유동(流動) 문학·표박(漂迫)문학·적층(積層)문학 외
설화·민요·무가판소리·속담·수수께끼 등도 이에 속한다.

'문자를 세우지 말라'는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상통한다.

꽃은 빨갛고 잎은 푸르고 새소리 물소리는 낭랑한데, 그 의미를 담아 다 표현해 낼 수가 없다.
자연을 대하면 시와 노래가 나오고 아름다움은 한 폭의 그림인데,
계절이 바뀌면 스산한 감정이 형언할 수 없는 회상에 젖는다.
이런 감성을 한 편의 글로 새긴 것이 비문이다.

비에는 순수비(巡狩碑)·기적(積)비·신도(神道)비·능(陵)비·묘(墓)비·정려(旌閭)비·송덕(頌德)비 등이 있지만
만고에 남는 비석은 구전이다.


사람은 말하고 보고 듣지만, 잘보고 잘 들어야 화(禍)를 면한다.
옛말에 '천 사람이 손가락질하고 욕하면, 욕이 못이 되고 칼이 되어 병이 없어도 죽는다'고 했다.
또 '입이 여럿이면 무쇠도 녹인다'는데
그 입을 모아 새롭게 빚으면 옛말도 바뀔 수 있다.
이 모든 작용은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마음은 체(體)가 없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크기도 무한이고 아무리 퍼내도 줄지 않는다.
수시로 꺼내 쓸 수 있고, 무엇이든지 생각으로 짚어 낼 수 있는 위대한 보물창고다.
이런 마음을 일러 유즉시무(有卽是無)요, 무즉시유(無卽是有)로
있는 것 같지만 없고, 없는 것 같지만 있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마음 작용은 하늘과 같아서 번개와 뇌성을 치면서 엄청난 비를 쏟아내 금방 큰 강을 이루지만,
개이면 감쪽같이 허공만 보인다.
사람은 몸과 마음 이중구조로, 유무형(有無型)을 합하고 있어 측량이 어렵다.


진묵대사는 입이 비석이라는 대목에서
'옛 말에
이름이 높다고 그냥 돌에 새겨 남길 것이 아니라
오가는 사람의 입이 비석이다'

古赤有言 (고적유언)
名高不用鐫頑石 (명고불용전완석)
路上行人口是碑 (노상행인구시비)
라고 했다.



대사는 때론 곡차도 했는데
술을 동이 채 들이키고 취흥에 시를 읊었다.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삼아 뒷산을 베개로 하고(天衾地席山爲枕)

달을 촛불로 구름으로 병풍치고 바다를 술통 삼으니(月燭雲屛海作樽)

문득 크게 취하여 홀연히 일어서 휘휘 춤을 추는데(大醉遽然仍起舞)

도리어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걱정일세라(却嬚長袖掛昆崙)'


이 시를 본 선비들은 깜짝 놀라 혀를 내두르며
'천하에 이보다 더 높은 시가 있느냐'며 천년을 공부하고 만년을 내다보는 도시(道詩)라며 흠모했다.


진묵은 서산대사 청어휴정(靑虛休靜)의 법을 이어받고 많은 일화를 남긴 채 인조11년(1633년) 계유년에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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