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전 공인중개사 시험.
내 평생 그때만큼 열심히 공부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자투리 시간도 아까워 책을 옆에 끼고 살았다.
그당시 IMF 를 맞아 실업자가 엄청나던 시절이다. 너도 나도 뭐 해 먹을 것 없나 찾아 다니던 때, 그래도 먹물꽤나 먹었거나 또는 책상물림들은 공인 중개사를 택한 것이다. 경쟁률이 몇십대 일에 가까웠다. 시험이 얼마나 어려운지 차라리 사법시험을 준비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물며 현직 변호사가 시험을 보아도 떨어지는 수준이었으니 가히 짐작이 가지 않는가? 그땐 정말 그랬던 것이다.
시험이 끝난 후 다시는 이런 공부는 하지 않겠다 결심(?)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내게 무슨 도움이 되랴?
부동산 중개는 아무나 하나? 우선 쩐이 넉넉해야하고 사람을 홀랑 빠지게 하는 술수와 넌덕이 있어야 했고 무엇보다 다분히 사기성(?)이 있어야 했다. 한 일년하다가 손들고 말았다.
요즈음 책을 보면서 그때 생각이 난다. 이거 내가 지금 뭐하는거야?
뭐 이렇게 까지 해야 되나. 대강 설렁설렁해도 될것 같은데... 그냥 적당히 줄거리만 알면 되는거 아냐?
흐릿한 눈 비비며 졸음을 참으며 책상머리에 앉아 있어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기 일쑤다.
비내리는 날의 파전과 막걸리. 아, 다리 후들거려 멍멍탕. 강릉집 막국수에 조껍데기 술, 임진강변 장어
쓸개주, 마포 족발...... 무엇 보다도 참기 어려운 저 악마같은 친구들의 유혹.
중국에서 부르는 소리 - 기름에 쩐 냄새, 바이지우, 칭따오 맥주. 향차이. 이름 모를 음식들의 유혹.
장쾌한 산수- 설산과 호수, 끝없이 펼쳐지는 벌판, 밤새 달리는 침대열차, 지독한 발냄새의 침대버스,
벽에 걸린 배낭이 나에게 속삭인다. "주인님. 요새 시간이 없으세요? 쩐이 없으세요?"
벌레씹은 목소리로 대답하지요. "둘 다 없다네"
내 무슨 영화를 보려고 이 고생이람. 배낭 둘러매고 나가면 세상이 다 내것인데.
선지자들이 광야에서 찾아 헤메는 심정을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
그래도 참아야하느니. 지금까지 잘 해 왔지 않느냐? 벽에 걸린 격문이 나를 다독인다.
勿謂今日不學而有來日,
勿謂今年不學而有來年
오늘 배우지 아니하고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고
금년 배우지 아니하고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라는 주자의 권학문에 나오는 글이다.
귀티나고 품격있는 글귀들도 많겠지만
이 글이 어쩐지 나를 위해 선조들이 만들어주신 글 같은 생각이들어 벽에 크게 써 붙인 것이다.
.......오늘도 있고 또 내일도 있고.
금년이 있으니 또 내년도 있을테고...
요래 생각하면 좀 거시기 하지요?
사나이 칼을 뽑았으면 모기 대가리라도 베어야지.
옛시인은, 칼을 빼어 기둥을 내리치고(拔劍擊柱長嘆息), 어느 시인은 칼을 뽑아 강물을 가른다
(抽刀斷水水更流)는 말이 있듯. 이들의 회재불우까지야 아니더라도 지난 세월을 허송한 것만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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