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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과 중국의 굴욕

甘冥堂 2012. 5. 23. 07:13

   아편전쟁과 중국의 굴욕

 

Ⅰ. 아편 전쟁 개요 및 배경

 아편 전쟁은 19세기 중엽 서구 열강이 중국에서 상품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과 벌인 2차례의 전쟁으로 이를 제1차 중영전쟁 (1839~1842)과 제2차 중영전쟁(1856~60)으로 부른다. 제1차 중.영 전쟁의 빌미가 된 것은 아편문제였으므로 일반적으로 이를 아편전쟁이라고 하며, 제2차 전쟁은 애로호 사건이라고 하나, 서구 자본주의와 중국 간의 충돌이라는 포괄적 의미를 함축하는 중영 전쟁이라고도 한다..

 

청나라가 태평성세의 한계에 부딪힌 때, 영국이 상품의 판로를 찾아 중국에 들어왔다. 동인도회사는 1780년대부터 광둥 무역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여 중국으로부터 차, 도자기, 목면 등을 수입하고 영국의 모직물, 면직물 등을 수출했다. 양국의 무역수지는 대체로 중국의 수출 초과였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차 수입을 결제할 은이 부족했다.

 

그런데 영국에게 가장 큰 장애는 광동무역체제였다. 광둥무역 체제하에서는 대외무역이 광주 한 항구에 국한되었고, 청나라의 허가를 얻은 공행-서양물품을 취급하는 洋行 상인들의 조직은 관세를 자의적으로 부과하고 외국상인의 무역을 제한했다. 무역확대를 위해 광둥무역체제를 타파하기위한 교섭에 실패한 영국은 아편이라는 수출 대체품을 찾게 되었다.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인도에서 아편의 경작을 널리 보급시키고 영국 상인이 중국에 대규모 아편 밀수를 진행하여 폭리를 취하는 것을 장려했다. 즉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밀수출하여 벌어들인 은으로 중국의 차를 수입한 것이었다.

 

아편밀수의 범람은 중국 백은의 대량유출을 조성하였고 모든 계층으로 퍼져나간 아편 흡입 풍조로 중국에서는 부패, 전투능력 상실, 국가기강 해이, 농촌경제 파탄, 재정 파탄 같은 폐단이 커졌다. 이렇게 아편 중독의 만연과 은의 유출로 인해 청나라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했다.

1838년 호광총독(湖廣總督) 임칙서(林則徐)는 당시 황제인 도광제(道光帝)에게, 만약 아편의 범람을 방치한다면 중국에는 군인이 되어 적을 막을 건강한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이며, 국가에도 군대에 물자와 급여를 보내줄 은자가 없을 것이라고 상주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광둥에 파견하여 아편문제를 처리하도록 했다.

 

Ⅱ. 아편전쟁

1.제1차 아편전쟁

1839년 3월 광둥에 도착한 임칙서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중국인 아편 관련자의 처벌은 물론이고 군민을 동원하여 아편 밀수를 엄밀히 조사하게 하고 영국과 미국의 상인들에게 아편을 내어 놓고 다시는 밀수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의 제출을 요구했다. 외국인 商館을 봉쇄하는 등 압박을 가했고 영국 무역 감독관이 거두어 보낸 외국 상인들의 아편 2만여 상자를 몰수하여, 1839년 6월 이 아편을 호문 해변의 대중 앞에서 불살라 버렸다. 이것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마약 소각 행동이었고, 이는 중화민족이 마약을 금지한다는 결연한 결심을 표현한 것이었다.

영국 산업자본가들은 중국이 무역의 자유를 침해하고 사유재산을 몰수했다고 비난하며 영국정부와 의회에 압력을 가했다. 영국 정부는 10월 전쟁을 발동할 것을 제멋대로 결정하였고 제1차 중영전쟁(아편전쟁)의 막이 올랐다.

 

마침 주릉(九龍)에서 술 취한 영국인 수부들과 중국인이 충돌해 중국인 1명이 사망했는데 영국 측이 범인 인도를 거부하자 임칙서는 마카오를 봉쇄했다. 이를 계기로 시작된 양국 간 무장충돌은 전쟁으로 이어졌고 영국 원정군이 마카오에 도착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1840년 6월의 일이다. 영국군은 견고한 선박과 예리한 포에 의지하여 먼저 절강성의 주산을 함락하고 또 이를 기지로 삼아 1841년 1월 홍콩 섬을 점령했다. 이후 영국은 또 원군을 증파하고 오송 보산 상해를 공격하여 피해를 입혔고 계속 양자강을 따라 상류로 진격하여 양자강의 요지를 점령하고 1841년 7월 양자강과 베이징으로 가는 주요 수송로인 대운하와의 교차점 진강(鎭江)을 함락시킴으로써 청으로 하여금 난징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난징조약으로 영국은 전쟁 배상금 2,100만 銀元, 홍콩 할양, 광주. 하문, 복주. 영보, 상해 등 5개 통상항구를 개방하고 중국의 수출입 관세에 대한 협의권을 얻었다. 추가 조약에서는 치외법권을 보장 받았다. 남경조약과 추가 조약들 및 미국 프랑스와 맺은 조약으로 중국은 불평등한 조약체제에 편입되었다. 즉 중국만 일방적으로 관세자주권을 상실하고, 영국, 미국, 프랑스에 대해 영사재판권과 최혜국대우를 인정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개항지에 군함을 파견할 수 있는 규정 때문에 외국군함이 중국영해에 자유로이 들어오게 되고 외국인이 땅을 빌려 영원히 거주할 수 있는, 중국 주권이 상실된 지역인 조계가 생겨났다.

 

2. 제2차 아편전쟁

전쟁의 승리 이후에도 수출이 부진하자 영국은 조약개정을 요구했다. 수출부진에는 값싼 중국제품의 저항력, 자급자족적인 중국의 사회경제 구조, 은 유출로 인한 구매력 저하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깊숙한 내륙지역까지 진입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해서 자유로운 내지여행과 북쪽의 항구 개방 등을 요구했다.

다른 한편으로 제2차 중영전쟁의 배경에는 광둥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排英운동이 있었다. 배영운동의 직접적 요인은 영국인들의 오만과 행패였다. 대표적인 배영운동은 대규모로 장기에 걸쳐 일어난 영국인의 광저우 입성 저지운동이었다. 외교상의 교섭으로도 입성에 실패한 영국은 다시 한번 중국을 무력으로 굴복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영국은 무력사용의 빌미를 찾고 있던 중 애로호 사건이 일어나서 제2차 중영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1856년 10월 광저우 앞 주강(珠江)에 정박하고 있던 범선 애로 호에 중국 관리가 올라가서 중국인 승무원 12명을 해적혐의로 연행해 갔다. 애로 호는 중국인 소유의 배로, 선원도 중국인이었지만, 선장이 영국인으로 선적을 홍콩에 두고 있었다. 광저우의 영국영사는 승무원을 즉각 송환하고 배에 걸려있던 영국 국기를 함부로 내린데 대한 공개사과를 요구했다.

兩廣총독은 당시 배에 영국 국기도 걸려있지도 않았고 중국인 소유의 배이므로 영국이 나설 까닭이 없다고 일축했다. 이튿날 돌연 영국군이 광저우를 공격하고 총독관저까지 침입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했다. 프랑스는 1856년 광시성에서 불법적으로 포교하고 있던 선교사가 중국 관리에게 처형된 사건을 명목으로 영국과 공동으로 군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1857년 12월 광저우가 점령되고 이후 3년간, 투항한 지방관의 괴뢰정권을 앞세운 연합군위원회의 점령행정이 실시되었다. 조약개정 교섭이 이루어져 텐진조약이 맺어졌지만 베이징에서 비준을 강행하려던 영국과 프랑스는, 외국사절의 수도 입성을 꺼린 청나라가 텐진조약에서 규정하고 있는 베이징 대신 상하이에서 비준서를 교환하려하자, 1859년 6월 베이징에서의 비준을 강행하기 위해 북상하다가 다구(大沽)에서 중국포대의 포격을 받아 대파되었다. 영국 프랑스군은 1860년10월 베이징을 함락하여 약탈, 방화하고 베이징 조약을 맺었다.

 

1860년 맺어진 베이징조약에서 외국공사의 베이징 주재, 텐진을 포함한 11개 항 개항, 내지에서의 여행, 통상, 포교의 자유, 양쯔 강 및 통상항으로의 군함 진입권, 중국인 노동자의 이민 허용, 주룽쓰(九龍司) 영국에 할양. 배상금 등이 규정되었다. 또 교회는 토지를 임대하거나 구매해 교회를 건립할 수 있는 토지 조매권(租買權)을 얻었다.

이 와중에서 차르 러시아는 1858년부터 1864년까지 중국 동북과 서북의 약 144만 평방킬로미터의 토지를 탈취했다.

외국군함의 내륙하천 진입권은 주권에 위협이 되었고, 외국상품에 대한 내지통관세의 인하는 경제에 타격을 입혔다. 두 차례의 전쟁 결과 맺은 조약들로 인해 중국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속의 종속적 시장으로 편입되었다. 중국인들은 이를 반식민지적인 처지라고 인식했다.

 

3. 제1.2차 아편전쟁의 영향

제1.2차 중영전쟁은 불평등조약 체제의 확립과 이의 확대 심화 과정이었다. 우선 정치적으로 보면 홍콩 주룽스가 영국에. 흑룡강 유역의 방대한 영토가 러시아에 할양되었을 뿐 아니라 공사관, 조계, 외국인 세무사 제도가 생겨났다.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개항장이 도합 16개로 확대되고 내지 여행권, 내해 항해권이 보장되면서 중국은 서양의 상품시장 및 원료시장화 되었다. 특히 외국상품에 대한 내지 통관세의 경감은 중국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아편무역과 쿨리 무역의 합법화는 제국주의적 침략의 무자비함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사상적, 문화적 측면에서도 외국선교사가 자유로이 교회를 설립하고 포교할 수 있게 되어, 이후 제국주의의 중국침략에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면서 중국인의 반 그리스도교 운동을 유발했다. 또한 군사적으로는 외국 군함이 연해 및 내해에 까지 항행할 수 있게 되어 중국의 주권에 큰 위협을 가져왔다.

2차례의 전쟁으로 청의 쇠락은 급속화 되었고 전쟁배상금 지불을 위한 과도한 세금 징수로 반란이 들끓게 되었으며 주화파가 집권하여 총리아문을 중심으로 양무운동이라는 개혁을 시도하게 되었다.

 

Ⅲ .아편전쟁에 대한 소견

 

1.북방민족과의 투쟁의 역사.

중국의 역사는 고립되고 독특한 문화를 가진, 험준한 산맥과 사막, 대양으로 외부와의 소통이 안 되는 상태에서 수천 년을 이어왔다. 이런 지리적 고립이 외부와의 단절을 낳고 주변국들을 오랑캐라고 멸시하며 중화라는 자기중심적이고 우월적인 위치에 안주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국의 역사는 북방민족과의 투쟁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흉노족은 춘추전국시대부터 한 대 이후까지 중국을 괴롭혀 왔으며, 한나라 헌제는 이들 흉노족을 달래려고 왕소군이라는 절세미인을 흉노의 선우에게 바치기도 했다. 이어 오호십국, 宋대의 거란족과 여진족에 이어 몽골족이 원나라를 세웠고, 다시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워 267년간이나 한족을 통치하였다.

중국의 역사서에는 이민족이 한족을 통치한 시기에 대해 반감을 표시하지 않고 한족왕조의 역사와 똑같이 기술하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만주족 청나라는 초기의 안정된 통치기반을 닦은 강희제에 이어, 옹정제 건륭제까지 3대에 걸친 130년간의 태평성대가 이어졌다. 건륭시기에 폭발적 인구증가와, 1976년 대규모 농민 반란이 10년간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부터 국력이 쇠잔해지기 시작했다. 이 쇠잔해졌다는 표현은 서구의 비약적 발전에 대한 상대적인 관점이다. 16세기 이후 서구의 자본주의의 태동은 상품경제를 발전시켜 국부를 쌓게 하였으며 판로 확대와 원료 확보를 위해 아프리카 인도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그 세력을 중국에 뻗쳤다.

 

2.내부의 문제

태평성대는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후 침체기를 맞은 청은 그때까지도 강력한 중앙집권과 봉건적체제로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다. 1780년대 광둥무역체제에서 광둥 한 개의 항구를 무역항으로 개방했을 때 중국에는 개방과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일 좋은 기회가 있었다,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접국을 존중하지 않고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그들의 자만과 세계정세를 볼 수 있는 안목의 부족으로 그만 쇠퇴의 길을 걷고야 말았던 것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천하게 보는 사회인식 또한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뿌리 깊은 종법적 가족제도와 봉건제국의 속성, 그리고 봉건 예교에 젖은 사회문화 환경에서 농경은 체제를 안정시키는데 안정적일 수밖에 없다.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백성을 농토에 붙잡아 둘 수 있으며 필요할 때 언제든지 전쟁과 토목 등 사역에 동원할 수 있는 농민 계층을 선호했다.

 

반대로 더 나은 상품을 찾아 이동을 반복해야 하는 상인의 특징은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경계의 대상이며 따라서 상업을 억제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重農抑商 사상은 서구 열강의 상인들이 전 세계를 누비며 부를 축적하여 왕권과 종교계 그리고 귀족들을 몰아내고 부르주아 혁명을 완성시킨 것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고여 있는 물은 썩게 마련이듯, 한 곳에 머물 수밖에 없는 농경문화의 중국이 침체일로를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청은 이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나라이다. 이민족이 지배할 때 가장 두려워하는 바가 피지배민족의 봉기이다. 언제 어느 때 봉기가 일어날 줄 모르는 태생적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군사력을 기른다고 할 때, 그 기저를 이루는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한민족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그들을 잘 훈련시켜 국방을 튼튼히 지키는 것은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외세를 밀어내고 독립하겠다는 잠재된 민족의식이 있음을 잘 알고 있는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고 위험스러울 수밖에 없다. 언제 총부리를 돌려 잡을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국방증강의 딜레마가 있었던 것이다.

 

3.아편전쟁은 부도덕한가?

일찍이 봉건제도를 탈피하고 상품경제를 발달시킨 서구나라들의 자본축적은 그들 간의 해적질과, 당시로서는 힘없는 약소국들인 아프리카, 인도, 아메리카 대륙, 동남아시아에 대한 식민과 약탈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 노예의 대규모 매매,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멸종시키고, 남미의 토착민을 학살하고 잉카제국의 초토화시킨 서구열강은 과연 인도적인가? 여기에서 논하고 있는 아편전쟁은 과연 어떤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한 나라의 백성을 마약으로 마비시킨, 또 그도 부족하여 강력한 대포와 예리한 총칼로 중국대륙을 피로 물들게 한 아편 전쟁은 제국주의의 만행이며 부도덕의 극치가 아닌가?

역사는 승자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해적질과 살인과 약탈, 그리고 마약으로 상대국을 황폐하게 만들어 부를 쌓은 오만과 부도덕의 역사도 승자의 몫으로 써내야한다.

 

4.역사의 순환

중국의 고전인 나관중의 삼국지 첫머리는 ‘천하대세란 나누면 반드시 합해지고, 합하면 반드시 나뉘어지는 법이다.’ 라고 시작된다. 춘추전국시대, 삼국시대, 위진남북조, 오호십국의 시대에서 보듯 합해지며 나뉘어짐을 반복한다. 이처럼 도도한 역사의 흐름은 반복되는 것이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바가 있는 것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의 존속 기간은 우리나라의 그것에 비하여 짧다. 秦;약15년. 前漢,後漢;약 426년, 隨;약27년. 唐;약289년, 宋;약319년, 元;약89년, 明;약276년, 그리고 淸;267년의 왕조가 이를 말해준다. 기준에 따라 다소 달라질 수 있으나 이렇듯 길지 않은 왕조의 존속기간은 무얼 말해주는가? 역사적 사실이 보여주듯 역사는 순환 반복된다는 것이 타당성을 갖는다.

 

.결론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목적은 그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조상의 뿌리를 확인하고 선조들의 삶과 발자취를 되살려, 이를 거울삼아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말고 다가오는 미래를 대비하자는데 목적이 있다.

해가 지지 않는다는 대영제국도 이미 빛이 쇠하였고, 남부 유럽의 여러 나라들도 이제 세계의 근심거리로 전락하고 있다. 패전을 딛고 욱일승천 한다던 일본도, 그리고 세계유일의 패권국이라고 자부하던 미국도 이제 그 융성의 시대가 지나고 있는 것이다.

아편전쟁의 치욕을 견디고 이후 많은 진통과 변화를 겪은 중국이 이제 다시금 역사의 전면에 서게 됨은 역사가 순환됨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Ⅴ.참고

인터넷 : 다음 지식, 위키백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