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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지역관념

甘冥堂 2012. 2. 14. 17:33

 

 중국인의 지역관념

 

개인이 자기의 본향 본토에 있을 때에는 결코 향토관념이 있을 수 없고 외지인과 접촉한 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아와 우리집단이라는 감정이 있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자기에 대한 이해는 항상 다른 사람과 상대할 때에 비로소 분명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남자와 남자 중국인과 중국인의 구분은 왕왕 남자와 여자 중국인과 외국인의 구분이 훨씬 분명한 것만 같지 못하다.

향토 관념이 나타나는 까닭은 다른 향토 사람들이 피차간에 상대할 때에 비로소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념이 나아가 지역 관념으로 변하게 된다.

 

사람들이 자원쟁탈이 생길 때 모두 어떤 이유를 찾아서 자기의 행위를 지지하려고 하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이렇게 하는 것이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느끼게 만들어 준다.

특히 냉정하게 각자의 시비를 분명히 구분하기 쉽지 않을 때 매우 쉽게 상대방에게 거의 유일한 죄명을 찾아주는데 그것은 그가 외지인이라는 것이고 본토박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소식이 폐쇄되고 조사제도가 완비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고향을 떠나서 외지에 도착했을 때 혹은 외지인과 교류를 해 본적이 있는 사람들은 이들의 경험은 바로 지식이고 그들의 말은 다소간 얼마간의 권위가 있게 마련이며 현지인(고향 사람)에게 참고할 가치가 있다.

 

또 일반인들은 외부에 있는 잘 알지 못하는 사물에 대하여 본래 일종의 어떤 두려워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다른 사람의 경험과 지식에 의지하게 마련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외지인에게 모욕을 받았다면, 그의 불행한 경험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동정의 마음을 얻게 하고 외지인에 대해서는 모두 원수같이 보게끔 변화시키고, 단지 본지인이 아니면 배척을 가하는 것이다.

 

지역관념은 본래 앞에서 말한 바의 결과이며 만약 자세히 분석하면 이 결과는 또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되며 이런 관념은 사람과 사람의 접촉이해를 저해하고 동시에 생존경쟁의 상황을 악화시킨다.

더욱이 다른 사람이 얻은 바의고통스러운 교훈으로 말미암아 어려서부터 외지인에 대하여 열악한 인상이 있게 되어 알기 이전에 이미 선입견 위주의 편견과 오해가 생겨났다.

외지인은 모두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를 속일 수 있으며 그들과 왕래하는 것은 속임을 당할 수 있으니. 자기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하여는 그들과 끝까지 싸워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결과와 원인이 거꾸로 되는 상황에서는 벗어나기 어려운 악순환이 생기게 되고 사람과 사람사이에 오해가 더욱 깊어지고 거리가 더욱 요원하게 된다.

 

지역감정의 영향은 매우 크다. 그중 하나는 시비로 하여금 절대의 기준이 없게 만들고 단지 하나의 표준만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으며 이것은 말은 누가 한 말인가를 보아야하고, 일은 누가 한 일인가를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만약 나와 관계가 가깝다면 잘못을 했더라도 그를 용서할 방법을 생각해 내지만 만약 나와 같은 부류가 아니면 배척당하는 열로 들어가는 것을 면할 수 없다.

이러한 편견의 가장 해로운 점은 소집단의 관념으로 하여금 대집단의 의식을 약화시키게 하는데 있다.

중국은 근대이전에 가족과 고향만을 중시 여겼다. (그래서) 국가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대집단 감정으로 하여금 줄곧 발전할 수 없었다.

 

근대 중국의 최초의 혁명조직인 흥중회는 1894년 성립되었다. 이후 화흥회 광복회가 연이어 설립되었다.

만약 우리가 깊이 있게 토론해본다면, 이 몇몇 단체의 공통되는 결점은 그들 조직 구성인과 활동범위는 대부분 어떤 성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광동인은 중흥회를 만들었고 화흥회는 호남인을 위주로, 광복회는 대부분 절강인으로 조직되었다.

1905년 일본에서 설립된 동맹회는 몇 개 지역적 성격의 조직을 합병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대표하는 바의 뜻은 중국인이 마침내 지역관념의 큰 틈을 뛰어넘어 단결과 합작을 시작한 것이다.

 

진정으로 대다수 중국인으로 하여금 민족의식과 국가 관념을 있게 만든 것은 대일 항전 이후까지 기다려야했다.

9.18 사변은 동북3성이 일본의 수중으로 떨어졌으나 많은 사람들은 단지 동북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그들의 고향을 잃었다고만 생각했으며 그러나 중국이 큰 조각의 영토를 잃었다는 것은 몰랐다.

7.7사변 이후에 일본인이 상해를 침략했는데 내지에(내륙지방)사는 사람들은 상해 부근 사람들이 불행을 만났다고 동정하였으나 중국이 현재 적국과 전쟁 중이라는 것은  느끼지 못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심각한 현상을 나타내는데 이는 우리의 국가 관념이 이처럼 박약하다는 것이다.

수만명의(숫자를 만으로써 세는) 중국인들이 대대로 살던 고향을 떠나 대 후방으로 밀려 가는 때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단지 하나의 물건만이 그들로 하여금 계속하여 살아가게 만들 수 있으며. 그것은 바로 생과 사를 함께 하고 화복이 한 몸인 국가다 라는 것을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이후부터 민족의식과 국가관념은 비로소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졌다.

항전이라는 이 큰 재난에서 군과 민의 사상자는 무수했으나, 그러나 오히려 애국심을 일으키고 뿌리깊은 지역관념을 희석시켰다. (중국어 원문:한광수.한창수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