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莊子(기원전370~290년)는
吾生也有涯,而知也無涯. 以有涯隨無涯 殆已! 우리들의 생명에는 한계가 있으나, 지식은 한이 없다. 유한한 삶을 가지고 무한한 지식을 추구하니, 위태로울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장자보다 한 세기 후기의 筍子 (기원전 298~238년경)는
그의 권학문 첫머리에. 學不可以已. 학문을 그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학문이란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다.(學至乎 没而後止也)라고 하여 관 뚜껑이 덮힐 때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고 후학들을 독려했다.
우린 어쩌라고? 한 분은 공부를 죽을 때까지 하라 하고, 다른 한 분은 적당히 하라 하니, 어느 분의 말씀을 따라야 하나?
한창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이런 정도의 얘기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다. 가뜩이나 공부하기 싫은 판에, 장자나 도가를 들먹이면서 책읽기를 게을리하면 절대 안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반백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얘기다.
책을 손 놓은지 수십년이 지난 사람들에게는 무슨 한가한 소리를 새삼스레 하느냐 하겠지만, 뜻이 있어 공부를 계속할까 말까를 망설이는 사람들에게는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뒤늦게 공부는 해서 뭐해. 그냥 쉬엄쉬엄 소일이나 하지 뭐. 하는 분들이 대다수다. 그러나 주변에는 머리에 쥐가나도록 책과 씨름 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쥐가 날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하루에 두어 시간 책 읽기를 계속하는 것이 하릴없이 소일하는 것 보다 낫지 않겠나 생각한다.
소위 치매예방 차원에서도 그렇고, 잠 안 오는 밤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느니 골 때리는 책 두어줄 읽다가 스르르 잠이 든다면 그렇게 좋은 수면제가 따로 없다. 친구들과 얘기 거리를 만들기에도 좋고, 마눌과 눈 마주치며 아웅다웅하는 것 보다 생산적이다.
무엇보다 집안의 자식들에게도 그렇다. 직장이나 돈 번답시고 매일 밤 늦게 술에 쩔어 귀가하는 자식에게도 어버지 되는 이가 늦도록 책상에 앉아 책이라도 보고 있으면 뭔가는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꼭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이왕이면 그런 반듯한 모습을 보여주는게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순자는 또 이르기를 옛날의 학자들은 자기자신을 위해 학문을 하였지만, 지금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학문을 한다고 소인들의정곡을 콕 찔렀다. 우리나라와 같은 학벌 지상주의의 세태에 딱 맞는 말이다. 대학을 나와도 한문으로 부모님 함자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공부는 해서 무엇에 쓰는가? 연필 대신 주판이나 망치를 들어야 마땅한 사람들도 모두 대학을 간다. 소위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도 젊었을 때나 하는 말이지 望七의 나이에는 부질없는 소리다. 남에게 보일 것은 무엇이며, 자신을 아름답게하려는 것은 또 무었인가?
옛날 노인네 말씀에 공부라는 것은 "신문이나 읽을 정도면 되지." 했는데 신문 읽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촌노들의 단순함이다.
지금의 복잡한 세상에 신문에 실리는 기사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복잡한 전문용어에 어렵기만한 과학, 경제 지식에 이르기까지 그런걸 모두 이해하려면 아마 석 박사가 되어도 안 될 것만 같다. 그러니 신문 한장 읽는 것도 엄청난 지식이 필요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세상 물정을 알면 나아가고 모르면 퇴보하는 것이다. 따라서 퇴보하지 않으려면 계속 책을 읽어야하는 것이다.
꼭 그것만이 이유가 될 수야 없겠지만...
자기 만족을 위해서라도 學不可以已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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