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항은 마침표가 없다.
1. 시집 박성우 시인의 <자두나무 정류장>을 선택하게 된 동기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대강의 서평을 훑어보고, 농촌 출신인 나의 이력에 걸 맞는 시집을 발견했다. 시집의 이름이 자두나무 정류장이라 했다. 봄마다 몇 주의 자두나무 묘목을 사다 밭둑에 심는다. 그러나 관리가 부실하여 해마다 심어도 해마다 죽는다. 강릉 오죽헌 뜰에 수백 년 된 자두나무가 엉켜있는 것을 보고 자두나무도 저렇게 오래 사는구나하고 새삼 알게 되었다. 고목이라 하면 은행나무나 소나무 느티나무 정도 만 생각했었는데 과실나무가 그리 오래, 그리고 그렇게 멋있게 늙어 구부러진 것을 보고 새삼 놀랐다.
자두의 맛은 무슨 맛인가? 열매 자체도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 시기만 하다. 개량종이야 좀 다르겠지만 어릴 때 먹어본 자두는 그저 시기만 한, 과일 중에 제일 하질인 것으로 기억한다. 마당가에 심은 자두나무는 그 꽃도 아름답거나 향기롭지도 않다. 같은 시기에 피는 살구나무나 배나무 꽃에 비할 바 아니다. 다만 그늘을 만들어 주어 그 밑에 앉아 놀곤 했었다.
그런 자두나무를 제목으로 삼은 시집이 있으니 한 눈에 호감이 아니 갈 수 없었다. 나와 같은 시골사람이 이 시를 지었겠구나. 자두나무, 그리고 자두나무 밑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시인의 소박한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나의 고향. 시골 들녘에 아무렇게나 서 있는 그런 나무. 그렇다고 함부로 대하지도 않는 자두나무. 이 나무를 제목으로 하였으니 미루어 짐작컨대 소박하고 투박스런 그러나 섬세한 시인의 글이겠거니 하여 자연스레 손이 간 것이다. 그런 연유로 자두나무 정류장을 선택했다.
2. 좋은 작품 10편 선정 및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 이유.
박성우의 시집에서 좋은 시 10편을 고르는 것도 만만치가 않다.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기준에 어떤 시를 골라야 제대로 고른 것인지 종잡을 수 없다. 내가 읽기에 느낌이 좋고 감상할 만하다고 여겨지는 시를 나름대로 기준을 정해 골랐다.
우선 토속적이고 농촌의 정이 살아 있는 시. 내 어릴 때의 기억과 어슴스레 비슷한 시, 고향이 그리워지고 읽으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시를 기준으로 했다. 완전히 주관적 기준이다. 좋은 작품에 해당되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다.
1)바닥
이 작품에서 이미지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신체의 일부분인 손바닥 발바닥 혓바닥이다. 바닥이 의미하는 것은 맨 아래, 저 하층에 있는 보잘것없는 대상일 수도 있다. 바닥은 그 밑으로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한계지점이다. 사랑한다면 바닥으로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시인은 강조하려는 것이다.
또한 손바닥 발바닥 혓바닥은 사람의 건강상태를 나타낸다. 건강은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포함된다. 그 빛이 깨끗하고 발그레하고 적당히 따뜻해야 건강하다. 이 시는 건강한 애욕을 표현하고픈 시인의 마음을 에둘러 빌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과의 만남도 아무나 무턱대고 손을 잡을 리가 없다. 하물며 혓바닥이나 발바닥을 마주칠 일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랑이 싹트면 그 사랑이 손에서 시작하여 혓바닥으로 그리고 더할 수 없는 사랑에 이르면 발바닥 까지도 핥는다. 바닥은 비유지만 그것은 지극한 사랑의 잠재적 상징의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
2)어떤 품앗이
00양반이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몇날 며칠 자줬다. 첫째 연에서 부터 셋째 연까지 똑같은 반복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자식들은 후다닥 왔다가 후다닥 가버린다. 이 작품에 제시된 것은 표면적인 것. 즉 죽은 이에 대하여 몇날 며칠 자준 것과 자식들 후다닥 가버린 것과는 어떤 공통점도 없다. 시인은 이러한 이질적으로 보이는 두 대상들은 나란히 제시해 놓고 있을 뿐이다. 왜 이질적으로만 보이는 두 대상들을 나란히 제시해 놓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암시받게 된다. 비유의 효과가 자연스레 전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3)자두나무 정류장
정거장 곁에 자두나무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자두나무들 사이에 정류장이 있는 것인가. 그 자두나무가 이정표가 되기도 하고 요샛말로 랜드 마크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만남과 이별은 정류장에서 시작되고 정류장에서 끝마친다. 그 정류장에 달빛이 내린 날 만나기도 하고 눈비가 내리는 날 헤어지기도 한다. 정류장은 그래서 기쁨의 만남이거나 혹은 눈물을 머금는 곳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기다려지는 곳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비, 눈, 달, 별이 내리고, 가고, 마중한다. 이들은 끊임없이 오고 가는 세월을 상징한다. 상징은 무엇인가를 표시하고 또 이원적이다. 비, 눈, 달, 별이 내리는 정류장은 아마도 온다는 기별도 없이 올지도 모를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인의 희망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4)목단 꽃 이불
시인은 목단꽃 이불을 빌어 엄니 아부지를 추억한다. 시인 자신이 태어난 원천을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목단 꽃 그리고 목단 꽃 이불은 그 생명의 신선감이라든가 창조적인 면은 없고 아주 독특할 것도 없는 상징이다. 순전히 개인적 상징일 뿐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목단꽃 이불은 가정의 화목과 다자녀를 낳은 원천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그리하여 새로운 의미 부여가 됨으로써 재문맥화 되어 상징의 이미지가 새롭게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5)별말 없이
이 작품의 주어는 윗집 할매다. 작품 거의가 이 주어가 한 행동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이 할매의 행동의 함축적 의미는 순수함 그 자체다. 집 비울 때가 더 많은 나와 윗집 할매와의 감정이입과 이출이 ‘별말 없이’ 이루어진 은유적 표현의 시라 할 수 있다.
할매의 상식으로는 채소가 시들하고 자라지 않으면 농약치고 비료를 주는 게 상식이다. 누렇게 타들어가는 채소를 그냥 놔두고 볼 수만 없는 것이 할머니의 마음이다. 여기에 무농약이니 무공해니 해 봐야 할머니에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무심한 것 같은 할머니의 마음에는 만물에 대한 애정이 녹아있다. 농심은 천심이라던가, 비록 할머니의 부질없는 보살핌, 비료주기로 인하여 채소 잎이 누렇게 말라버렸어도 그 마음을 익히 아는 시인은 아무 말 없이 콩기름 한통으로 그 마음을 대신한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서정시다.
6)쓸쓸한 접촉
역설은 먼저 어떤 일이 생기고 그리고 다음 단계에서 그것이 수긍으로 돌변하게 만든다. 교통사고도 시의 재료가 되는가. 접촉사고였으니 망정이지 인사 사고였다면 이것도 과연 시가 될 런지 모르겠다. 이러한 사고가 어려움을 겪고 있던 나에게 보상금이라는 반대급부를 주어 장모님 댁을 찾아간 나의 체면을 세워준다. 이를 형식적으로 집약시켜 적절한 모순어법을 만들기는 힘들지만 ‘사고가 오히려 체면을 세워준’ 아이러니를 볼 수 있다.
이 시를 읽으며 눈물이 핑 도는 것은 무엇인가. <허삼관매혈기>에서 보듯 피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정도는 아니지만, 월급조차 제때 못 받는 어려울 때에 교통사고 보상비를 받으니, 그것을 다행으로, 아니 행운으로 여기며 어린 딸을 받으러 처갓집을 찾는 모습이 마냥 안쓰럽다.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시인의 시어들이 너무 담담하여 애처롭기까지 하다.
7)참깨 차비
시의 언어는 산문의 언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 작품은 평범한 산문의 언어를 사용했다. 뚜렷이 느낄 수 있는 운율감도 없다. 시와 산문의 차이점에 대하여 발레리는 행진과 무용에 비유했다. 산문은 행진으로 정해진 목표 지점까지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무용은 무용수가 중간과정에서 어떠한 몸놀림과 표정을 지었는가가 주요한 과정이라 했다. 따라서 산문 같은 이 작품은 할머니가 참깨 한 봉지를 들고 오신 것만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한 것이다.
어느 시절 이야기인가. 백 년 전쯤의 어느 시골 이야기인 듯. 시인은 먼 옛날 대문 열어놓고 법 없이도 살던 인심 좋던 시절로 독자를 데려간다. 할머니의 티 없이 맑은 마음을 보는듯하고 신세진 것은 어떻게 해서든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고집스런 촌부의 마음이 묻어난다. 우리 집 알아내는데 일 년이 넘게 걸렸다는 그 할머니의 보은의 집념을 참깨 한 봉지에 비길 것인가?
8)그물
이 시의 끝부분에 ‘곧 그물은 치지 않아도 되었다’는 무얼 의미하는가? 시는 일반 문장과 달라서 항상 함축적 의미를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며, 시의 의미가 애매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했다. 그물을 더 치지 않아도 되었다면, 아내가 붕어를 고아먹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회복되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더 이상 먹일 필요도 없이 아예 죽었다는 것인지 애매하다. 아니면 시인이 청양양반 아내가 꼭 나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정적으로 ‘~되었다’ 고 끝을 맺었으니 시인의 바램하고는 거리가 멀다. 지시대상을 명확하게 가리키지 않는 이러한 애매함은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9)풀잡기
이 시는 ‘몬다’고 문장을 맺는다. 풀이란 식물이 움직이는 동물도 아닌데 살살 몰고, 싹싹 몬다고 했다. 그러다가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낮잠이나 몬다. 풀이나 낮잠을 의인화하여 몬다고 한 것은, 하기는 해야 하는데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 즐거운 마음으로 풀도 잡고 낮잠도 잔다는 것이다. ‘살살살살’, ‘싹싹싹싹’의 의성어는 양성모음으로 이루어져 밝고, 경쾌하고, 홀가분한 느낌을 준다. 한여름에 풀 잡는 일이 온 몸이 쑤실 정도로 힘든 일이지만 시인은 그저 즐겁다. 시인의 자유분방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풀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다만 잡초가 곡식보다 생명력이 끈질긴 것이 농부를 힘들게 하지만, 그러나 풀이 없는 논밭은 이미 죽은 땅. 공존공생을 해야만 한다. 그 풀을 잡는다고? 그것은 자연에 대한 일종의 만용이다. 풀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곡식이나 풀이나 그 근본은 똑같은 것이다. 이를 대하는 인간의 마음에 문제가 있을 뿐이다. 풀을 잡기는커녕 되레 풀에게 몰려 결코 풀을 이길 수 없음을 시인은 체득한 것이다.
10)홍원항
마침표는 한 문장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쯤에서 숨 한번 고르라는 쉼표의 뜻보다 사뭇 명령적이다. 홍원항에는 마침표가 없다. 다만 쉼표만 있을 뿐. 늙은 작부의 사연 많은 삶이 지금도 계속되는 것이다. 마침표를 찍는 순간 그 작부는 일생을 다한다. 시가 끝났어도 마침표가 없다. 쉼표와 마침표 등 작품에 쓰인 구두점은 우리의 읽기를 쉬게 하거나 멈추게 하고 그것으로 감정의 물결을 조정한다. 그리하여 직접적으로는 문장과 문체의 호흡을 통제, 관리하고 나아가 작품들의 리듬에 결정적 영향도 끼친다. 그러나 이 시에는 마침표가 없다. 환상적이면서도 애틋한 세계를 그려내려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마침표를 없앤 것은 거친 가락으로 거친 인생을 살고 있는 현존의 인물을 노래한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3. 감상
이 시집의 시들은 투박하지만 순수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농촌을 몸으로 체험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시어들이다. 책상머리에 앉아 막연한 상상속의 글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고, 아무 가식 없는 농부의 마음을 그대로 옮긴 것이기에 감동이 인다. 어떤 때는 쓸쓸하고 애잔하고 시큰하고 먹먹하다. 시어가 평범하고 간단하다. 요즈음의 시란 소위 ‘낯설게 하기’를 위함인지, 무엇을 뜻하는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물론 필자의 무지의 소치이나, 시란 누구나 쉽게 읽고 공감할 수 있어야하는 것이 마땅한 게 아닌가? 시인이 개인적인 세계 속에서만 머물면서 남이 이해하지 못하는 곡조를 읊조린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다. 시를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좋다고 여기도록 쓰는 것은 어렵지만 자신만이 알 수 있도록 시를 쓰는 것은 쉽다. 이런 점에서 박성우 시인의 시는 누구에게나 공감을 주는 시이기에 평가받아야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성우 시인의 시는 우리가 별스러이 생각지 않는 일상적인 것. 구태여 무슨 설명이 필요치 않은 생활의 일부분도 시어가 되어, 누가 읽어도 쉽고 편안하게 이해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시가 된다.
시골 할머니들의 전통적이고 꾸밈없는 풍속과 진솔한 이야기인 <어떤 품앗이>. <별말 없이>, <참깨 차비>는 얼마나 따뜻하고 인정이 넘치는가. 초상이 나면 누가 오라 하지 않아도 몇날 며칠 밤을 함께 지새우는 <어떤 품앗이>에는 시골 정담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더불어 사는 세상에 홀로 독불장군은 없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애환은 그의 슬픔이 내 슬픔이고 내 슬픔도 그들과 함께 하게끔 되어있다. 장성하여 뿔뿔이 객지에 흩어져 사는 자식들이야 그저 의무감에 오갈뿐, 가슴으로 함께하기엔 너무 세상이 바뀌었다. 복잡하고 분주한 현대 사회에서 그걸 기대하는 것은 사치다. 자식의 입장에서 어머니의 이런 품앗이를 아무것도 아닌 양 ‘한천댁은 울 어매다’하는 어조가 사뭇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무심한 듯한 웃집 할머니가 내 밭 채소가 시들하다고 비료를 지나치게 뿌려 주시어 오히려 채소를 못 쓰게 만들지만 그러면서도 별말 없이 내 집을 <별말 없이>보살펴 준다. 발을 물에 데어 힘들어하던 할머니를 병원에 모셔다 드렸을 뿐인데, 그것을 잊지 않고 그 신세진 것을 갚으려고 일 년여를 수소문하여 참깨 한 봉지를 내미는 할머니의 모습 <참깨 차비>은 차라리 시공간을 거슬러 삶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사람이 베풀면 반드시 보답해야한다는. 그리고 그러한 굴레 같은 삶이 계속될 것만 같은 시골의 농경문화가 새삼 그리워지기도 한다.
흔히 문학은 카타르시스의 기능을 한다고 한다. 엄니 아부지가 덮고 자던 <목단 꽃 이불>, 그 이불을 뒤집어쓰며 부모님의 따뜻함을 느낀다. 목단은 부귀를 뜻하기도 하고 양귀비가 사랑한 꽃이기도 하다. 시집갈 처자는 누구나 목단꽃 무늬의 이불 한 채를 준비해간다. 그 이불을 덮고 첫날밤을 지내고 그 이불속에서 아이들을 만든다. 새색시 때 해 가지고 간 이 이불은 좀처럼 버리지 못한다.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아련한 추억과 젊음과 풋풋함과 그리고 아이들과 그 속에서 살을 비빈 곳이니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마침 월급을 몇 달치를 못 받아 처갓집에 갈일이 태산 같은데 행인지 불행인지 <쓸쓸한 접촉>사고를 당하여 그 피해보상금으로 아기를 데려오는 데에 이르러서는 그만 가슴이 먹먹하다. 청암양반이 한밤중에 불법 <그물>로 고기잡이를 하는 이유가 밥술도 뜨지 못하는 병든 아내에게 고아줄 잉어며 붕어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알게 된 시인도 같이 불법어로를 도와주고 싶어 하는데 이르러서는 또 한 번 감동이 밀려온다.
왜 흥원항 시에는 마침표가 없는가? 홍원항은 가을철 전어 잡이 항구로 유명한 곳이다. 이 항구를 늙은 작부에 비유했다. 항구에는 술집이 있기 마련이니, 그곳 어디쯤에서 실제 살고 있을지도 모를 늙은 작부일 수도 있다. 세상 모진풍파 다 겪은 늙은 작부를 통해 시인은 인생의 무상함과 고단함을 말하려는지도 모른다.
‘한술 뜨고 어여 가’ 어쩌란 말인가? 남들 눈에 남세스럽니 얼른 가시게. 그리고 다음에 또 와 주시게. 그렇게 緣맺음을 계속하고픈 작부의 마음인가. 선창가에 버려진 장화가 아무렇게나 신는 신발보다 오히려 쉽게 삭는다는 시인의 비유가 적절하다. 누가 이 작부를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아무렇게나 막 신은들 뭐 어떻단 말인가? 이 작부도 젊고 잘 나가던 시절, 금비녀 옥비녀 박자 치다 부서뜨리고, 진홍빛 붉은 치마 술 엎질러 더럽힌 적이 한두 번이었겠는가?
삶이 비록 그렇더라도 그건 끝이 아니야. 계속 이어져야만 하는 거야. 시집의 마지막 언저리를 이 작품으로 장식한 것은 ‘마침표 없이’ 영원히 이야기가 계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이 시집이 끝나면 다음 시집이. 또 그 다음 시집이 계속 이어지리라. 시인의 희망과 의지를 말하려는지도 모른다. 끝.
참고문헌. 자두나무 정류장 박성우 지음. 2013. 3. 4. (주)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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