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사 속에서의 사랑. 죽음과 여성의식을 분석하되, 단편『경희』와 장편『사랑의 향기』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경희, 진채선의 봉건적 인습과 투쟁하는 ‘존재지향의 삶의 자세’에 대한 비교
Ⅰ. 서론
Ⅱ. 본론
1.근대 이전 여성들의 존재 위치
2.단편 『경희』의 주인공 경희의 존재지향의 삶의 자세에 대하여
3.장편『사랑의 향기』의 진채선의 삶의 자세에 대하여
4.이들의 삶의 자세에 대한 비교
Ⅲ. 결론
Ⅳ. 참고문헌
Ⅰ. 서론
한국문학사 속에서의 사랑 죽음과 여성의식을 분석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도 벅찬 일이다. 따라서 교재 범위 내에 있는 작품들을 기본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여기서는 그중 교재에 있는 작품『경희』와 박태상 교수의 역저인 장편『사람의 향기』에서 나타나는 주인공 진채선의 봉건적 사랑과 여성의식을 중심으로 그 존재지향의 삶의 자세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Ⅱ.본론
1.한국문학사 속에서 여성들의 존재 위치
1.1. 고대부터 개화기
고대에는 여성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씨족사회에서는 제천행사의 주재자가 여성이었다. 그것은 여자의 출산 능력을 대자연만 할 수 있는 생산능력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모든 씨족원은 여성의 신비하고 영험한 능력에 대해 경와감과 존경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상당히 높았으며, 가계 계승도 모계중심의 전통이 형성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농업중심사회가 형성되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힘의 질서에 의한 사회의 재편이 이루어지게 됨에 따라 점차 여성은 약간의 농사일을 제외하고는 출산, 가정의 대소사를 전담하는 방향으로 행동반경이 좁아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부족국가 성립시기부터는 가부장적 제도가 확고하게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가부장권이 확립되면서 점차 여성의 지위는 남성에게 예속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후 왕권이 부자상속이 강화된 이후부터 가계의 부계 계승이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신라 고려시대에도 여계상속의 풍속은 지켜지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남존여비적 남녀질서관이 강화되었고 주자학을 건국이념으로 철저하게 보급함에 따라 모든 인간관계를 상하주종의 종속이론에 얽매이게 하였다. 가족제도에서도 부계계승과 가부장권을 강화하게 된 것이다.
남녀유별. 남녀칠세부동석, 삼종지도, 여필종부, 부창부수 등으로 여자를 집안에만 묶어두려 했다. 조선조 순조 때 조선교회사 서론에 당대 여성들의 비하된 사회적 지위를 알 수 있다. 여자는 남자의 반려가 아니라 노예에 불과하고, 쾌락 또는 노동의 연장에 불과하며, 법률과 관습은 여자에게 아무런 권리도 부여하지 않고, 아무런 정신적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남편이나 부모의 지배 아래 있지 않는 여자는 누구나 주인 없는 동물처럼 먼저 차지하는 사람의 소유물이 된다.”는 것은 널리 인정되고...라고 쓰고 있다.
또한 조선조 여성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은 정절이었다. 그 예로 <芝峯類說> 人物部 節義條에 이러한 기록이 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어떤 부인이 계집종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섰다. 마침 강가에 이르러 배를 타야 되었는데, 혼자의 힘으로는 배에 오를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뱃사람이 그 부인의 손을 붙잡아 배에 태우려하였다. 이에 그 부인은 크게 통곡하면서 “내 손이 네 손에 더렵혀졌으니 어찌 살아 있겠느냐” 하고, 정절을 잃었다고 생각하여 곧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조선조 여성들의 존재위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조 양반 사대부계층들의 남존여비사상의 존중으로 인해 여성들의 존재위치는 상당히 미약했다.
둘째, 여성들에게 유교적 도덕관의 강요로 인해 순종과 정절이 일방적으로 요구되었으며, 그에 따라 혹독한 시집살이와 삼종지도, 칠거지악 등의 불균형적인 규범이 부여되었다.
셋째, 외출금지 등으로 규방에 갇혀 폐쇄적인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으므로, 자연 시야가 좁을 수밖에 없었다.
넷째, 부부관계가 애정에 바탕을 두지 않음에 따라 아내로서의 여성은 출산을 위한 도구나 남편의 욕구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으며 단순히 여성의 근신만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으로 인하여 조선조의 양반 사대부 집안의 여성들은 재가가 자유롭게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남성들은 정처와 사별 후 3년이 지나면 재취가 자유롭게 허용되어, 이러한 남성의 재취에 따른 가정 내의 모순과 불합리한 점이 폭로되고 고발된 것이 계모형 가정 소설이며, 일부다처제와 축첩제의 모순을 파헤친 사실적인 이야기가 쟁총형 소설인 것이다.
1.2.근대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국력이 쇠락해지고 봉건왕조를 튼튼히 받쳐주던 신분제도가 동요되기 시작한데다가, 봉건적 경제구조의 변동으로 농민층의 분화와 상공업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시장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제환경의 변화는 신분제의 동요를 가져왔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전통적인 가족질서를 지탱해 오던 가부장권이 흔들리게 되었고, 절대적인 권위로 지탱되고 있던 가문 중심의 가족의식이 약화되면서 개인주의적 가족의식이 차츰 대두되었다. 이러한 개인주의화의 추세는 부자간의 혼인관 차이나 가문의 안정보다 개인적 욕망을 우선시하는 소설 주인공의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개화기 이해조의 <자유종>에서는 오랫동안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예속적이며 억압적인 삶을 살아오다가 이러한 억압을 본질적으로 극복하고 참다운 자유를 찾기 위한 여성들의 의지는 남녀평등을 요구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여주인공의 입을 통해 자유 및 여성교육의 필요성, 신학문의 필요성, 적서 및 반상제도의 철폐 등을 주장하고 있다.
개화기 때의 이해조의 문학은 식민지 시대의 가족사 소설의 새로운 사실주의적 비법으로 발전하였으며 1980~1990년대의 여성문학으로 그 전통을 이어주고 있다.
2.단편 『경희』의 주인공 경희의 존재지향의 삶의 자세에 대하여
『경희』의 작가 나혜석(1896~1948)은 근대미술 사상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으며 여성 작가와 여성해방론자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나혜석은 경기도 수원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교육을 받았고, 도쿄에 있는 사립여자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녀는 3.1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르고 나왔다. 첫 남편과 이혼하고는 천도교지도자 최린을 만나 열애에 빠지게 되고, 1934년 여성 일방의 희생을 강요하는 봉건적 인습에 지배받는 남편과 조선사회를 고발하는 「이혼고백장」을 발표하고 최린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내면서 사회적으로 크게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나혜석은 사회적 냉대 속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병마에 시달리다가, 수덕사, 양로원 등을 거쳐 1948년 서울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신분을 숨긴 채 홀로 눈을 감았다.
1910년대 단편 소설 중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받는 『경희』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한 경희를 결혼시키려 하는 아버지 이철원은 벌써 적합한 혼처를 몇 군데나 놓친 상태에서, 이번 김 판사집 혼처를 놓치면 다시는 그런 문벌 있고 재산 있는 혼처를 얻을 수가 없을 것 같아 두말할 것도 없이 이번 혼인을 강제로라도 시킬 결심이다.
아버지가 “계집이라는 것은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시부모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면 그만 이니라” 할 때에 “그것은 옛날 말이에요. 지금은 계집애도 사람이라 해요, 사람인 이상에는 못 할 것이 없다고 해요. 사내와 같이 돈도 벌 수 있고, 사내와 같이 벼슬도 할 수 있어요. 사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세상이에요.”하며 감히 아버지에게 말대꾸를 하였다. “뭐 어쩌고 어째, 네까짓 계집애가 하긴 무얼 해. 일본 가서 하라는 공부는 아니 하고 귀한 돈 없애고 그까짓 엉뚱한 소리만 배워 가지고 왔어? 아버지는 펄펄 뛰었다.
경희는 아버지 앞에서 평생 처음으로 벌벌 떨며 대답했다. “아버지 顔子의 말씀에도 ‘一簞食一瓢飮에 樂亦在其中’이라는 말씀이 없습니까? 먹고만 살다 죽으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금수지요. 보리밥이라도 제 노력으로 제 밥을 제가 먹는 것이 사람인 줄 압니다. 조상이 벌어 놓은 밥 그것을 그대로 받은 남편의 그 밥을 또 그대로 얻어먹고 있는 것은 우리 집 개나 일반이지요.” 했다.
그녀는 또 생각하기를, 제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않고 조상의 재물을 받아 가지고 제가 만들기는 둘째 쳐놓고 받은 것도 쓸 줄 몰라 술이나 기생에게 쓸데없이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금수와 같이 배 두드리다가 죽는 부자들의 가정에는 별별 비참한 일이 많다. 거의 금수와 구별을 할 수도 없는 일이 많다. 그런 자는 사람의 가죽을 잠깐 빌려다가 쓴 것이지 조금도 사람이 아니다. 댑싸리 그늘 밑에 드러누우려 하여도 개가 비웃고 그 자리가 아깝다고 할 터이다.
다른 한편으로, 경희는 이제까지 비녀 쪽진 부인들을 보면 매우 불쌍히 생각하였다. ‘저것이 무엇을 알고 저렇게 어른이 되었나. 남편에게 대한 사랑도 모르고 기계같이 본능적으로만 저렇게 금수와 같이 살아가는 구나. 자식을 귀애하는 것은 밥이나 많이 먹이고 고기나 많이 먹일 줄만 알았지 좋은 학문을 가르친 줄은 모르는 구나 저것도 사람인가’하는 교만한 눈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웬일인지 오늘은 그 부인네들이 모두 장하게 보인다. 설거지하는 시월이 머리에도 비녀가 꽂힌 것이 저보다 훨씬 나은 것도 같아 보인다. ‘어떻게 저렇게들 쉽게 비녀로 쪽찌게 되었나? 어쩌면 저렇게 자식들을 많이 낳아 가지고 구순히들 잘 사누. 참 장하다.’
경희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한 길은 쌀이 곳간에 쌓이고 돈이 많고 귀염도 받고 사랑도 받고 밟기도 쉬운 황토요, 가기도 쉽고 찾기도 어렵지 않은 탄탄대로이다. 그러나 다른 한 길은 제 팔이 아프도록 보리방아를 찧어야 겨우 얻어먹게 되고 종일 땀을 흘리고 남의 일을 해 주어야 겨우 몇 푼 돈 이라도 얻어 보게 된다. 이르는 곳마다 천대뿐이오, 사랑의 맛은 꿈에도 맛보지 못할 터이다. 물도 언덕도 꼬부라진 길도 걸어야한다. 갈수록 험하고 찾기 어려운 길이다. 경희는 오늘 두 길 중 하나를 정해야 한다. 오늘 택한 이상에는 내일 바꿀 수 없다. 그녀는 결심한다.
나는 사람이다. 그리고 또 여자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그렇다. 사람이다.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험한 길을 찾지 않으면 누구더러 찾으라 하나! 산정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것도 사람이 할 것이다. 오냐, 이 팔은 무엇 하자는 팔이고 이 다리는 어디 쓰자는 다리냐? 하고는 푹 엎드리어 합장으로 기도를 올린다.
이 작품은 경희라는 신여성이 봉건적인 인습과 투쟁을 벌이는 과정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봉건적인 인습, 여성의 적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완고한 남성뿐만 아니라 봉건적 관념에 찌들은 여성들 속에도 있었다. 이 소설에서는 섣불리 남성들에게 비난과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여성에 대한 적대감과 오해. 의식에서 앞서가는 여성이 자친 범하기 쉬운 관념적 선진성을 비판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이 소설은 가부장 사회에서 갈등하는 여성의 문제를 고백체로 표현한 것으로 주로 여성 공간인 안방. 부엌. 뒷마루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소재로 인물의 인식변화에 초점을 맞춘 소설로서 교훈성이 있으나 노골적인 설교투가 아닌 간접적인 설득을 함으로써 계몽효과를 거두고 있다.
3.장편『사랑의 향기』의 진채선의 삶의 자세에 대하여
소설 『사랑의 향기』는 정조 임금부터 고종임금까지 5대에 걸친 100년의 역사를 이타적 사랑. 유희적 사랑. 소유적 사랑의 세 가지 종류의 사랑의 무늬로 살펴보는 이야기다. 이 시기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로 중세에서 숨 가쁘게 근대로 옮겨가는 역사적 징조와 상징들이 속살처럼 드러난다. 그중에서 신재효와 진채선을 중심으로 한 ‘연애상단’의 형성과정을 조명한 것으로 장시의 번창과 보부상과 중인아전계층 그리고 농민군들이 물고 물리는 싸움을 펼치던 시기에 ‘돈’이 최고라는 인식이 팽배해지던 초기 상업자본주의가 형성되던 때이자 신분제가 흔들리고 평등을 지향하는 물결이 출렁거리던 시기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진채선은 산속에서 밀도살을 하다가 관군에 쫓기던 사내 길홍과 세습무당인 가람 사이에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귀가 크고 목소리가 남달리 맑고 고와서 지나가던 남사당패가 소리꾼이 될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나이가 들어 그녀의 부모는 그를 순창현 관노청으로 보내 관기로서의 수업을 받게 하였다. 기생양성소 교방에서도 그녀의 인물 됨됨이와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일대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교방의 스승인 엄직은 그녀를 좀 더 크게 키우고자 당시 고창일대에서 이름이 알려진 신재효에게 보냈다. 신재효는 그녀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였다. 그녀를 지리산 구룡폭포, 선유폭포 등지로 보내 득음을 하게 하였고, 장시에 출연하여 이름을 더욱 날리게 조치를 하여주었다.
당시, 장시는 여러 가지 기능을 하고 있었다. 장시는 경제적인 공간이지만 국가적으로는 빈민구제의 중요한 역할을 떠맡고 있기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기능도 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공론화하는 광장이기도 했다. 단순히 상품만이 거래되고 교환되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지역과 지역, 정보와 정보가 연결되고 교환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인간관계의 망이 구축되는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신재효는 바로 이점에 착안하여, 장시를 백성들의 문화적 공간으로의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판소리나 민요, 잡가를 잘하는 기생들을 모아서 연예상단을 꾸리면 전통음악을 보존하는 기능도 하면서 새로운 부를 창조하려는 것이었다.
신재효는 누구인가? 그는 지방향리로 그의 부친은 경주인인 신광흡이다. 경주인은 각 지역의 중추적인 상인들로 각 지역의 특산물의 원활한 납품과 거래를 챙기고 움직이는 상인들의 숙박과 비용을 전적으로 챙겨주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인적체계와 현지와의 연계망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신광흡은 전라도 경주인들 모임의 수장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신재효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지방향리 자리를 이용하여 신분상승도 하고 미래의 부를 창출하고자 했다. 그래서 찾아낸 방안중 하나가 연예상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한편 진채선은 스승인 신재효를 깊이 사모하였으며 신재효 또한 진채선을 제자 이상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정조가 개혁을 주도하다가 붕어하자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나이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였고 그에 따라 정순왕후를 지지하는 김씨 세력인 노론벽파들의 세력이 막강해졌다. 세월이 흘러 헌종을 거쳐 철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후사도 없이 철종이 젊은 나이에 붕어하니 대원군의 어린 아들 명종이 고종으로 대통을 잇게 되었고,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대원군이 수렴청정하게 된 것이다. 안동김씨 집권기에 수많은 수모를 겪었던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폐해를 끝내고 백성들의 삶의 어려움을 개선하는 민본시대를 열고자 했다.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는 일에는 발을 벗고 나섰다. 커다란 정치적 포부를 펼치고 아들 고종이 새로 들어앉을 웅장한 궁궐을 짓고자 했다. 5년간의 경복궁 공사는 우여곡절 끝에 대체적인 골격을 완성하였고 연못을 조성한 후 경회루를 완성하였다. 대원군은 경회루 낙성식 공연을 대대적으로 펼쳐 고생한 부역 인부와 공사 관련 관료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술도 대접한다. 경회루를 완성한 후 4년 후인 1872년에 경복궁은 완공된다. 평소 대원군의 개혁정치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해온 이서계층인 신재효는 자신이 이끄는 연예상단의 대표적인 연희자인 진채선을 경회루 낙성식 공연에 출연시켰다. 진채선의 판소리가 당대의 청중들에게 가장 인기를 끌었고, 특히 풍류객인 대원군은 더욱 더 영혼의 감흥을 느끼게 된 듯 장단을 맞추면서 관람하였다. 이후 진채선은 운현궁에서 대원군을 기다리는 애첩이 되었다. 권력자에게 생긴 애첩과 예능인에게 생긴 연인은 주변의 시선을 모을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쉽게 동질성을 확보하였다.
반면, 신재효는 연인을 빼앗긴 상실감과 결핍이 그리움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미련과 원망이 교차하는 지점에 그녀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에 대한 질투와 채선에 대한 원망으로 그는 점점 더 무기력하게 늙어가고 있었다.
대원군의 강력한 집권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기득권들의 끊임없는 반발과 천주교 박해 등으로 불란서 군함을 불러들인 병인양요를 자초했으며 미국과의 신미양요의 전쟁을 치렀다. 이어 일본의 야수와 이를 견제하기 위한 청나라의 개입 등으로 대원군의 십년 섭정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제 대원군은 수하의 몇 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경기도 양주로 떠나게 된다. 임오군란으로 재집권하였지만 청나라 이홍장의 군대에 의해 그의 재집권은 단명에 그친다.
대원군은 채선에게 말했다. “너도 이제 운현궁을 떠나 네 갈 길로 가거라.” 6년간 운현궁에서 대령기생 역할을 했던 그녀는 대원군과 이별하고 길을 떠났다. 그 후 진채선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풍문만 바람에 실려 전해지고 있었다. 한 여인이 있어 지리산 큰 봉우리 밑에 가죽신발을 나란히 벗어놓았는데 그 자리에 소복이 눈이 쌓이고, 봄이 오고 다시 겨울이 와도 신발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고.
4.이들의 삶의 자세에 대한 비교
장편 소설 『사랑의 향기』에서 1870년대의 기생 진채선은 타고난 재능으로 일세를 풍미한 예인이자 신재효의 연인이었으나, 대원군의 눈에 들어 최고의 권력자의 애첩이 되었다. 세습무인 어머니의 뒤를 이었더라면 무당으로서의 일생을 살았겠지만, 그의 부모들은 세습무 보다는 기생이 되어 편한 삶을 살길 희망했고, 채선이의 삶도 관기에서 이름난 예인으로서의 인기와 권력자의 애첩으로 일생을 마쳤다. 타고난 재질과 미모, 그리고 운에 따라 신재효를 만나게 되었고 기생으로서는 최고의 자리라 할 수 있는 권력자의 애첩에까지 신분상승을 한 것이다. 당시의 사회에서 천민에서 평민으로의 신분상승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며, 기생의 신분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은 누린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편 1930년대의 『경희 』 에서의 여주인 공 경희는 부자 집으로 시집을 가서 평탄한 일생을 살 수도 있었지만,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임을 자각하고 사람으로 태어나 보이지 않는 험한 길을 찾지 않으면 누구더러 찾으라 하나! 하는 두 갈래 길을 놓고 고뇌하는 여인이다.
한 여인은 어찌 보면 운명으로 정해진 길을 따라 가면서 사랑과 이별의 아픔을 겪었다면, 경희는 보이지도 않는 어떤 사람의 길을 따르려고 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존재의미를 비교하는 데는 다소의 무리가 따른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의 봉건적 신분사회와 혼란기 와중인 60~70년이 지난 후의 1930년대의 사회상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 바탕을 흐르는 민중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현실의 벽을 깨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여인들의 몸부림은 시간의 벽을 넘는 치열함이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다.
Ⅲ. 결론
인간은 영원한 불완전의 존재이다. 그 불완전은 바로 결핍으로 나타난다. 서로 상대방의 부족함을 보완해주는 사랑의 손길이 필요한 이유인 것이다. 현실에서 얻을 수 없다면 예술 세계에서라도 얻으려하는 경우가 채선이의 경우다.
한편 편안한 삶이 보장된 탄탄대로의 길과, 험하고 가파르고 미래가 보이지도 않는 험한 길 중 어느 한 길을 택하여야만 하는 개명한 여인의 고뇌를 그린 작품에서, 가부장 사회에서 갈등하는 여성의 문제를 고백체로 표현하여 여성을 계몽코자 하는 경희의 태도는 인간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선구자적 의지가 돋보이는 것이다.
Ⅳ. 참고문헌
1.장편대하소설 사랑의 향기 1.2.3권. 박태상 지음. 도서출판 월인. 2014. 6. 9.
2.국문학 연습. 김창룡. 박태상 공저. KNOU PRESS. 2014.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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