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 -한국에서 이주자로 살아가기
참고도서가 다루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나의 삶을 함께 참고하여 우리사회에서 성적차별과 다른 종류의 차별이 어떤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면서 논하다.
Ⅰ.서론
Ⅱ.본론
1. 실제 사례
2. 한국에서 이주자로 살아가기
Ⅲ.결론
Ⅳ.참고문헌
Ⅰ. 서론
‘지구촌이라는 말은 문명의 발달로 온 인류가 서로 쉽게 왕래하고 통신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로, 지구를 한마을처럼 생각하여 쓰는 말’이다. 세계가 비록 넓지만 서로 왕래가 빈번하게 남의 나라를 제집 드나들 듯 하는 시대라는 말과, 이 지구상 어느 곳에 있거나 사람 사는 것은 매일반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이렇게 開明化 된 세상에서 더불어 사는 세계인을 한국인. 외국인이란 이분법적 구조로만 이해하려는 생각은 고루하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체한다던가, 아니면 처음부터 아예 저 사람들과는 기본부터 다르다는 인식을 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이 사회에서 편견과 차별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여기에서는 한국에서 이주자로 살아가는 것과 한국인이 타국에서 이주민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차별과 불평등에 관해 논하려한다.
Ⅱ, 본론
1.1.실제 경험사례
1983년 여름에 미국 서북부 시에틀에 머문 적이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상황은 5공 군사정부 시절로서 일반인이 외국으로 여행하기가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학술 연수차 미국에 연수를 간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지인의 초대로 시에틀 인근 타코마라는 도시를 방문하였다. 이 소도시는 미군들의 해외 파병, 또는 입국 등을 위한 일종의 보충대가 있는 도시였다. 군인들이 있는 곳에는 의례 그렇듯 유흥업소들이 많았다. 저녁시간에 어느 업소에 들어가니 넓은 홀은 텅 비어 있었고 종업원들이 군데군데 모퉁이에 모여 잡담을 하고 있었다. 한 곳에 자리를 잡고 둘러보니, 종업원들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 여종업원 몇 명이 들어 왔다. 우리는 놀랐다. 미국이라는 큰 대륙의 한 모퉁이에 있는 이런 작은 도시에서 한국인들을 만났다는 것이 신기했고, 그녀들도 또한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미군들만 들끓는 군사도시에 어떻게 한국인들이 찾아왔는가?
그녀들로부터 질문공세가 이어졌다. 얼마나 그리웠겠는가. 타국에서 같은 언어를 쓰는 동포를 만났으니 얼마나 우리말을 하고 싶었는가? 그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곳에 오게 된 사연, 이곳에서의 생활 등을 처음에는 쭈뼛 주뼛하다가 이내 하염없이 이어졌다. 이 여인들 거의 모두가 기지촌에서 미군들이 귀국할 때 같이 따라온 여인들이었다. 미군들은 이곳에서 두세 달 머물다가 부대 재배치가 되면 새로운 임지로 떠나가야 하는 곳이다. 막상 소속이 없는 이 군인들은 자연 군기가 해이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결혼을 목적으로, 또는 다른 무슨 결심으로 이 여인들을 데리고 와서는 모른 체 내버려두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이곳에 나온 여인들이 모두 그러했다.
한 여인이 말한다. “이곳은 사람 사는 곳이 아녜요. 짐승도 이런 짐승들이 없어요. 한국에서 나를 데리고 올 때는 무슨 마음이었는지 모르지만, 이곳에 도착한 날부터 무지막지한 폭력이 시작됐어요. 심지어는 소총 개머리판으로 내 머리통을 찍어 해골이 다 들어났어요. 병원을 갈 수 있나요. 숙소에 약이 있나요. 거의 죽을 뻔하다가 결국 숙소를 뛰어나왔어요.”
다른 여인이 말을 이었다. “나는 목욕탕에 묶여있었어요. 어디로 도망치지 못하게 옷을 모두 벗겨 파이프에 묶어 놓곤 외출을 하죠. 그 군인이 돌아올 때 까지 밥도 굶어야 했어요. 어떤 때는 며칠씩 안 들어오는 날도 있었어요. 거의 죽기 직전에 그 소굴을 도망쳤어요.” 그리고도 또 많은 얘기들이 이어졌다.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듣고만 있어야 했다.
고국에서도 기지촌 여인이라 손가락질 당하고 멸시를 당하다가, 그래도 희망의 끈을 잡고 땅 설고 물 설은 머나 먼 이국땅을 찾아왔건만, 여기는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물론 미군을 따라간 모든 한국의 여인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업소에 있는 이십여 명의 여인들의 경우는 대개가 비슷한 처지라고 하였다.
우리 일행은 그 업소에 간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내 동포가, 내 누이 같은 이 여인들에게 이런 일이 있다니. 우리는 그 후 아무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1.2 또 다른 경험사례
2012년 여름에 베트남으로 의료봉사를 다녀온 적이 있다. 약 3개월 정도 사이공의 푸미홍이라는 지역에 머물며 봉사활동을 하였다. 푸미홍 지역은 사이공에서 새로이 개발되고 있는 신도시 같은 곳이었으며, 우리나라의 강남 같은 신흥부촌이었다. 봉사처가 이곳에 있다.
우리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봉사활동을 한다. 이곳에 오는 분들은 모두 베트남 현지인들로 멀리서 버스를 대절해 오는 환자들도 있다.
이곳에오는 분들은 한국에서 온 우리 봉사자들을 상당히 좋아했다. 시장 아주머니들은 그들이 만든 음식을 가져오기도 했고, 농촌에서 오시는 분들은 열대과일을 가지고 왔다. 통역을 통해 그들과 간접 소통을 할 수 밖에는 없었지만, 한국에 대한 관심이 보통은 넘었으며, 한국의 이러저러한 일들을 수없이 묻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한국에 갈 수 있나? 모든 관심은 거기에 쏠려있는 것 같았다.
이곳 푸미홍에는 한국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다 교회만 해도 7~8곳이 있을 정도로 코리아타운 비슷한 분위기다. 이곳 음식점에서는 가끔 맞선을 보는 행사를 하곤 했다. 한 번에 이십여 명씩 한국의 남자 구혼자들이 와선 이들과 맞선을 보고 식사를 하곤 떠난다. 한 번은 인근호텔에 머물던 한국인 구혼자가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 자살한 일이 있었다. 사건처리를 어떻게 했는지 그만 쉬쉬 끝나고 말았다. 같은 시기에 한국으로 시집간 베트남 신부가 신랑의 폭력으로 사망한 사실이 있었다. 이곳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러나 그 얘기도 며칠 안 돼 잠잠해지고, 다시 예전과 다름없이 맞선이 이루어지곤 했다. 결혼중매업자는 큰돈을 벌었다고 했다. 당국의 단속이 심해 한 곳에서 계속할 수 없어 수시로 장소를 옮겨 다니며 중매 업을 계속한다고 했다.
중매업자는 말한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가려는 자원은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한국에서 오는 신랑감들에게는 문제가 너무 많은 것 같다. 나이 차이는 말 할 것도 없고, 도대체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수입은 얼마나 되는지, 부양할 능력은 있는지. 지병이나 병력은 어떤지 등등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국 에이전트에서 보내주는 서류 한 장에 의지해서 중매 일을 하려니 답답할 때도 많다. 일견해도 이건 도저히 맺어줄 수가 없는 경우도 많다. 그래도 어찌되었거나 일을 성사시켜야 한다. 이들이 운이 좋아 잘 만나면 좋은 것이고, 설사 잘못 된다 해도 무얼 어쩌겠는가? 이 과정에서 어찌 무리가 없겠는가? 가축들도 씨를 받을 적엔 그 혈통서나 족보를 살핀다는데, 과연 이게 사람이 할 짓인지 회의도 든다.”
1.3.한국인의 이주는 아직도 진행 중
‘유엔은 그 나라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12개월 이상 특정 국가에 체류하는 사람을 이주자(migrant)로 분류한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2010년 현재 2억1,400만 명이 본국을 떠나 이주자로 살아간다. 이 수치는 전 세계 인구의 4%에 불과하지만, 이주를 감행하는 인구가 젊은 연령대에 집중되어 있으며 임시로 출국한 후 장기 거주하는 미등록 이주자나 단기 체류자가 포함되지 않은 수치라는 점을 고려할 때 가히 이주의 시대라 할 만큼 이주는 보편적이고 익숙한 일상이 되고 있다. 이주의 시대에 한국은 새롭게 부상하는 이주 목적국이 되었다.
불과 30년 전만해도 한국은 해외로 사람을 내보내는 송출국이었다. 한인들의 첫 해외 이주는 1903년 하와이 이주 이래 한반도 전체인구의 10%내 해당하는 726만8,000명이 전 세계 176개국에 살고 있으며 이 수치는 세계 평균 3%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한국은 이스라엘, 아일랜드. 이탈리아에 이어 네 번째로 자국민을 해외로 많이 송출한 나라다.’
최근에는 부유해진 한국인의 위상을 반영하듯 글로벌한 계층 상승과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위해 이주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학생 이주자의 비율은 전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높은 반면, 심화된 빈부격차 때문에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떠나는 생계형 이주자의 비율도 증가하고 있다. 워킹 홀리데이 등의 단기체류로 호주 미국 캐나다 등지로 진출하는 청년이나 건설이나 서비스 분야의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뉴커머’ 등은 한국 사회의 배출요인 즉 경제적, 문화적 기회 부족 때문에 해외로 떠나는 경우다.’
고령화 사회가 도래하면서 이주는 더 이상 젊은 층만의 선택이 아니다. 한국의 높은 소비자 물가 때문에 중산층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기 어려운, 퇴직한 장년층도 물가가 상대적으로 싸고 자연환경이 좋은 아시아 지역으로 ‘은퇴’ 이주한다. 1987년 IMF경제위기로 인하여 강제로 퇴직을 해야만 했던 소위 ‘명예퇴직자’들은 50대 초반이 주를 이루었다. 이들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무한 경쟁의 장으로 강제로 내몰렸다. 퇴직금으로 받은 목돈으로는 자식들 대학 등록금에 충당하기에도 부족했다. 당시 신문지상에서는 은근히 은퇴이민을 유도하는 듯한 기사가 자주 실렸으며, 태국, 필리핀, 말레시아에서는 담당직원을 우리나라에 파견하여 적극적으로 은퇴이민을 유치했다.
“월 100만원이면 골프치고 가정부에 기사 딸린 자가용을 몰며 여유롭게 살 수 있다.” 르포 기사의 단골 메뉴였다. 당시 많은 수의 은퇴자들이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네팔 등지로 살길을 찾아 떠났다. 그곳에서 그들의 삶은 과연 여유롭고 행복했을까? 이들 나라에는 우리 같은 이주자들에게 정치. 사회, 경제적인 불평등이나 차별이 없었을까? 이에 대한 공식적 통계는 알 수가 없다. 대다수의 이주민은퇴이민자들이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오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필자 역시 그들과 같은 경험을 하였기 그들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안다고 할 수 있다.
2. 한국에서 이주자로 살아가기
‘한국의 이주자 유입의 현황을 살펴보자. 안전행정부의 2012년 외국인 주민 현황에 따르면, 외국인 주민 수는 140만9,577명으로 총 주민등록 인구 5,094만 8272명의 2.8%. 즉 약 36명 가운데 한 명이 외국인 주민으로 파악된다. 이런 변화는 최근 20년간 급작스레 일어났는데 어떤 이유로 외국인 이주자가 이렇게 급증한 것일까? 이주의 증가는 글로벌한 현상이지만, 한국이 이주자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한국사회가 다른 선진국과 유사하게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재생산은 사람을 출산하고 생존하게 하는 전 과정을 의미한다. 특히 미래의 노동인구를 생산하고 이들에게 의식주, 안전, 건강, 돌봄을 제공함으로써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세대를 연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 사회가 유지되는데 필요한 지적. 사회적 가치와 문화적 관습을 전수하고 집합적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모든 사회적 과정을 포함한다.‘
나는 중국어회화를 배우고 있다. 선생님은 대만인으로 한국에 이주한지 8년 되었고 중학생이 된 딸 하나와 단 둘이 살고 있다. 그녀의 남편은 대만에 유학 온 학생으로 후에 목사가 되었다. 이들의 결혼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정식으로 결혼하여 딸까지 두었으나 지금은 6년째 별거 중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혼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여인은 주일 교회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형편에 따라 중국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을 지도하여, 그 수입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이곳저곳 정해진 곳 없는 곳에서, 중국어를 배우려는 사람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찾아간다. 수요일 토, 일요일에는 교회에서 하루 종일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 교회에 가야 같은 중국말을 하는 한족을 만날 수가 있다. 이렇게 애써 버는 돈이 한 달에 100만원 안팎이다. 그렇다고 식당일이나 유흥업소에서 일을 할 수도 없다. 몸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번 돈은 월세에 식비, 주거비, 중학생 딸의 학비 등에 충당하기도 벅차다. 그래도 그녀는 다른 동족보다는 형편이 나은 편이라고 자위한다.
외국인 이주자가 한국사회에서 살아가기에 가장 손쉬운 방법은, 위험. 낙후. 3D업종. 최저임금에 속하는 업종에서 일하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결혼이주자에게도 해당된다. 한국의 젊은이들 중 누구도 시골에서 힘든 농사 노동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노력한 만큼의 소득도 불안정하고 문화시설도 없다. 급격한 도시화가 이루어진 현 사회에서 농촌으로의 회귀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퇴락으로 인식된다. 결혼이주자들의 대부분이 시골에서의 노동에 종사하며, 도시에서는 공장, 음식점. 유흥업소 등에서 소득을 취한다. 외국인이 몰리는 업종은 한국인이 기피하는 업종이며 외국인의 일자리라는 낙인이 찍히면 한국인이 기피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외국인 이주자가 한국에 이주하기 전 각종 매체를 통해 알고 있던 한국인의 화려하고 세련되고 상냥함에 대한 기대는, 무표정하고 화난 얼굴. 몰상식한 욕설. 잔소리. 못사는 나라에서 온 지능이 낮은 사람처럼 취급당하는 순간 사라진다. 다른 아시아인에 대한 무시가 몸에 밴 한국인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잘나고 잘사는 나라에게는 몸을 낮추고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못하다고 생각하는 나라, 그 이주자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멸시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Ⅲ.결론
이주자는 여전히 주류사회에서 볼 때는 여전히 소수자다. 한국인이 외국에서 살아가던, 외국인이 한국에서 이주자로 살아가던 간에 스스로 삶과 정체성을 개척하며 살아야 한다. ‘소수자 스스로의 삶과 정체성을 대표할 수 있는 통로도 없고 그러한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주자에게도 보편적으로 제공되는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거주민으로서의 권리가 있기 때문에 이주자라고 하더라도 사회적 생존과 계층적 상승 이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권리는 누가 누구에게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자격이 된다’고 간주하는 일련의 행위들이다. 이주자도 국민처럼 기본적 권리에 차별 없이 접근해야한다. 이는 사회적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기본권이라는 점에서는 국민과 이주자 모두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이다.’물론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다.
법체계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인식도 변해야 한다. 이주자를 무조건 옹호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시민사회의 일원이므로 호의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맺으려고 우리 스스로도 노력을 해야 한다.
또한 문화상대주의 입장에서 그들의 문화도 순수하게 인정해주어야 한다. 이주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한국어를 배우게 한다던가, 효를 강조한다던가, 가정에만 묶어두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고유한 문화가 있듯, 이주자들에게도 그들의 문화가 있는 것이다.
사회 경제가 발달할수록 우리도 언젠가는 집을 떠난다.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간에 우리 모두 집을 떠나 외국에서 이주자로 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易地思之로 이주민에 대한 관점을, 언젠가는 떠날 수도 있는 우리자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Ⅳ.참고문헌: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 김현미 지음. 돌베개 2014.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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