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난중일기의 민낯

甘冥堂 2019. 12. 4. 09:57

원균

 

우수사는 이달초(78) 전라 좌·우 수군과 함께 나가서 적선 80척을 나포해서 700여명의 수급을 베었다.

10일에도 또 적선을 만나 80여척을 사로잡았다

 

1592(선조 25) 726일 오희문(1539~1613)의 일기인 <쇄미록>에 기록된 한산대첩 승전보이다.

당연히 이순신의 승전기록일 것 같지만 다 그렇지는 않다.

일기에서 전투를 주도했다는 우수사는 바로 경상 우수사인 원균을 지칭한다.

원균의 주도 아래 전장에 나서 대승을 도운 전라 좌·우 수군의 지휘관은 바로 이순신(전라 좌수사)과 이억기(전라 우수사)이다.

<쇄미록>에 따르면 주인공은 원균이고, 조연이 이순신과 이억기 같은 느낌이 난다.

 

이는 역사적으로 알려진 원균의 평판과 사뭇 다른 기록이다.

원균(1540~1597)은 어떤 인물인가.

성웅 이순신(1545~1598)을 모함해서 밀어내고 그의 자리를 차지했고,

조선 수군을 궤멸상태로 빠뜨린 칠천량 패전의 책임자이며, 전투에 임해서는 늘 도망만 다니는 겁쟁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기록을 찬찬히 뜯어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원균은 전쟁 후 이순신·이억기(1561~1597)와 나란히 선무공신으로 책록됐다.

임진왜란 승전의 으뜸 공적은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군이라고 엄지척하며

조선군 장수들의 공을 폄훼하기에 급급했던 선조조차도

우리나라 장수 중에는 이순신과 원균, 권율 등이 다소간의 전공을 세웠다고 인정했다.

선조는 159291일 장수들의 공을 재평가하면서

원균과 이억기는 이순신과 공이 같은 사람(同功之人)”이라고 동급으로 대우했다.

    

 

견원지간이던 이순신과 원균

 

이순신과 원균의 반목과 갈등은 극심했다. 이유는 전공 다툼이었다.

1594(선조 27) 1112일 판돈녕부사 정곤수(1538~1602)

이순신의 부하들은 당상(3)에 오른 자가 많았던 데 비해

원균의 부하 중 우치적이나 이운룡 등의 공이 큰데도 상대적으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선조 역시 원균이 먼저 군사를 요청했고 이순신은 따라간 것이다.

이순신이 원균보다 왜군을 많이 잡았으나 원균이 군사를 청해서 성공이 시작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선조실록> 1596117)

 

실록에는 2년 이상 이어진 이순신·원균의 갈등 관련 이야기가 아주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그걸 찬찬히 읽어보면 원균을 소인배로 매도하기에는 너무 일방적인 평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균을 더욱 불리하게 만든 것이 있으니 바로 이순신의 <난중일기>. 일기라는 것이 무엇인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쓴 글이 아니기에 자신의 심중을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러니 자신의 일기에 전공 다툼으로 관계가 틀어진 원균을 좋게 쓸 리 만무하다.

누가 먼저 갈등의 단초를 제공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순신의 뒷담화, ‘원균은 고약한 인간이야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순신은 여수 본영의 전라 좌수사였고, 원균은 경상우수사였다.

가뜩이나 밉상인데 매일 마주쳐야 하는 장수였던 만큼 지휘권과 전공, 관할구역 등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이순신은 다름 아닌 일기에 원균에 대한 감정을 거리낌 없이 풀어헤쳤다.

 

아닌 게 아니라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원균 이야기가 80~120번 정도 언급된다.

짐작하겠지만 절대 다수가 원색적인 비난이다.

 

원균의 술주정에 배 안의 모든 장병들이 놀라고 분개하니 고약스러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15935)

 

원균이 술을 마시겠다고 해서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해서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로 했다. 해괴했다.”

(1592826)

 

원균이 온갖 계략으로 나를 모함하려 덤비니 이 역시 운수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 길에 잇닿아있으며,

그렇게 나를 헐뜯으니 그저 때를 못 만난 것만 한탄할 따름이다.”(159758)

 

심지어는 원균이 공연수와 이극함이 좋아하는 여자들과 모두 관계했다”(1594119)고 비난하기도 한다.

 

이 인용문들은 빙상의 일각이다.

원균을 흉측한 인물로 묘사하고 성격은 음흉’ ‘간흉하고 그의 이야기는 흉계이며,

해괴하기 이를 데 없다고 표현하기 일쑤였다.

 

누차 하는 얘기지만 이순신은 누구 보라고 일기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400여년 뒤 후손들이 자신이 비밀리에 쓴 일기를 죄다 들춰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순신의 심정은 어땠을까.

자신의 속마음이 저토록 적나라하게 들춰진 것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신상이 탈탈 털리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이순신의 원색적인 비난을 받은 원균은 모함꾼, 비겁자, 술주정뱅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은 원균에게는 실록이라는 공식역사서 외에는 달리 변명할 수단이 없다.

    

 

원균도 승전의 주인공이었다.’

 

그것이 원균의 비극이다.

그러나 맨 처음의 인용문에서 보듯 역시 동시대 임진왜란을 함께 겪은 뭇 선비 오희문의,

다름 아닌 일기(<쇄미록>)에 원균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나마 원균으로서는 불행 중 다행이 아닌가.

<쇄미록>에는 원균 관련 기록이 두 건 더 나온다.

 

들으니 영남 우수사 원균이 지난달에 적선 10여척을 불태웠다 하고

이 도의 좌수사인 이순신이 이달 초 여러 척의 배를 이끌고 전라도 수군절도사와 함께 적선 42척을 불태우고.”

(‘임진남행일록’)

 

전 만호 이충이 전에 경상 우수영에 갔다가

수군절도사 원균이 또 적선 24척을 불사르고 적병 7명의 수급을 베었다는 소식을 담은 서장을 은밀히 지니고 이 고을을 지났다.

그를 우연히 만나니 근심이 풀렸다.”(‘임진남행일록 159262)

 

‘~들으니로 시작되고 원균의 승전보에 근심이 풀렸다<쇄미록> 내용은 당대 민간의 여론을 생생한 필치로 반영하고 있다.

<선조실록>에도 당대 민간의 여론이 원균에게 불리하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즉 두 장수의 갈등을 주요 안건으로 다룬 15941112일의 경연장에서 선조가

바깥 여론이 원균을 체직(경질)시키려 하는가?”라고 묻자

호조판서 김수(1547~1615)별로 체직시키려는 여론이 없다고 손사래를 친다.

이때 정탁(1526~1605)원균은 사졸이 따르니 가장 쓸만한 장수이고

이순신도 비상한 장수지만 어찌 사적인 분노로 이렇게 다툴 수 있느냐고 비판하면서도

그럼에도 원균의 경질은 안 될 일이라고 주장한다.(<선조실록>)

 

두 사람에게 글을 내려 질책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때문에 원균을 경질한다면 필시 수군이 흩어질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오희문의 묘비. 오희문은 비록 현달하지는 못했지만 맏아들(윤겸)은 영의정이 됐고,

손자(달제)는 유명한 삼학사의 한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다.

<쇄미록>은 평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선비 오희문의 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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