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霜降

甘冥堂 2022. 10. 24. 19:52

먼 길 가다 잠시 쉬러 들어온 이 애잔,
그대의 행장이려니
움켜쥐려 하자 손등에 반짝이는 물기
빛살 속으로 손을 디밀어도 온기가 없다
나는 삯 진 여름 지나온 것일까
놓친 것이 많았다니
그대도 지금은 해 길이만큼 줄였겠구나
어디서 풀벌레 운다,
귀먹고 눈도 먹먹한데 찢어지게 가난한 저 울음 상자는
왜 텅 빈 바람 소리까지 담아두려는 것일까

--김명인,『여행자나무』(문학과지성사, 2013)


올해로 등단 40년을 맞은 김 시인의 시 세계를 관통해온 것은 '몸의 기억'이다.

'김명인 시'에 등장하는 이들은 대부분 고향을 잃고 부랑의 운명을 걸머진 채 헐벗은 길 위에 선 사람들이었다.

이번 시집엔 어느덧 노년에 이른 시인이 스스로 변화된 몸에서 길어 올리는 깨달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낙인처럼 찍혔던 트라우마도 희미해지고,
그 대신 죽음이라는 또 다른 어둠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빛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충만해지는' 시간으로 시인은 늙음을 받아들인다.

아울러 몸에 새겨진 상처들과 그 방랑의 시절마저 무한한 사랑으로 감싸안는다.

예컨대 김 시인은 시 '황금 수레'에서 이렇게 읊는다.

세상 끝까지 떠돌고 싶은 날들이 있었다
마침내 침상조차 등에 겨웠을 때
못 가본 길들이 남은 한이 되었다
넘고 넘겨온 고비들이 열사(熱砂)였으므로
젊은 날의 소망이란 끝끝내 무거운
모래주머닐 매단 풍선이었을까?



그런가하면 시인은
되는 대로 미끄러져가며 터뜨렸던
내 삶의 어떤 폭죽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잠깐 일어섰다 부서지던 파문을
저도 안다는 것일까
모르는 사이에 사십 년이 꼬박 흘러갔다!

(시 '살이라는 잔고' 중에서)라고 털어놓는다.

마침내 시인은 죽음과 대면하는 자신을 응시한다.

거기 누구요, 문 열고 내다보지 않아도
누구나 시시로 방 안에 우뚝 선 죽음의 민얼굴과 마주친다.

(시 '민얼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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