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소리의 품격

甘冥堂 2024. 2. 14. 10:01

조선 시대,
우연히 어느 벼슬 아치의 환송 회식에 참석한 정철과 유성룡, 이항복, 심희수 그리고 이정구 등

학문과 직위가 쟁쟁한 다섯 대신들이 한창 잔을 돌리면서 흥을 돋우다가
 '들려오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 라는 시제를 가지고 시 한 구절씩을 읊어 흥을 돋우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각자 이런 시를 읊었다.

   - 정철(松江) -
淸宵朗月 樓頭遏雲聲 (청소낭월 누두알운성)
 -맑은 밤 밝은 달빛이 누각 머리를 비추는데, 달빛을 가리고 지나가는 구름의 소리,

    -  심희수(一松)  -
滿山紅樹 風前遠岫聲 (만산홍수 풍전원수성)
 -온 산 가득 찬 붉은 단풍에, 먼 산 동굴 앞을 스쳐서 불어 가는 바람 소리,

   -유성룡(西崖) -
曉窓睡餘 小槽酒滴聲 (효창수여 소조주적성)
 -새벽 창 잠결에 들리는, 작은 통에 아내가 술을 거르는 그 즐거운 소리,

  - 이정구(月沙) -
山間草堂 才子詠詩聲 (산간초당 재자영시성)
 -산골 마을 초당에서 도련님의 시 읊는 소리,

    - 이항복(白沙) -
洞房良宵 佳人解裙聲 (동방양소 가인해군성)
 -깊숙한 골방 안 그윽한 밤에,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


이 날 저녁!
그 자리에 모인 모두는 오성대감 이항복의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가 제일 압권이라고 입을 모으고 칭찬했다.
당대에 내노라 하는 대학자요 문장가요 정사를 좌지우지하는 정치가였지만

그들이 아무리 유학의 궤범에 얽매여 살아간다 할지라도 인간의 본성에 치열하다 보니

어찌 일개 장삼이사(張三李四)나 무엇이 다르랴?
음란스럽기 보다는 얼마나 그윽한 정감과 함부로 흉내내기 어려운 멋으로 다가오는가?


이 글을 읽던 덕암사 처사가 아주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다며

洞房良宵 佳人尿尿聲(동방양소 가인뇨뇨성)

-깊숙한 골방 안 그윽한 밤에 아름다운 여인이 (요강에) 오줌 싸는 소리

 

 

 

한편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김광균의 시 설야(雪夜)에서,
'첫눈'을 '머언 곳에 女人의 옷 벗는 소리'로 비유하고 있다.
깊은 밤에 눈 내리는 소리가 시인에게 마치 어둠 속에서 치마끈을 풀어

치맛자락이 사르르 흘러 내릴 때의 신비롭고 매혹적인 소리처럼 들린 것이다.

 

설야(雪夜)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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