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몰랐던 노벨문학상

甘冥堂 2024. 10. 14. 11:17

■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과 그의 소설들을 비판한 김규나 작가에 대한 언론들의 비난에 대한 김규나 작가의 비판 글(24.10.13)

<글: 김규나/작가>
세상이 나를 말하게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에 대한 이야기는 더 하지 않으려고 했다. 내가 던진 돌이 어떤 파문을 몰고 올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지난 5년간 그래도 주류, 그래도 메인이라는 조선일보에 '소설 같은 세상'이라는 칼럼으로 정치적 발언을 해왔고, 이코노미 조선에 '시네마 에세이'를 써왔지만 다른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무엇보다 소설책을 세 권 내고 산문집도 냈지만 PC에 경도되지 않은 글을 쓰는 나는 문단에서 일찌감치 외면당했고, 탄핵 이후엔 동료 작가 하나 없이 외톨이로 견뎌온 처지다.

지난 10월 10일, 밤 9시 조금 넘어 쓴 두어 편의 글 때문에 어제오늘, 일파만파(一波萬波)라는 말을 실감한다. 한겨레 등 지면을 통해 인용, 비판되더니 MBC와 JTBC 등 TV 뉴스 매체를 통해 내 글이 악의적으로 보도되고 알려진 '덕분'이다. 내 글을 신나게 해체, 비판한 기자님들, 편집국은 어떤 의미로 쓴 글이냐 내게 물어온 적 없다. 인용해도 되겠느냐고 형식을 갖춰 의사를 타진해 온 적도 없다. 그저 개인 소셜 미디어에 올려놓은 글을 멋대로 가져다 박제하고는 천박하게 제목을 달고 개에게 뼈다귀를 던져주듯, '감히 노벨상 받으신 한강님을 비판한' 김규나에게 달려가 돌을 던져라, 선동하고 있다.

궁금했다. 대체 왜 나 같은, 그들 표현대로 듣보잡, 갑톡튀 무명 글쟁이의 글을 그토록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대중을 광분시키는 것일까? 이젠 답을 안다. 내 글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이 공유된 탓이다. 일반 대중에게 너무 많이 알려지고, 몰라야 하는 독자들을 깨운 탓이다. "어마나, 한국 작가가 노벨상 탔대" 하고 축하하고 기뻐하는 분들께 그건 사실 말이지요, 하고 작가와 그 작품의 실체를 알려버린 것이 내 죄다. 노벨문학상을 기점으로 오십팔과 사삼 미화를 완성하고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 했는데 내가 그 위에 재를, 고춧가루를 팍, 뿌려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나는 노벨문학상에 폭탄을, 다이너마이트를 던진 셈이다. 그러니 메시지를 부정하기보다는 저년이 나쁜 년이야. 저것이 꼴에 작가란다, 하며 메신저를 욕보여야 하는 것이다.

일단, 페이스북과 블로그에 올린 글은 퇴고되어 정서된 글이 아니다. 이렇게까지 퍼질 줄 알았다면 내용은 조목조목 훨씬 더 강력해졌을지언정 점잖게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해서 언론이 더 뜯고 씹기 좋았을 테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일반 독자님들 마음에 더 가깝게, 더 강렬하게 느껴졌을 거라는 생각은 한다.

오십팔을 오쉿팔로 쓴 건 검색에 걸리지 않으려고 한 거지만 물론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건 알만한 분들은 다들 아실 터, 그래도 여기서는 정중하게 오십팔로 써주겠다. 아무튼 언론은 내가 글 속에서 어떤 부분이 역사 왜곡인지는 쓰지 않았다며 거짓을 쓰고 있다는 식으로 선동하고 있는데, 사실은 내가 언급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가슴 쓸어내렸을 것이다.

지성이 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 듯, 오십팔은 명단도 공개할 수 없는 수많은 유공자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의 무장반란을 우리 젊은 군인들이 목숨 바쳐 진압, 국가와 국민을 지킨 사건이다. 당시는 광주사태라고 불렸는데 언제부턴가 민주화 운동이라는 이름의 성역이 되어버렸다. 제주사삼 역시 대한민국의 탄생을 막으려고 남로당 잔당 세력이 일으킨 무장반란이고 우리 경찰이 진압한 사건이다. 두 사건 모두 진압 과정에서 안타까운 희생이 있었지만, 애초에 반란이 없었다면 그 눈물 역시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무엇이 먼저인가다. 그리고 두 사건 모두, 진압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도 없었다.

국가 권력이 죄 없는 광주 시민을 학살, 국가 권력이 무고한 제주 양민을 학살했다고 소설마다 담아낸 한강은 대만민국의 탄생과 존립을 부정하는 작가다. 그런 작가에게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했다고 칭찬하며 상을 준 노벨 심사위원들도 대한민국을 부정한 셈이다. 축하는커녕 우리 국민이 대로할 일이다. 노벨심사위원들이 '우리 역사에 대해 뭣도 모른다'라고 쓴 이유다.

노벨상을 중국에 주어야 했다고 말했다는데, 내가 언제? '꼭 동양권에게 주어야 했다면 중국의 옌롄커'라는 문장은 일반 독자님들이 옌롄커를 모르니까 그 작가의 국적을 표기한 것이다. 방점이 '중국'에 있는 게 아니라 '옌롄커'에 있다는 걸 기자나 편집실은 정말 몰랐을까? 옌롄커는 중국 당국에 의해 그의 작품 거의 모두가 금서로 지정될 정도로, 작품마다 공산당을 비난한 작가다. 언론 담당자가 옌롄커를 한 번이라도 읽었다면 이 문장과 작가의 이름은 아예 언급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편하게 쓴 부분, 그리고 언론이 가장 신나게 깐 부분이 아마도 노벨상 심사위원들이 한강을 선택한 이유가 '정치적이거나, 물질적이거나 명단 놓고 선풍기 돌렸을 거'라는 문장일 것 같다. 그런데 이것 또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오래된 진실이다. 노벨상은 대륙과 인종, 성별을 가려 차례차례 돌려가며 준다.

2017년 영국(그러나 일본인)의 가즈오 이시구로(남), 2018년은 없고, 2019년 폴란드의 올가 토카르추크(여)와 오스트리아의 피터 한트켄(남)이 동시 수상. 2020년 미국의 루이스 글릭(여), 2021년 탄자니아의 압둘라자크 구르나(남), 2022년에는 프랑스의 아니 에르노(여) 2023년엔 노르웨이의 욘 포세(남)이 탔다.

성별만 봐도 이해가 되지 않나? 그러니까 올해는 아무리 잘 썼어도 남성 작가는 받을 수 없다. 서양인도 곤란하다. 황인종에게 주긴 해야 하는데 일본은 이미 받았다. 뛰어난 소설가 옌롄커의 경우는 중국 정부한테 미움받을 정도로 공산주의 비판이 너무나 강렬하다. 현재의 정치적 (안)올바름(P.C)을 잣대로 삼는 노벨이 상을 줄 리 없다. 그리고 로비 없는 사업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순진을 넘어 무지다. 무지는 죄다.

노벨은, 특히 문학상은 정치적이다. 그가 어느 대륙에서 어떤 피부의 색깔을 가지고 어떤 사상을 갖고 있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핍박받으며 고생하다 망명해야 했던 작가 이스마엘 카다레는 공산주의자 피터 한트켄이 노벨문학상을 탄 것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바 있다.

헤르만 헤세나 카뮈처럼 좋아하는 수상 작가도 많지만 노벨문학상은 작가의 문학성을 평가해서 주는 상이 아니다. '윤리적 도덕성을 갖춘 진실한 문학으로 인류에 기여한 문학'을 치하하는 것이 노벨의 뜻이었지만, 그것을 심사하는 것은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 1901년 첫 수상자를 냈으면서도 그 이름만 봐도 눈이 부신 작가 중 노벨상을 타지 못한 작가들은 의외로 많다. 톨스토이, 체호프, 도스토옙스키, 밀란 쿤데라, 필립 로스,코맥 매카시, 나보코프, 프루스트, 보르헤스, 그리고 톨킨..

이제 내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부끄럽고 슬프다'고 한 이유를 말할 차례다. 팻 머피의 단편 추리소설 '채소 마누라'와 설정이 거의 똑같은 한강의 단편 '내 여자의 열매'에는 밑도 끝도 없이 "이 나라는 죄다 썩었어!'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에 대해 나는 2017년, 다음과 같은 후기를 적어놓았다.

- (한강의 소설 '내 여자의 열매') 본문 한가운데 밑도 끝도 없이, <마치 ‘이 나라는 죄다 썩었어!’라고 술좌석에서 외치는 사람처럼 적의에 찬 목소리로 아내는 내뱉었다.>라는 부분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진짜 그렇게 외친 것도 아닌, 그러나 참으로 요상하고 과격한 비유였지만, 출판사 소개 글처럼 `삶의 고단함과 희망 없음에서 유래한 슬픈 아름다움`을 쓴 작품이라는 식의 미명(사실 왜 고단하고 희망이 없는 삶이 아름다운지 모르겠지만), 실은 이것이 이 소설의 숨겨진 주제다. 썩어버린 이 땅의 역겨움을 자각한 여자는 더 이상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하여 식물이 되었고, 그걸 모르는 둔한 남자와 나머지 군상들은 개돼지처럼 잘도 살아간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문단에 포진하고 있는 작가들 거의 대부분의 작품 속에는, 자기들이 발붙이고 사는 이 땅에 대한 악의적인 모욕과 비하가 감춰져 있다. 이것이 언제부턴가 내가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을 읽지 않는 이유이다. 이 작가와 이 작품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문단과 서점을 장악해 온 유명 작가들의 발언과 작품 속에는, 그들 자신이 나고 자란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이나 자부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을 읽고 나면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이 나라는 '썩은 나라' '부정한 나라' '미개한 독재국가'라는 프레임 안에 갇히게 된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 대한 수치심과 열등감으로 분노하게 된다.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작품들만 문단에서 내보내고 평단에서 찬양하고 언론에서는 상을 받았다고 띄워준다. 그러면 독자들은 그 작가와 작품의 주장이 옳다고 신뢰하게 된다. 이런 유의 작품이 다량으로 양산되는 이유는 작가들이 '시대의 지성인'이어서가 아니다. 그러한 방향의 작품을 의식적으로라도 쓰지 않으면 인정받을 수 없는 문단의 구조 때문이다.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우리나라를 헐뜯고 비하하는 작품으로 부와 명성을 얻고, 그 혜택을 누리며 다시 우리 역사와 자본주의를 짓밟은 작품을 쓰는 웃지 못할 아이러니.

그렇게 그들은 마땅히 토해내야 할 지성인의 양심이자 고뇌인 양, 아무런 해결책도 없이 독자들에게 미움과 분노와 열등감을 무책임하게 부추겨왔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으로 순환되는 출판문화계의 시스템이야말로 책을 좀 읽는다는 사람들이 문제의 근본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은 채, 의식 있는 시민임을 자부한다. (인용 끝)

태어나 처음 받는 관심과 시선, 모함과 비난과 욕설. 하지만 나쁜 일과 좋은 일은 항상 같이 온다. 뜻밖에도 지금껏 나를 몰랐던 독자님들, 진실을 몰라 어리둥절했던 분들이 비밀글로, 메시지로, 메일로 응원과 격려와 지지를 보내주신다. 비슷한 일을 겪어보신 선배님들은 전화로 마음 잘 챙기라고 어깨 다독여주신다.

언젠가 나는 '작가에겐 글업(文業)을 감당해야 하는 숙명이 있다'고 쓴 적 있다. 이 일을 하면 저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 씨를 뿌리면 열매를 거둬야 하는 것이 업(業)이다. 지금 내가 겪는 일도 작은 글업이다. 노벨문학상이라는 개인의 커다란 영광을 얻은 한강 작가는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고 무거운 글업을 짊어졌을 것이다. 앞으로 그 업을 잘 감당하길 바란다.

여기까지도 너무 길었다. 그래서 오늘은 이쯤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말하도록 등을 민다. 차차 한국 문단의 현실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다.

[김규나/작가 페북 글(24.10.13)]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관하여>    
-고세진박사님글 펌

내가 아직 미국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2017년 10월 7일, 뉴욕타임즈에 한강이라는 여자가 보낸 기고문이 실렸다. 한글로 쓴 글을 영국인 번역가 데보라 스미쓰 씨가 영문으로 번역한 것이었다.

그 기고문의 제목은 While the US talks of war, South Korea shudders, 직역을 하자면, 미국이 전쟁을 말하고 있는 동안, 한국인들은 몸서리 친다, 정도가 될 것이다.

(1) 이 글에서 이 여자는 여지 없이 좌파 골수 분자의 사상을 드러냈다. 우선 미국이 전쟁을 이야기 하거나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을 말한 것이 아니라, 다 아시다시피, 김정은이가 대대로 내려오는 전쟁광의 행태를 보이며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우려하고 경고하고 방어하는 말을 미국이든, 트럼프든, 정상적인 한국이든 한 것이다. 따라서 그 제목 자체가 이 여자가 얼마나 비뚜러진 한국사에 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되어 나는 그야말로 몸서리를 쳤다. 사실 이 부분은 그 여자가 지적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의아하게 하는 면이 있다.

(2) 그 여자는 한국에서는 매일 국민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전쟁대피 연습을 하는 것처럼 묘사했으나, 문재인 정권 시절에는 국민들이 불안해 한다면서 그런 것을 아예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소설가 답게 창작을 해서 쓴 글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3) 그리고 그 내용중에 미군이 6.25 전쟁 중에 노근리 양민을 학살했다고 하는 것을 부각해서 떠벌렸다. 노근리 진상에 대한 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인데, 인민군과 중공군이 저지른 학살행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오직 미군과 한국군이 살인광이었던 것처럼 부각시켰다.

(4) 또한 6.25 전쟁을 한반도에서 일어난 강대국들의 대리전으로 확언하는 유치한 한국전쟁사관을 드러냈다. 이제는 한국전쟁에 대한 자료들이 미국, 중국, 러시아 등에서 많이 나와 있고, 한국전쟁 전사 (전체역사) 책이 미국, 중국, 일본에서 나와 있어서 이런 자료들을 읽어보면, 이 전쟁은 소련이 김일성을 내세워서 한반도를 적화하려는 야욕을 중국이 밀어 주면서 이러난 전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나이 47세 난 문학가라는 여자가 쓴 글 치고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글이었다.

이제 그 여자가 노벨문학상을 탄다고 하니, 그 공로는 누구에게 있는가? 맨부커상을 받은 것이나 이태리 무슨 상을 받은 것이나 노벨상에 오른 것이나 다 영어 번역자 데보라 스미쓰의 공로라고 봐야 한다. 한국에 그만한 문학가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전념하여 번역해 주는 번역자가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는 AI의 능력을 빌어서 많은 한국 문학작품들을 영어로 일차 초벌번역을 하고 영어번역인이 손을 보아서 출간하면 더 많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나는 지금 한국으로 가는 비행여정 길목에 있지만, 이 글을 쓰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어서 몇 자 급히 적어 본다. 한국에서 받은 두 노벨상이 모두 좌파가 받은 것이다. 노벨평화상은 거액을 김정일에게 퍼준 김대중이 받은 것이고 노벨문학상은 스미쓰의 탁월한 번역을 빌어서 한강이 받은 것이다.

우파 문학가들은 그동안에 무엇을 하였는가? 깊이 반성하고 새로운 각오로 문학에 천착하고 스미쓰 같은 좋은 번역자들을 찾아서 해외 문학계로 진출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이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글은 조선일보에서 한글로 번역하여 올린 적이 있어서 여기에 그 링크를 올리니 일독해 보고 각자 이 여자의 글에 대해서 판단해 보기를 바란다.

참고로, 조갑제 선생의 오늘자 유튜브를 보시고, 그리고 2017년 10월 7일 당시에 나온 이동복 선생의 한강 기고문 비판,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 선생의 한강 기고문 비판을 인터넷에서 찾아 읽어보면 내가 그 뉴욕타임즈 기고문을 읽는 날 종북좌파의 사상에 왜 그리 몸서리를 쳤는지 더욱 선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우리 나라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좋아하는 어리석은 우파들이여, 너희들이 가는 길은 정녕 가시밭길이로구나!
너희들이 한강의 글을 읽어 보기라도 했느냐?
<노용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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