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의 여승
♡추억속의 중년 ♡
수덕여관은 조선조부터 구한말까지 손님이 거처하던 곳이다.
수덕여관은 ㄷ자형 초가집으로 이응로화백의 집이기도 했다.
기단을 쌓고 계단을 통하여 올라가도록 지어져 있으며 전면의 툇간에 누마루를 연결시켜 정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초가지붕이 주는 운치와 툇마루와 누마루가 연결된 공간에 평난간을 둘러 여유있게 보인다.
담은 싸리울타리로 되어있었다.
이응노화백은 수덕여관과 부인을 버리고 떠난 사람과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처럼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며 수절한 사람이 수덕여관을 지키기도 하고, 여성해방을 부르짖은 사람이 머물기도 한 사연 많고 곡절 많은 사연이 얽히고설킨 집이
수덕여관이다.
충남 홍성이 고향이고,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던 청년 이응노에게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과는 둘도 없는 선배이자 스승인 나혜석을 만나려 자주 수덕여관을 들른다.
이응로 화백이 거주하며 작품활동을 하던 초옥 - 후에 수덕여관이 됨
수덕사 입구에 있는 ㄷ자 모양의 이 초가집은 이응로 화백의 본부인이 수덕여관을 운영하던 자리로,
동양미술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고암 이응로(1904-1989) 화백이 작품활동을 하던 곳이기도하다.
1944년에 구입한 이 집은 그의 부인이 수덕여관을 운영하던 곳으로,
고암이 1957년 독일을 거쳐 파리로 가기 전까지 거주하면서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옮기기도 하였다.
일엽 스님의 외아들 일당 스님의 삶
‘비구니계 거목’ 일엽스님 외아들 일당스님의 파란만장한 삶은
“나의 지나온 어머니에 대한 애증의 시간이었다”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아사히상을 수상하고,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일당스님(김태신).
그가 바로 일제시대 한국 최초의 여자유학생이자 당대 최고의 비구니로 칭송받던
일엽스님의 외아들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공개돼 화제다.
67세에 불가에 귀의한 80세 노스님이 털어놓은 그리운 나의 어머니, 그리고 파란만장했던 삶.
“어머니란 존재는 각박하고 외로운 이승에 내던져진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나의 고독, 나의 절망, 나의 기쁨, 나의 소망은 모두 어머니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로 인해서 갈증을 느꼈으며 또한 어머니로 인해 제 삶은 충만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뿌리치는 옷자락에 엉겨붙은 눈물 같은 존재였습니다.
”회한이 서린 말로 어머니를 추억하는 팔십세의 노스님.
우주적인 혜안을 지닌 부처님의 제자라고 할지라도 생모의 부재에서 오는 근원적인 허기는 메울 수 없는 것일까.
지난 7월17일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합장하고 있는 일당스님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투명하나 날카롭지 않은 눈빛, 미소를 담고있는 부드러운 눈매와는 또다른, 어떤 표정이 스님의 뒷모습에 서려있었다.
일본에서 화가로 더욱 유명한 일당스님은 김천 직지사 중암에 머물고 있는데,
최근 자전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를 출간하면서
그가 한국 비구니계의 거두 일엽스님(1896∼1971)의 아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냈다.
일엽스님이 입적한 지 31년 만의 일이다.
“김일엽은 춘원 이광수의 애인이었다, 그래서 숨겨놓은 아들이 있다, 혹은 김일엽은 연애대장이다 등등
어머니를 둘러싼 안 좋은 소문이 많았어요.
한때는 어머니와 저를 두고 세간에 오르내리는 이야기에 신경을 쓰기도 했지만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어머니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싶어 책을 냈어요.
”그렇다면 김일엽은 누구인가.
목사의 딸로 태어나 조실부모한 그의 본래 이름은 김원주.
일엽(一葉)이라는 필명은 춘원 이광수가 그의 아름다운 문체에 반해
‘한국 문단의 일엽(나뭇잎 하나)이 되라’는 뜻에서 지어준 필명이다.
출가하기 전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를 창간해 여성해방을 부르짖고,
동인지 <폐허>의 문학동인으로도 활동한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자 여성운동가다.
이화학당을 거쳐 도쿄 영화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한국 최초의 여자유학생이기도 한데
윤심덕, 나혜석 등과 동시대의 ‘신여성’으로서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주장했다.
특히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신정조론’이라는 글까지 발표해 논란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남녀가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이 문제될 것은 없다.
정신적으로, 남성이라는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여인이라면 언제나 처녀로 재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여인을 인정할 수 있는 남자라야 새 생활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여인,
그것이 바로 나다. ”‘신정조론’을 통해 낡은 관습을 비웃고 자유연애를 외친 김일엽.
그도 알고보면 잘못된 인습의 피해자였기 때문에 ‘신정조론’을 주장할 수 있었다.
당시의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그역시 부모의 중매로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남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남편은 자신이 의족을 한 장애인이란 사실을 숨겼고, 결혼 후에야 이 사실을 안 그는
신뢰에 기반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일찌감치 청산했다.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게 했던 일엽스님.
이후 ‘신정조론’을 주장한 이력에 한번의 이혼경력이 보태어져
김일엽은 마치 ‘스캔들 메이커’인 것처럼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스캔들로는 ‘이광수의 애인설’을 꼽을 수 있다.
“춘원과 연인 사이라는 소문이 왜 났냐 하면
어머니가 의사 허영숙씨(춘원의 두번째 부인)의 부탁으로 춘원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를 대필했었어요.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춘원도 어머니의 뛰어난 글솜씨에 무척 놀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정말 사랑했던 사람은 춘원이 아니라 일본인인 제 아버지였어요.
”김일엽이 관습의 굴레를 벗어던진 후 마지막으로 찾아온 ‘오다 세이조’와의 운명적 사랑.
그러나 정작 그의 운명적 사랑은 관습에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역사적 조건에 의해 거부당했다.
“1921년 도쿄행 특급열차에서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가 처음 마주쳤어요.
당시 규슈제국대학 법학과 학생이었던 부친은 어머니를 보고 첫눈에 반했죠.
그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접니다.
”은행총재를 아버지로 둔 일본 명문가 출신 오다 세이조는
“그녀의 뱃속에는 오다 가문의 핏줄이 자라고 있다”며 결혼 승낙을 받아내려 했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낙태’ 시키라는 고함뿐이었다.
이에 오다 세이조는 부모님과 절연을 선언했고,
70년 독일에서 홀로 숨을 거둘 때까지 ‘오다’ 가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22년 9월, 결국 김일엽은 오다 세이조의 친구집에서 귀여운 사내아이 ‘오다 마사오’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일당스님이다.
“어머니는 저를 낳자마자 아버지께
‘당신하고 살면 내 일신은 편안하겠지만 평생 조국을 배신한 괴로움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당신도 나로 인해 천륜을 끊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니 다른 여자와 가정을 꾸려 마사오와 행복하게 사세요’라는
내용의 편지 한장만 남기고 한국으로 가버리셨답니다.
”일엽스님은 ‘그처럼 꽃답던 사랑도 단지 하루의 먼지처럼’ 털어버리고
28년 충남 수덕사 견성암에서 탄옹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고 불자의 길을 걷게된다.
“아버지는 한국에라도 와서 어머니와 가까운 곳에 계시려고 총독부에 지원하셨어요.
해방 후에는 일본 외교관으로 일하셨고요. 평생 어머니를 못 잊고 독신으로 사신 분이죠.
저는 아버지 친구 분의 양자로 들어가 살았기 때문에 우리 세 가족은 단 한번도 같이 살아보지 못했어요.
”일엽스님을 시봉했던 경희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일엽스님이 병으로 앓아누워 있을 때 한 노신사가 찾아왔었다고 하는데,
일당스님은 이들 두고 혹시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런 추측을 내놓는다.
“70대 노신사가 이름도 밝히지 않고 병든 어머니 뵙길 청했답니다.
노신사는 방문 앞에서 누워계신 어머니께 큰절을 올리고서야 방으로 들어가 일본식으로 무릎을 꿇고 앉으셨대요.
그리고 아픈 어머니를 보고 한참 눈물을 흘리시더니 하얀 손수건을 어머니 손등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다시 자신의 손을 얹으면서 어머니 손을 꼭 잡더랍니다.
”일엽스님의 유일한 혈육인 일당스님도 어머니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 때문에
가슴에 ‘바람구멍’이 난 사람이다.
그래서 일당 스님은 “내가 지나온 삶은 어머니에 대한 애증과 ‘사투’를 벌여온 세월이었다”고 회고한다.
“14세가 되어서야 어머니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어요.
황해도 신천에서 양아버지가 집을 비운 틈을 타 몰래 수덕사로 내려갔죠.
그런데 저를 처음 본 어머니가 그렇게 냉정하실 수가 없었어요.
저는 평생 동안 어머니 품에 단 한번도 안겨보지 못했으니까요.”
어머니를 처음 본 일당스님은
“그동안 눈덩이처럼 불어난 그리움이 눈물로 변해서 콸콸 쏟아졌다”고 하는데
대뜸 어머니로부터 예기치 않은 호령이 날아왔다.
“울음을 그쳐라! 여기는 산중의 절이다.
너는 절에 왔으니 절 풍속과 예절을 지켜야 한다.
우선 나에게 다시는 ‘어머니’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스님’이라고 해야 한다. 알겠느냐?”
어머니 품에서 하룻밤 자겠다는 일당스님의 달콤한 기대는 보기 좋게 허물어졌다.
그날 밤 일당스님은 인근 초당에서 잠을 자려고 하는데
계속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한다.
‘라훌라.’ 부처님도 출가하시기 전에 속세에서 얻은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 이름이 바로 라훌라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수행에 방해되는 존재를 ‘라훌라’라고 일컫는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모자의 연을 잘라낸 어머니에게서 일당스님은
당연히 라훌라이자 애물단지였던 것이다.
“방학 때마다 어머니를 찾아가도 매서운 눈으로 대하셨어요.
절에서 재워주지도 않고 근처에 있는 ‘수덕여관’으로 내쫓으셨죠.
만일 그곳에서 나혜석씨를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분노와 설움을 이기지 못해 아주 많이 비뚤어져버렸을 겁니다.
"어머니 가신 길 따라 늦은 나이에 출가 일엽스님의 친구인 화가 나혜석은
이혼 후 집에서 나와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며 수덕사를 찾아왔지만
그곳 만공스님은 ‘스님 될 사람이 아니다’라며 한사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덕분에 나혜석과 일당스님은 수덕여관에서 모자처럼 각별한 정을 쌓아가게 되었다.
“그림 그려보라고 그림도구를 빌려주시는가 하면 엄마젖을 못 만져 봤으니 내젖을 만져보라며
그분 젖가슴에 내손을 올려 주시고는 했었어요.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면서 일당스님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쳤는데,
나혜석과 특별한 교분이 있었던 고암 이응로 화백이 자주 찾아와
일당스님은 이들과 함께 그림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훗날 고암은 많은 추억이 서린 수덕여관 뒤뜰 너럭바위에
‘문자추상화’를 새겨넣은 암각화를 남겨놓기도 했다.
태생적으로 ‘라훌라’가 되어버린 일당스님의 운명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운수납자’가 따로 없었다.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구름과 물처럼 흘러간다’는 의미의 운수납자는 보통 스님들을 일컫는 말이지만,
그의 젊은 시절도 구름이나 물처럼 떠돌이 인생이었다.
그를 키워준 양아버지만 해도 신도 아라키, 송기수, 이당 김은호, 김봉률 스님 등 여러 명이었다.
불려진 이름만 해도 오다 마사오, 송영업, 김설촌 그리고 현재 일본 화단에서
한국 화가로 널리 알려진 그의 이름 김태신이 있다.
하나를 잃으면 또 다른 하나를 얻는다고 했던가.
어머니를 늘 가까이할 수 없었지만 운수납자처럼 떠돌며 한국의 유명 사찰과 명산을 다 돌아다녀보고
한국의 산을 화폭에 담는 것은 물론,
한국 불교계를 이끌어가는 고승들을 만나 정신세계를 넓혀가는,
그리 흔치 않은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용운, 최영환, 임환경 등 독립운동가를 만나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정체성을 굳혀갔고, 알게 모르게 독립운동 자금 운반책 노릇도 했다.
이렇게 그는 일본인의 피와 한국인의 피를 한몸에 받은 죄 아닌 죄로
‘맷돌 하나를 가슴에 얹어놓고 사는 듯한 기분’으로 일제 식민통치기간을 견뎌냈다.
그렇다고 일본 오다 가문에서 장손인 일당스님의 위치가 확고한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가 한국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장손 대접을 전혀 받지 못했다.
더구나 오다 가문에서 일당스님을 장손으로 인정하면 ‘재산 상속인’으로 인정하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친척들은 그를 배척해내기 바빴다.
“연말이 되면 일본은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이 있어요.
어느 해 사촌형님으로부터 정종 한병이 선물로 들어와서 밤에 그 술을 한잔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지요.
그런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안개가 자욱해요.
그래서 ‘프랑스에만 안개가 많은 줄 알았더니 일본도 안개가 많네’하니까
‘오늘 날씨가 얼마나 화창한데요’ 하면서 가족들이 깜짝 놀라요.
”부랴부랴 도쿄대학병원에 달려간 일당스님은
‘독극물에 의한 실명이 우려된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김일성종합대학에 걸린 김일성 초상화 그리기도
“사촌형이 재산을 독차지하려고 술에 독극물을 넣었던 겁니다. 만일 술을 한병 다 마셨으면 죽었겠죠.
그일로 1년6개월 정도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그 뒤에도 여덟번이나 수술을 했어요.”
이 사건 이후 일당스님은 생명에 대한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다 가문에
‘모든 재산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써서 도장까지 찍어준 상태다.
그런데 의외로 스님의 출가는 속세의 시간으로 따져보면 ‘늦깎이’ 출가라고 할 수밖에 없다.
뉴욕 원각사에서 관응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았을 무렵이 67세였으니 말이다.
“어머니 일엽스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고 싶었고, 어머니와 좀더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에 출가를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일까. 희한하게도 일당스님이 출가한 후 그에게는 믿지 못할 일이 종종 일어난다.
암자에서 밤 늦게 그림을 그리다가 붓을 든 채 잠이 들면,
“태신아, 일어나” 하고 외치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린다는 것.
장소를 옮겨도 마찬가지로 매일 새벽 일당스님은 일엽스님의 목소리를 듣고 잠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의문의 일이기는 하지만 일당스님은 그렇게라도 어머니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 좋다고 한다.
한편, 일당 스님은 불가의 연을 맺기 전 일본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일하다가
같은 학교에서 만난 음악교사 김청인 여사(77)와 결혼해 슬하에 아들 삼형제를 두었다.
김청인 여사 외에도 일당스님의 따뜻한 성품과 미술적인 재능에 반한 여성은 많았다.
이 가운데 2명의 여성은 일당스님과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일당스님은 해방 직후 김일성 주석 초상화를 그린 이력 때문에
한동안 조총련계 간첩으로 의심받아 작품활동에 제약이 있었지만
그것말고는 출가한 이후에도 줄곧 붓을 놓지 않았다.
현재 일당스님은 직지사 중암에 자그마한 화실을 마련해놓고 주로
‘고태법’을 이용한 신비로운 느낌의 ‘석채화’를 그린다.
고구려 벽화에서나 볼 수 있는 신비한 천연색을 뽑아내기 위해 직접 돌가루를 빻아 그림을 그려서일까.
일당스님의 그림에서는 고풍스럽고 예스러운 느낌이 은근히 배어난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의 산을 그리기로 결심했었어요.
나에게 산은 어머니가 계신 곳이고, 어머니를 생각하며 산을 그리고,
산을 그리면서 어머니를 잊고 싶었거든요.
산을 그린다는 것은 곧 어머니와의 대화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어머니의 품에 안기듯 위로와 휴식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일당스님의 어머니 일엽스님은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 된다’며 출가와 동시에 절필했지만,
붓으로 표현하는 일당스님의 ‘사모곡’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나혜석 역시 모성애에 주려 있는 세 아이의 엄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본 김일엽은 속세의 연민을 끊지 못하는
나혜석이 중노릇은 못 할 거라고 생각한다.
김태신은 이 후에도 어머니 김일엽을 찾을 때마다 수덕여관에서 묵는데,
나혜석은 마치 자기 자식 대하듯
팔베개를 해주고 자신의 젖을 만지게 하는 등 모성에 굶주린 일엽의 아이를 보살핀다.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면서
김태신(후에 일당스님)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치는데
나혜석과 특별한 교분이 있는 청년화가 이응로도 자주 찾아와
이들과 함께 그림에 대한 이야기와 실습으로 시간을 보내고……
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는
열네 살 앳된 소년이 수덕사로 김일엽스님을 찾아온다,
그 소년은 김일엽이 일본인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김일엽의 아들인 김태신 (일당스님)이다.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을 보고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라고 느낀 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베개를 해주고 젖 무덤을 만지게 해준다,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의 인연으로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 버린 이응노는,
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아예 수덕여관을 사들인 다음 부인인 박귀옥에게 운영을 맡기고,
6.25 때에는 피난처로 사용하는 등 6년간 살면서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옮긴다
이 화백이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룬 후 수덕여관에서 피곤해진 심신을 달래는 동안
사물의 성(盛)함과 괴퇴함을 바위에 새겨 형상화한 암각화
초가집 앞에는 커다란 바위에 만든 두개의 암각화가 보존되어 있다.
초가집 앞에 있는 두개의 큰 바위에는 이화백이 문자체로 그림을 조각한 암각화가 새겨져 있는데,
1969년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이곳 수덕여관에서 잠시 쉬면서
화강암에 온갖 사물과 현상의 성(盛)함과 쇠퇴함을 추상화로 표현한 작품이다
나혜석으로부터 꿈에 그리던 파리 생활과 그림 이야기를 들은 이응노는
1958년 드디어 21세 연하의 연인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 버린다.
머물다 미련 없이 떠나 버린 두 사람과는 달리,
박귀옥여사는 변치 않는 애정과 절개로 이국 땅의 남편을 그리며 수덕여관을 지킨다.
홀로 남은 그의 본부인 박귀옥이 여관을 운영하나 글자 그대로
소박떼기 청상과부가 되어 버리고 마는데
이응로가 새긴 수덕여관 뒤 뜰의 문자 암각화 바위
(저 멀리 담장안 환희대 요사채가 가까이에 있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와 떠나 버린 남편을 병구완하는 박귀옥 여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런 부인의 뒷 모습을 바라보던 이 화백은 아마도 그 마음을 추스려
여관 뒤뜰에 있는 너럭바위에 추상문자 암각화를 새겼으리라.....
그리고는
"이응로 그리다”라는 사인까지 남겨 놓은 뒤
"이 그림 속에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이치가 들어 있다."고 말하고는
파리로 또 훌쩍 떠나버린다.
너처럼 중이 되겠다"라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일엽이 만류했지만
"조실스님 만공을 뵙도록 도와줘" 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마지 못해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한다.
몇 년 전 경성에서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 놓는 김일엽에게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된다" 라고 면박을 주던 나혜석이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같이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신여성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만공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일언지하의 거절을 당한 나혜석은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5년 동안이나 머무르며 "중 시켜 달라고 1인 시위" 하면서 버티는 한편,
붓 가는대로 그림을 그리며 찾아 오는 예술인과 소일한다.
일엽스님이 거처하던 환희대
수덕사 초입 금강문 옆으로 ‘환희대’라는 작은 팻말이 있는데, 이곳은 일엽스님이 거처하던 곳이다.
일엽스님은 1896년 생으로 본명은 김원주였다.
목사의 딸이었던 그녀는 조실부모한 후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일본에 잠시 유학한 후에
잡지 ‘신여자(新女子)를 창간하고 시인으로 활동하며 신문화운동과 신여성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인생의 뜨거운 정열을 불사른 후 38세인 1933년 일엽은
수덕사에서 만공스님을 만나 견성암에서 머리를 자르고 불심에 귀의하였다.
훗날 자신이 낸 회고록 ‘청춘을 불사르고’처럼 기거하던 견성암이 환희대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일엽스님은 1971년 세수 76세로 열반하였는데,
그후 조촐한 한옥이던 견성암은 10년 후인 1981년 커다란 불당으로 새로 지어지고
견성암이란 현판은 이곳 경내에 있는 여승들의 수도장인 덕숭총림으로 옮겨졌다.
(덕숭총림-장판지 240장이 깔린 커다란 방에 100여명의 여승이 수도를 닦고 있는 도량이다)
(이니보탑)
‘수덕사의 여승’ 일엽(一葉, 1896∼1971) 스님은 신학문을 섭렵한 문인이자 선각자로,
출가 후에는 만공 선사의 법맥을 이은 선승으로 칭송 받았던 인물이다.
1896년 평남 용강군 삼화면 덕동리에서 5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스님은
부친이 목사인 까닭에 어려서부터 기독교계 학교를 다니며 자연스럽게 신학문을 접했다.
그러나 1907년 갑작스런 어린 동생의 죽음은 이후 스님의 파란만장한 삶을 예고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동생의 죽음을 접한 스님은 그 통탄의 심정을 글로 옮겼고,
이것이 한국문학상 신시의 효시로 불리는 ‘동생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4세 되던 해 스님의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졌고, 남은 동생들도 차례로 단명(短命)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어린 나이에 가족들의 잇단 죽음이라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던 스님은 이후 서울로 상경,
이화학당에 입학하며 학업을 이어나갔다.
이후 동경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스님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여성 잡지를 통해 신여성운동론을 전개했다.
특히 화가 나혜석과 더불어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외치며 개화기 신여성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던 스님이 불가(佛家)에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백성욱 박사와의 만남 이후부터다.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당시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백 박사와의 만남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고리타분하게만 여겼던 불교 속에 그녀가 그토록 오랫동안 꿈꿔왔던 자유와 평등의 세계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1928년 스님의 나이 33세 되던 해, 불문에 들어선 스님은 수행에 있어서도 남달랐다.
만공 스님의 지도편달로 오후불식, 장좌불와는 물론 목숨을 건 구도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해가 흘러 마침내 스님은
‘고인(古人)의 속임수에 헤매고 고뇌한 이 예로부터 그 얼마인가.
큰 웃음 한소리에 설리(雪裏)에 도화(桃花)가 만발하여 산과 들이 붉었네.’라는
오도송을 부를 수 있었다.
스님은 이후 중생제도와 비구니 스님의 위상을 회복하는 일에 앞장섰다.
특히 스님은 『어느 수도인의 회상』, 『청춘을 불사르고』 등 숱한 저술을 통해
불교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으며
당시 이렇다 할 비구니 수행처 하나 변변치 않았던 한국불교에 비구니총림원을 추진하는 등
후학 비구니들을 위한 일에도 앞장섰다.
그렇게 시대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한 평생을 꿋꿋이 살았던 일엽 스님은
1971년 1월 28일 세수 76세, 법랍 43세로 입적했다.
가상인터뷰 2007/12/02
▷목사의 맏딸로 태어나서 대학교육까지 받았다면 자타가 인정하는 ‘신여성’인데 어떻게 불교와 인연이 됐나요?
“대학을 졸업하고도 오랫동안 나는 신의 존재를 확신했습니다. 신을 믿으면 천당엘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믿었죠.
여덟 살 때부터 가졌던 꿈도 전도부인으로 복음을 널리 알려 비기독교인들을 지옥의 불에서 구하겠다고 생각했었으니까요. 나중에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졌을 때에도 전통적 가치는 내겐 저항의 대상일 뿐이었지요.
하지만 백성욱 박사님과의 인연으로 비로소 불교를 접하게 됐고,
깨달음이 대자유인이 되는 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이제와 생각건대 불교만 불교가 아니라 각각 이름은 다를지언정 모든 종교가 다 불교였던 것이지요.”
▷그럼 백 박사님과의 인연으로 출가를 하신 건가요?
“결과적으로는 그런 셈이죠. 그 분이 수행한다고 어느 날 홀연히 금강산으로 떠났고 나는 절망감에 사로 잡혔죠.
그러나 곧 나도 불교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수행에 전념하는 한편 불교잡지에 글을 쓰기도 했죠.
그러면서 오히려 불교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고 나중에는 살아서 이 몸도 죽어서 이 혼까지도 부처님께 그만 다
바쳐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거죠.
물론 만공 큰스님께서 세상을 버리고 산에 와서 하는 공부는 ‘먼저 살고 보자’는 것이라는 말씀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신여성운동을 이끌었던 스님의 출가에 대해 당시 세간에서는 잇따른 결혼과 사랑에 대한 실패로 인한
도피라고 해석했는데 그런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나는 출가 전부터 자유를 한 개인의 타고난 권리로 보았고
불가에 귀의한 출가자가 되어서도 나는 여전히 자유를 한 인간의 실존적 권리로 보았지요.
언뜻 겉으로 보기에는 내 삶이 극단적인 삶의 변화를 거쳤지만
내 자신에게 각각의 다른 삶의 단계들은 모두 내 정체성과 자아를 찾아가는 노정이었습니다.”
▷『청춘을 불사르고』는 60년대 베스트셀러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꾸준히 찾는 책입니다.
유려한 문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구구절절한 옛 사랑 얘기를 비롯해 파격적인 내용들이 많은 것도 한 이유일 것 같습니다.
고희를 앞둔 나이에 법문집도 아니고 이런 종류의 책을 쓴 이유가 무엇인가요?
“중생의 삶이란 행복과 불행, 사랑과 미움 속에서 기뻐하고 눈물 흘리는 존재지요.
그들에게 내 이야기를 통해 도움을 주고자하는 카운슬러의 역할을 자청한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출가하게 된 계기가 B씨 때문이고 입산 후 13년 뒤에는 그가 보낸 소포를 보자
옛 감정이 물밀 듯 솟아올랐다는 등 솔직하다 못해 지나친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런 탓에 일각에서는 ‘비구니 스님들이 출가하는 건 실연 때문’이라는 그릇된 선입견을 갖도록 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실제 이 책이 출간된 지 얼마 후 발표된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가요에서는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아, 아, 아,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는 가사의 내용도 그런 맥락 아닌가요?
“그런 점이 분명 있지요. 그래서 고고한 얘기나 할까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진솔하지 못하면서 그럴 듯하게 뻔지르르 포장해 얘기하는 것은 결국 위선이라고 판단했지요.
자기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자신의 허물이나 수준을 드러낼 때
대중들의 공감도가 높아지고 자기발전도 있지 않겠습니까.
또 있는 듯 없는 듯 여겨지던 비구니의 존재를 알려야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요.”
▷서구사상에 익숙한 상태에서 만난 동양사상이 상당히 생소했을 것 같은데요?
“불교는 내게 파랑새였습니다. 물속에서 목말라하는 하는 물고기처럼 나는 밖으로 밖으로만 찾아 헤맸지만
정작 보물은 바로 이곳, 내 안에 있었던 거지요.
불교적 사고방식은 결코 근대성에 반대되는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근대성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나가 없다’는 무아(無我)사상이 강조됩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귀의불(歸依佛)이 곧 귀의자아(歸依自我)’라고 할 정도로 ‘나’를 강조합니다.
혹 그것이 불교와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요?
“내가 얘기하는 ‘나’는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심에 끄달리는 ‘나’가 물론 아닙니다.
‘소아(小我)’가 극복된 ‘대아(大我)’요, 번뇌를 여읜 ‘진아(眞我)’입니다.
그런데 굳이 ‘나’를 강조하는 것은 ‘무아’라고 하면 대중이 너무 어렵게 여기기 때문에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토록 사랑을 강조했던 이유도 있었겠군요?
“처음에는 남녀 관계만 사랑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나중에는 사랑이란 우주 전체의 힘이며
생령 본체의 생사가 걸린 인간의 가장 큰 문제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랑의 근본을 알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려고 출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상을 버리고 산에 들어와서 처음 하는 공부는 먼저 ‘살고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자기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하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일체애(一切愛)와 평등애(平等愛), 즉 자비심을 얻어 쓸 수 있는 것이지요.”
▷스님께서는 여러 번 이혼했을 뿐 아니라 일본 명문가 오다 세이조와 사랑을 해 아이를 낳을 정도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쩌면 ‘사랑’에 충실했다고도 할 수 있는데 만약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다시 그 사람들과 사랑을 하겠습니까?
“당시 나의 연애는 사랑이라기보다 절망 속에서 지푸라기를 잡기 위한 갈애에 가까웠지요.
다시 돌아간다면 얽매지도 않고 얽매이지도 않는 멋진 사랑을 해보고 싶습니다.”
참고자료
김일엽, 『청춘을 불사르고』·『일엽선문』·『미래세가 다하고 남도록』·『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박진영 「김일엽 : 한국불교와 근대성의 또 하나의 만남」 등
일엽스님 어록
“나는 이 몸이나 이 혼의 의존이 아닌 불출구(不出口)의 나다. 두려울 것은 없다.
우주가 무장을 하고 대든다 해도 나를 이길 수 있는 인간은 그 생기기 이전에 있었다.
천당과 지옥은 상대적인 것, 설사 지옥에 가서라도 내 마음을 내가 부리면 이에서 독립하여 초월할 수 있다.”
“누굴 믿으나 극치를 이루면 각(覺)이 되어 구원을 얻게 된다. 백척간두의 낭떠러지에서는 나를 생각지 말아야 한다.
나를 던짐으로써 모든 것을 완전히 잊는 무아의 경지가 불심이 아니겠는가.
우선 인력(人力)으로 못할 일이 현금적(現今的)으로 이루어질 때 믿음이 는다.
믿음의 성장이 정신력이고 정신력이 바로 삶의 바탕이며 인간의 본체인 것이다.”
“내가 할 도리라면 나를 흙이나 걸레처럼 아낌없이 쓰련다.
흙은 아무리 써도 단단해지고 걸레는 더러운 것을 훔쳐내므로 그 자리는 언제나 깨끗하게 남아있다.”
찬탄과 공경
“한 잎사귀 조각배가 험한 바다 헤쳐가서 고해를 다 건너 피안에 다달았네.
돌아가고 오는 것이 사바세계의 일이니 언제나 중생을 제도하여 부처의 은혜를 갚으리.”
(전 조계종 종정 청담 스님)
“날을 맞도록 보고 싶고 밤이 다하도록 보고 싶고 일생이 다하도록 보고 싶었던 것이 대해노니 한 마디 할 것 없소.
이것이 일엽 스님의 본래 면목이로다. 필경에 여(如)하오. 무(無)…” (전 망월사 주지 춘성 스님)
“청춘이 모두 꿈임을 홀연히 깨닫고 바른 생각 굳건히 지켜 자기 사(事)를 밝히셨네.
만 가지 인연을 한꺼번에 쉬어 스스로 태평을 찾으니 한 잎사귀 봄 광명, 눈(眼) 가운데 살았네.”
(덕숭총림 방장 원담 스님)
환희대는 만공선사가 창건하고 일엽선사가 만년에 주석(駐錫)하였던 곳으로,
일엽선사가 입적한 후 孫上佐인 月松, 淨眞 두 스님이 원통보전을 건립하였다.
수덕사 환희대는 일엽스님의 견성암이 있던 자리라 한다.
환희대에는 원통보전이 새로 근사하게 놓여 있고 그 앞에 파초 두 그루가 남국의 풍경을 자아내는데
파초 앞의 공간에 사과나무를 심어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걸 보니 공간배치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듯한데
내 작은 가슴으로는 알 길이 없다.
고암 이응노가 1967년 동백림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후,
심신을 추스르기 위하여 머물렀을 때
자연석 너럭바위에 문자를 추상화 기법으로 암각화한 작품이 뒷마당을 지키고 있다.
수덕여관 건물은 이 화백의 부인인 박귀옥씨가 2001년 작고하면서
운영이 어려워져 현 건물소유주인 이응로 화백의 장조카인 이씨가 경매 처분하려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마당에 있는 이화백의 암각화 2 점에 대한 가격 산정을 둘러싼
토지주 수덕사 측과의 이견차로 인해 경매가 무산되면서
지금까지 관리를 하지 않고 방치돼 온 것으로 주민들은 전하고 있다.
수덕여관이 지어진 때는 정확하지 않다.
1939년 무렵 화가 나혜석(1896∼1948 )이 이혼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수덕사에서 수행중이던 친구 일엽(1896∼1971) 스님을 찾아왔다가
수덕여관에서 눌러앉아 해방 무렵까지 머물렀던 것으로 미뤄,
적어도 70년 가까이 된 건물로 추정된다
출처 : ♡추억속의 중년♡
글쓴이 : 윤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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