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리 시인의 ‘치자꽃 설화’
산중에 출가한 스님의 옛 연인이 찾아온 모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돌려보내고 설운 눈물 흘리는 스님을
시속의 화자가 종탑 뒤에 숨어서 보고야 말았습니다.
여인은 치자꽃 아래 오래 서 있다 쑥꾹새 울음소리를 들으며 산길을 내려가고
울부짖듯 기도하는 스님의 목탁 소리만 홀로 바닥을 뒹굽니다.
詩속의 화자는 괜시리 자기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어려운 것이라고’ 합니다.
이 시가 수록된 시집 표지 제목이 ‘이 환장한 봄날에’입니다.
이 환장할 봄날에 당신의 사랑은 안녕하신지요.

치자꽃 설화 / 박규리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서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가랑비 엷게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꾹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 출처 박규리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 창비. 2004.
찾아온 연인을 달래고 달래서 돌려보내고
서러운 마음을 목탁 두드려 가라앉히려는 스님.
그 스님의 품이 그리워 찾아왔건만
봄비 맞으며 치자나무 아래 슬피 울며 앉아있다가 돌아서야만 하는 여인.
스님의 염불소리는 그리도 오래도록 이어지는가.
뻐꾸기는 울어 대는데...
마치 내가 스님이 된 것 같아
가슴이 무너지듯 짠하다.
'세상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둘 중 하나 (0) | 2025.03.10 |
---|---|
스위스에서 안락사(조력사망) (0) | 2025.03.09 |
乘物以遊心 (0) | 2025.03.08 |
漢文 그리고 늦깎이 공부 (0) | 2025.03.07 |
대한민국헌법 (1) | 2025.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