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代 名醫 列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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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편작(扁鵲) - 기적적인 치료술을 행한 名醫 편작은 한의학의 기초를 마련한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본래의 이름은 진월인(秦越人)이었는데, 편작이라는 이름은 당시에 뛰어난 의사를 부를 때 별명처럼 불렀던 호칭이었던것이 후대로 이어지면서 진월인을 지칭하는 고유호칭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그는 전국시대로 생각되는 대략 기원전 5세기경에 생존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는 여관의 지배인인 사장(舍長)을 하였다. 손님인 장상군(長桑君)이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비방(秘方)을 편작에게 전해주고, 품에 지니고 있었던 약물을 전해주니, 이를 받아 상지수(上池水)로 복용한 후에 담장을 꿰뚫어 사람을 볼 수 있는 초능력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그는 이때 획득한 능력을 가지고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기적적인 치료술을 행한다.그는 괵나라의 태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궁궐 문 아래로 가서 중서자(中庶子)라는 관직을 가진 사람과 문답한다. 중서자는 여러 가지 이론을 들어 태자의 병을 설명하였지만, 편작은 태자의 병명을 시궐(尸厥)로 인식하고 그 증거로 이명(耳鳴)과 비장(鼻張)을 들고 있다. 그가 이윽고 궁궐로 불리어 들어가 태자를 치료할 때 침을 사용한다. 사기(史記) 원문에는 제자 자양(子陽)으로 하여금 금속침을 갈고 돌침을 갈도록 하여 삼양오회(三陽五會)에 침을 놓아 태자를 소생시켰다고 되어 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편작이 제나라를 지나다가 환후(桓候)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편작이 조정에 들어가 환후를 만나 말하기를 '귀하께선 병이 주리에 있으니 치료하시지 않으신다면 깊어질 것입니다.' 환후가 말하기를 '과인은 병이 없다.' 편작이 물러간 후 환후가 좌우에 있는 중신들에게 말하였다. '의사들은 이익을 좋아하는도다. 병 없는 사람을 치료하여 공명을 도모한다.' 5일이 지난 후에 편작이 다시 환후를 뵙고 말하기를 '귀하께서는 병이 혈맥에 있으니 치료하시지 않으신다면 깊어질까 두렵소이다.' 환후가 말하기를 '과인은 병이 없다.' 편작이 물러간 후 환후는 기분이 나빴다. 5일이 지난 후에 편작이 다시 뵙고 말하기를 '귀하께서는 병이 장위 사이에 있으니 치료하시지 않으신다면 장차 깊어질 것입니다.' 환후가 이 말에 대꾸하지 않자 편작은 물러갔다. 환후는 기분이 나빴다. 다시 5일이 지난 후에 편작이 환후를 뵙고는 환후를 보자마자 달아나 버렸다. 환후가 사람을 시켜 그 연고를 알아보니 편작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병이 주리에 있으면 탕위가 미칠 수 있고 혈맥에 있으면 침석이 미칠 수 있고 장위에 있으면 약술이 미칠 수 있지만 골수에 있으면 사명이라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이제 병이 골수에 있으니 신은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5일이 지난 후 환후의 몸은 병들었다. 이에 사람을 시켜 편작을 불렀지만 편작은 이미 도망해버렸다. 환후는 마침내 죽고 말았다. 편작은 투시를 통해 환후의 질병을 진단하고 있다. 초기에 주리에 었던 병사가 혈맥 장위 골수의 순서로 깊이 들어가 종내는 치료될 수 없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혈맥에 있는 병사를 치료하는 서 치료 할 수 있고 혈맥에 있으면 침석으로 다스릴 수 있고 장위에 있으면 약술로 치료할 수 있지만, 골수에 있으면 어찌할 수 없다고 하였다. 약물과 침과 약술의 치료영역을 상세하게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치료영역의 전문화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치료영역의 전문화의 시작은 무의(巫醫)와 전업의(專業醫)의 분화로부터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무의란, 그자 그대로 무당이면서 의사인 의료집단을 지칭한다. 이들은 은나라 말기까지는 의사계층이면서 권력의 핵심과 가까이 있는 귀족계층이었다. 은나라 사람들보다 합리적인 사상을 가진 주나라의 귀족들이 정권을 잡게되면서 이들 무의계층들은 점차로 힘을 상실하게 되고 체계적인 의학지식을 지닌 전업의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춘추시대에 이미 의화(醫和)나 의화같은 유명한 전업의가 출현하였다. 춘추시대 이래로 의사와 무당은 분업화 되어 의관(醫官), 무관(巫官)은 각각 맡은 관직이 분리되게 되었다. 주례에 무 및 축과 관련된 관직들을 춘관종백(春官宗伯)에, 의학과 관련된 관직들을 천관총재(天官?宰)에 집어넣어 각각의 업무를 관찰하도록 한 기록이 있는 것은 이 시기에 벌써 의사와 무당이 그 관련영역이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작도 무술에 반대하여 무당만을 믿고 의사를 믿지 않는 것을 육불치(六不治) 가운데 하나에 포함시켰다. 전업의의 보편화와 함께 일기 시작한 것은 전문적 분과의 형성이다. 한의학의 전문분과의 형성과 관련하여, 편작에 대한 기록은 두가지 측면을 시사해 준다. 먼저, 편작은 당시의 진단법인 망문문절(望聞問切) 등의 방법을 총결하여 임상실제에 잘 응용하고 있다. 그는 특히 맥진에 정통하여 맥학의 창조자로 추앙된다. 이것은 진단학의 전문 분과화와 관련한 그의 공적이다. 둘째, 그는 실제 수요와 풍속에 따라 자신의 전문과를 바꾸고 있다. 그는 조나라에 있을 때는 대하의(婦人科)가 되고 주나라에 있을 때는 耳目鼻醫, 진나라에 가서는 소아의(小兒醫)가 되어 이름을 떨쳤다. 이것은 당시에 이미 의학의 분과에 관한 인식이 보편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목차] 2. 장중경(張仲景) - 벼슬버리고 의학 연구 한의학사에서 장중경만큼 영향력이 지대한 인물도 드물다. 후한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장중경이 활동한 기원 후 2세기는 전염병이 창궐한 시기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서기 37년에서 50년까지 7차례에 걸쳐 전염병이 유행, 171년에서 185년에 걸쳐 5차례 걸친 전염병 유행 등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당시의 의학가들은 창궐하는 질병들의 예방과 치료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어 임상경험과 이론을 결합시킨 서적들을 간행하였다. 이 가운데 하나가 장중경의 (傷寒雜病論) 이다. 스승 뛰어넘는 학식과 경험 장중경의 이름이 기(機)로, 남양(南陽)사람이었다. 한나라 영제 때(서기 168-189)에는 장사태수(長沙太守)를 역임하기도 했다. 잦은 전쟁으로 천하가 시끄러운 시기에 벼슬을 하였던 장중경은, 당시 정치가 부패한데다 전염병까지 유행하여 자신의 친척들이 수없이 병으로 죽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의학연구에 정진하였다. 그는 고향의 의학자 장백조(張伯祖)를 스승으로 모시고 의학학습을 진행하였는데, 당시의 사람들은 장중경이 그의 스승을 뛰어넘는 학식과 경험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장중경이 상한잡병론을 저술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장중경의 저작은 상한잡병론 만이 아니다. 療婦人方, 五臟論, 口齒論 등도 그의 저작이지만 애석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상한잡병론은 傷寒과 雜病의 양대 부분으로 나뉜다. 당시에 시국이 혼란스러워 상한잡병론은 소실되었다가 3세기에 이르러 晋代의 의학자 王叔和의 정리를 거쳐 상한에 관한 부분은 傷寒論이라는 별도의 책으로 독립되고 잡병에 해당하는 부분은 없어졌다가 宋나라 仁宗 때 校正醫書局에서 당시까지 존재했던 殘本들을 모아 林億 등의 교정과 정리를 거쳐 금궤요략(金?要略)이라고 명명하였다. 辨證論治의 원칙을 확립한 傷寒雜病論 한의학에서는 의사가 병을 살필 때 제일 먼저 환자가 어떤 증상인가를 이해해야만 한다. 두통, 발열, 해수 등과 환자의 표정, 환자의 맥 등 一系列의 증상을 증후군이라고하는데, 이들 증후군을 하나로 종합한 것을 證이라고 한다. 이 증을 자세히 변별하면 치료를 의논할 수 있게 되어 이후에 처방을 내어 用藥을 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辨證論治라고 한다. 장중경은 상한잡병론의 序文에서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책을 지음에 素問, 구권, 팔십일난, 陰陽大論, 胎?藥錄, 平脈辨證, 등의 책을 사용하여 상한잡병론을 만들었으니 모두 16권이다.' 이로 보건대 이 책은 고대로부터 이어온 연구를 기초로 자신의 임상경험을 결합하여만든 것이다. 장중경이 생존한 東漢말기는 사회적으로 巫術的인 치료술이 널리 횡행한 시기이다. 이에 따라 질병의 원인을 귀신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상한잡병론의 自序에서 장중경은 이와 같이 말한다. '나의 친척들은많아 예전에는 200여명이었다. 그런데 建安 紀年(196년) 이래로 10년도 지나지않아 죽은 사람이 3분의 2였으며 그 가운데 상한병으로 죽은 자가 10분의 7이었다.…… 졸연히 사악한 바람의 기운을 만나거나 정상이 아닌 질병을 만나서 질병이 생기면 벌벌 떨면서 뜻과 절개를 굽히고 巫術과 呪文에 의지하고 하늘에 탓을 돌리고는 가만히 죽고 만다.' 장중경은 이와 같이 미신을 타파하고자 하였기에 정확한 관점에서 상한잡병론을 저술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장중경의 저작정신과 그의 辨證論治의 기본원칙은 八網辨證과 六經論治로 귀결될 수 있다. 팔망변증은이 책 속을 꿰뚫고 있는 변증론치의 구체적 원칙이다. 이른바 八網은 (陰陽, 表裏, 寒熱, 虛實) 四診(望, 聞, 問, 切)으로 질병의 부위와 성질을 분석하여 귀납시킨 것이다. 辨證할 때에는 또한 환자의 체질과 발병소인의 강약을 연계 시켜야 한다. 六經論治는 黃帝內經.素問에 나오는 六經理論을 장중경이 나름대로 운용하여 진일보 발전시킨 것이다. 이른바 六經은 三陽經(태양경, 양명경, 소양경)과 三陰經(태음, 소음, 궐음)이다. 장중경은 질병이 발전하는 과정 중 출현하는 각종 증상을 환자 체질의 강약에 의거하여 생리, 병리적 변화현상과 병세의 진퇴완급 등의 변화를 이끌어내어 이를 종합하고 분석하여 삼양경, 三陰經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여섯 개의 증후유형으로 귀납시켰다. 삼양경증은 熱症, 實證인 경우가 많고, 삼음경증은 寒症, 虛症인 경우가 많다. 八網辨證과 六經論治에는 汗, 吐, 下, 和, 溫, 淸, 補, 消 등의 치료방법이 사용되었다. 질병이 인체의 항병능력인 精氣와 발병인장인 邪氣간의 싸움의 표현이므로 그 결과는 사기의 융성 혹은 정기의 쇠퇴이거나 정기가 사기를 이겨내어 회복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까닭에 치료할 때는 扶正祛邪나 汗吐下和溫淸補消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이것은 모두 부정거사의 원칙을 바탕으로 제정한 것이다.이외에도 장중경은 舍脈從證 舍證從脈의 방법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질병을 치료할 때 병의 標本緩急에 의거하여 先表後裏, 先裏後表 및 表裏兼治의 방법을 운용하는 것이다. 아울러 치료의 금기와 침구요법 등에 대해서도 논하였다. 韓醫學 史에서의 意義 1700여년전에 활동한 장중경은 한의학의 발전을 촉진시킨 인물이다. 그의 저술 傷寒論과 金궤要略은 2세기 이전까지 이어져 온 의학지식과 경험을 총결하여 辨證論治의 원칙을 확립시킨 巨著이다. 엄정하게 선택된 처방들은 질병의 예방과 치료의 신기원을 이룩한 것이다. 이후 역대 의학자들은 장중경의 학설을 여러가지 측면에서 더욱 연구하여 상한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목차] 3. 화타(華陀) - 外科手術에도 탁월한 능력발휘 화타는 字가 元化로, 沛國의 ?땅 사람이다. 그의 의술은 매우 뛰어나서 內科, 婦人科, 小兒科, 鍼灸療法 등에 정통하였고 아울러 外科手術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후세에 그를 外科醫術의 始祖라고 불렀다. 痲醉術의 發明 화타는 동한 말기에서 삼국시대(서기 2~3세기)에 걸쳐 생존하였는데, 당시 하남성, 안휘성, 강소성 일대는 魏, 吳, 蜀 삼국이 다투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이로 인해 전염병, 외상 등으로 고통을 받았다.그러나 마취약이 없어서 외상을 입은 사람은 수술을 받으면서 통증을 견디어낼 수밖에 없었다. 화타는 자신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마취작용이 있는 약물들로 처방을 구성하여 이를 麻沸散이라고 명명하고 이를 외과수술에 사용하여 여러차례 효과를 보았다. 기록에 따르면 어느날 복통을 호소하는 환자를 진찰하고 환자의 비장이 썩어버린 것을 확인하고는 수술할 것을 결정하였다. 화타는 환자에게 마비산을 술에 타서 복용시키니 환자는 마취가 되어 바로 수술에 들어가 배를 가르고 환부를 절제하고는 봉합한 후에 새살이 돋아나게 하는 고약을 붙이고 조리약을 복용시키니 한달만에 회복되었다고 한다. 화타가 서기 2-3세기경에 발명한 마비산은 서양의학에서 마취제를 19세기부터 사용한 것에 비추어 본다면 1600여 년이나 앞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화타는 동양에서 최초일 뿐 아니라 세계에서 최초 마취제를 사용하여 수술을 한 의사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뛰어난 鍼灸術 그는 침구술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魏志에서는 그의 능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만약 뜸을 떠주어야 한다면 한두 곳만 떠주었으며 떠주더라도 칠팔장을 넘기지 않아도 병이 없어졌다. 만약 침을 놓아야 한다면 또한 한 두곳만 놓아주었으며 침을 놓으면서도 어떤 곳의 기를 끌어주어야 한다고 말하였다.”이것은 그가 침술에 뛰어났음을 묘사한 것이다. 당시의 정치가인 曹操가 風眩證을 앓아서 항상 머리가 아팠다. 이에 사람을 보내 화타로 하여금 치료하도록 하였다. 화타는 曹操의 병이 風邪로 인하여 일어난 것으로 보고 그의 머리에 침을 몇개 놓자 곧바로 나았다. 한번은 이씨 성을 가진 장군의 아내가 병이 들어 화타를 불렀다. 화타는 부인의 병이 유산이 되었는데 죽은 아이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진단하였다. 그러나 이장군은 아이가 이미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며칠이 지난 후에 통증이 심해지자 화타가 다시 맥을 잡아보고 쌍둥이였는데 먼저 나온 죽은 아기가 피를 많이 흘려 나중에 나와야 할 아이가 나오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약물을 주고 침을 놓으니 과연 죽은 아이가 나왔다. 寄生蟲病을 치료하다 어느날 화타는 길을 가다가 목구멍이 막힌 환자를 보았다. 그는 이 환자가 기생충 때문에 그런 것으로 여기고 그 환자에게 '아까 오던 길모퉁이에 떡을 파는 사람을 보았는데 개구리밥으로 만든 양념이 매우 신맛이 났으니 3승 정도를 마시면 나을 것이오'라고 알려주었다. 환자가 그의 말대로 하니 과연 커다란 기생충을 토해내고는 목구멍이 뚫렸다. 이외에도 기생충을 치료한 치험 사례가있다. 廣陵太守인 陳登이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얼굴이 붉고 밥을 못 먹는 병을 앓았다. 화타는 이를 진찰해보고 '당신의 위 속에 기생충이 있어서 內疽를 일으키려 합니다. 이것은 비린내가 나는 飮食物로 인해서 생긴 일입니다.' 라고말하였다. 이를 보면 화타는 이미 기생충을 갖고 있는 날고기나 육회를 먹으면 기생충에 감염된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五禽戱의 창조 화타는 병을 치료하면서 더욱 예방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옛부터 전해오는 不治己病治未病의 사상을 계승하여, 사람이 운동에 힘써 체질을 증강시키면 질병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그의 학생인 吳普에게 다음과 같이말하였다. '인체는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하지만 않으면 된다. 몸을 움직이면 곡기가 사그라져 혈맥이 유통되어 질병이 생기지 않으니, 마치 지도리가 썩지 않는 것과 같다.' 그는 또한 옛사람들이 장수한 이치를 학생들에게 알려주었는데 '이런 까닭으로 옛날의 신선은 導引法을 행하였으니 곰이 나무에 매달리거나 새가 목을 길게 빼는 것과 허리와 몸통을 당겨 관절을 모두 움직임으로써 젊음을 유지했다.' 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화타는 자연계의 다섯 가지 동물의 동작을 모방하여 일종의 의료체조를 고안해 냈는데 '五禽之戱라 명하니, 첫째는 호랑이, 둘째는 사슴, 셋째는 곰, 넷째는 원숭이, 다섯째는 새인데 또한 이로써질병을 고치기도 한다.' 라고 하였다. 학생인 오보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어 매일 오금희의 수련을 계속하여 신체가 매우 건강해지니 '나이가 90에 이르러도 귀와 눈이 밝고 치아가 견실하다.' 라고 하였다. 오금희는 계속 후세에 전해졌는데, 唐代 柳宗元의 詩詞에서도 '聞道?爲五禽戱' 라는 기재가 있다. 明代의 周履靖은 오금희의 동작을 그림으로 그려 『赤鳳髓』라는 책을 펴냈다. 오늘날 행해지는 민간 의료체조에도 여전히 오금희의 개별동작들이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높은 인품과 덕을 지녀 화타는 뛰어난 의술뿐만 아니라 높은 인품과 덕을 지녀 명리와 부귀를 구하지 않았고 조정에 나아가 관리가 되어 봉록을 받기보다는 각지를 다니면서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주는 민간의 의사로 남기를 바랐다. 『後漢書』의 기록을 보면 大尉(고급무관) 黃宛이 漢나라 獻帝인 劉協에게 화타를 조정의 관리로 추천하였고, 후에 또 沛相(지방장관) 陳珪가 그를 孝廉으로 추천하였으나 화타는 모두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大丞相이었던 曹操는 화타에게 몇차례 자신의 侍醫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부인의 병을 이유로 조조에게서 떠났다. 조조는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許昌으로 빨리 돌아올 것을 재촉했으나 화타가 계속 명을 따르지 않자 마침내 허위로 죄목을 지어내어 붙잡아 죄를 묻도록 하였다. 화타는 폭압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명리에 유혹받지 않았으니 몸은 비록 옥에 갇혀 있었으나 여전히 백성들의 疾苦를 잊지 않아 조조가 요구하는 바를 단호히 거절했다. 또한 화타는 앞일을 예감하고 가지고 있던 의서 한 권을 옥졸에게 주면서 잘 간직하여 후세에 전해질 수 있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옥졸은 죄를 물을까 두려워하여 받으려 하지 않았다. 화타는 매우 실망하여 크게 노한 후 의서를 횃불에 태워 버렸으며 자신도 조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화타의 죽음은 그의 저작의 망실과 더불어 의학의 역사상 큰 손실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화타의 저작은 당시에 전부 불타버린 게 아니었는데, 남아서 전해진 것으로『觀形察聲 三部脈經』『枕中灸刺經』『華陀方』『五禽六氣訣』등이 있어 漢代 이후의 의서 중에 찾아 볼 수 있었으나 후에 이들 저작들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中藏經』과 『玄門脈訣內照圖』『華陀方』등은 모두 후세의 사람이 화타의 이름을 빌어 지어 낸 책들이다. 화타의 저작들은 비록 실전되었지만 화타의 이름은 그의 전통의학에 대한 공헌과 더불어 영원토록 기억될 것이다.『後漢書』『三國志』에 모두 그에 대한 전기가 실려 있으며 후세 사람들은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가 수학했던 곳인 揚州와 徐州에 그의 묘지를 만들고 華祖廟를 세웠다. 이는 모두 화타에 대한 존경과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4. 갈홍(葛洪) - 주後備急方의 著者 불로장수 추구한 道家 갈홍(281-341)은 동진시대에 유명한 의학자이며 道家이다. 그는 오랜 기간 煉丹術을 연구하여 불로 장수를 추구하였는데 이를 위해 물질의 화학적 변화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여 丹藥에 대한 공적이 많았다. 그는 민간에 전해오는 의학지식과 경험을 모으고 여기에 자신의 경험을 첨가해 '?後備急方'을 저술하였다. 이 제목에서 주후(?後)의 의미는 위급할 때 팔꿈치 뒤의 옷깃 안에서 재빨리 꺼내볼 수있도록 간편하면서 요긴한 내용을 적은 지면 안에 담고있기 때문이다. 비급(備急)이라는 의미에 맞게 이 책에서는 땅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값싼 약물들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갈홍은 서문에서 비급을 표방하는 책들에서 조차도 담고 있는 약물들이 값비싼 경우가 많다고 비난하고 이 책에서는 첫째 효험이 있을 것, 둘째 편리할 것, 셋째 가격이 저렴할 것 등 세 가지에 주안점을 맞혔음을 주장하였다. 이 책은 앞에 갑자기 발생하는 中惡 尸厥 客? 心痛 腹痛 囍亂 中風 暴渾 昏迷暴死 등의 질병들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中風 昏迷 暴死 腹痛과 같은 위급한 병이 급작스럽게 발생하였을 때 人中穴을 손톱으로 눌러주는 간편한 방법을 권하여 위급한 상황에 활용하도록 하고 있다. 보통 잘 발생하는 질병에 대해서도 상세히 써놓고 있다. 囍亂 傷寒 ?疾 結核병 天花 痲? 장기생충과 같은 전염병과 기생충과 관련된 질병들 각기병 같은 영양결핍성질환 음식곤란 식중독 같은 위장질환 癲癎 狂躁 같은 정신병 膿腫 종괴 蟲獸咬傷疥瘡 피부병 같은 외과질환 등이 그것이다. 또한 五官科疾患 약물중독 酒醉誤呑異物 돌발 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다루고있는 질병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여 임상각과에 대한 내용들을 총망라하고 있다고할만하다. 천연두를 다룬 최초의 저서 이 책은 天花(천연두)의 증상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최초의 서적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천연두의 증상은 두면부와 사지에 완두콩 만한 적은 포진이 생겨난 이후에 단기간 내에 전신으로 퍼지고 포진 안에 하얀 진물이 잡히는 것이다. 각기병에 대해서 이 병은 영남인들이 많이 생긴다고 하였다.그 증상은 초기에 미미하게 하지가 우리하게 아프면서 감각이 무디어지는 것인데 양쪽 대퇴부가 약간 붓는 것을 느끼기도 하고 혹 길을 걸을 때 무력감을 느끼고 혹 아랫배가 감각이 둔해지는 것이다. 어떤 각기병은 아랫배까지 부어올라 죽게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이미 각기병의 위급증인 심장에까지 영향을 미친 각기병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후비급방'에 묘사된 마풍병의 증상은 매우 구체적이다. 이 병이 시작될 때 피부의 감각이 점차 무디어지는데 어떤 경우에는 피부 위로 벌레가 기어가는듯한 느낌이 생기기도 하고 혹은 피부가 적흑색으로 바뀌기도 한다고 하였다.그리고 이러한 병이 생긴 환자는 격리시켜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진단에 대해서도 잘 기록하고 있다. 황달병 환자가 노랗게 변하는 과정은 먼저 눈의 각막에서부터 노랗게 변하기 시작하여 점차 얼굴과 전신이 모두 노랗게 되는 것이라 하였다. 이것을 진단하려면 소변을 받아서 검사해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 방법은 받은 소변을 백지 위에 쏟아서 그 색깔의 변화를 보는 것이다. 이외에도 손가락으로 부종을 검사하는 방법을 기록하였다. 즉 손가락으로 부은 곳을 누르면 손가락 자국이 남는다는 것이다. 질병의 예방에 대해서도 말한다. 질병이 유행하는 해에는 모든 사람들이 매 달마다 약물을 복용하여 질병을 예방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水腫과 腹滿이 있는 환자가 소금을 주의해야한다는 주장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타당하다. 또한 콩밥을 먹으라든지 신선한 물고기를 먹으라든지 양고기나 거위등이 영양가가 풍부한 음식이라고주장하고 있다. 임상진료에 공헌한 귀중 자료 질병의 치료에 있어서도 약물 침구 안마 외에 冷敷 熱敷 水療 등의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외에도 주후비급방 에는 의학문헌을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는데 인용된 문헌 가운데 현재 이미 없어진 것들도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임상진료에 도움이 되는 서적일 뿐 아니라 옛적부터 존재했던 자료들을 보존시켜준 공헌을 한 귀중한 서적인 것이다. 주후비급방은 당시에 사용하여 효과를 본 처방들을 기록하고 黃帝 岐伯등의 이름을 가탁하지 않고 있다. 갈홍은 自序에서 다음과같이 말한다. '세속에서는 오래된 것을 귀하게 여기고 요새 것을 천하게 여기며 옛 것을 옳다하고 지금 것을 그르다 한다. 이 책이 黃帝 倉公 醫和 편작 踰?등의 이름을 가탁하지 않아서 이 책을 이용하지 않을까 두려우니 어찌 억지로 강요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옛것을 찬양하고 지금 것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이다. 비록 환경적인 한계와 시대적인 제한성으로 인하여 이 책 속의 내용이 부정확한 부분들도 존재하지만 그 학술적 성취는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다 하겠다. [목차] 5. 손사막(孫思邈) - 천금방의 저자 손사막은 당대의 걸출한 醫家로서 京兆華原(지금의 섬서성 요현)사람이며 隋 文帝開皇元年(서기 581년)에 태어나 당 高宗 永淳元年(서기 682년)에 세상을떠났다. 그는 80여 년의 풍부한 임상경험을 가졌던 醫家로서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써 여러 분야의 서적을 섭렵하여 20여세에 이미 諸子百家의 학설에 정통했다.그 후로 그는 의학에 정진하여 일생동안 온 힘을 다해 의학연구에 힘썼으니 민중들에게 의료를 행함과 동시에 唐代 이전의 의학자료를 모아 정리하고 자신의 수십 년 동안의 임상경험을 결합하여 책으로 펴내니 이 저서가 바로 千古에길이 빛나고 있는『千金方』이다. 이하 손사막의 인간적 면모와 천금방의 내용을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의사의 인성을 중시 먼저 손사막은 의사로서의 인간적 자질을 매우 중시했다. 천금방이라는 서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인명이 천금보다 귀중하니 환자에 대하여 반드시 깊은 동정심과 함께 의사로서의 책임감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또한 환자의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모두 동일하게 대해 주어야 하며 환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생각해야 한다고했다. 왕진을 갈 경우에는 행로, 시간, 기후조건 등이 좋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환자를 구해야 한다고 했으며 동시에 부지런히 공부하여 널리 의학의 원류를 탐구함으로서 실제적인 감각을 가진 의사가 되도록 당부하였다. 이렇듯 손사막은 실로 의학을 매우 숭고한 위치에 놓고 바라보았다고 할 수 있다. 천금방에 대하여 당고종 영휘3년(서기 652년) 손사막은『備急千金要方』을 완성하였는데 모두 합하여 30권으로 230여門에 걸쳐 5.300여 首의 方論을 포함하고 있다. 30년 후, 그는『千金翼方』 30권을 지으니『備急千金要方』을 보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의서 안에 손사막은 唐 이전의 經文古方을 수집했을 뿐 만아니라 대량의 민간의 單方들을 기록해 놓았으며 자신의 풍부한 의료경험을 결합하여 창조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질병의 예방, 진단, 용약처방, 침구및 식이요법 등에 거쳐 모두 상세하게 논술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白頭翁, 苦蔘, 黃連 등의 약물로 痢疾을 치료하고 常山, 蜀漆 등의 약물로 ?疾을 치료한다. 이런 약물들은 지금까지도 사용되는 것들로 현대과학에 의해서도 유용한 것으로 증명된 것들이다. 손사막은 또한 '肝補肝明目'의 이론에 근거하여 동물의 肝臟(羊肝, 牛肝등)을 사용할 것을 제시하였는데 동물의 간장에는 대량의 비타민A가 함유되어 있어 비타민A 결핍으로 인한 야맹증을 치료하는데 쓰일수 있다. 그는 각기병의 예방과 치료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는데 防風, 蜀椒 등의 약물로 각기병을 치료하는 것 외에도 왕겨를 다려 죽으로 만들어 늘 먹음으로써 각기병의 발생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하였다. 현대에 이르러 이런 약물들 및 왕겨에는 다량의 비타민B1이 함유되어 있으며 각기병이 인체내의 비타민B1의 결핍으로 발생한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손사막은 이런 질병의 인식과 치료 및 예방법에 있어 대단히 앞서 있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손사막은 특별히 부인들과 소아들의 보건위생을 강조했다. 그는 부녀자들과 소아들의 생리상의 특징이 남성, 성인과 다르다고 생각하여 치료에 있어서도 독립된 영역으로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울러 부녀자들의 임신기간에 있어 기호를 절제할 것과 성정을 조절할 것 등의 여러 주의사항들을 밝혀 난산을 예방하도록 했으며 소아의 발육과정에 대해서도 매우 자세한 관찰과 기록을 남겨 후세 사람들이 참고하도록 했다. 예를 들어 소아 치아의 생장, 언제 몸을 뒤집고 걷기 시작하는가 등의 신체 발육에 대한 설명이 거의 실제 상황에 부합되게 설명되어지고 있으며, 유모의 조건, 포유시간과 횟수, 유량과 포유위생의 상식, 소아간호의 방법 등에 대해 모두 정확하고 상세한 분석을 하고 있다. 약물학 분야에 있어도 손사막은 매우 독특한 견해를 지녔다. 그는 採藥의 시기와 가공방법을 매우 중시하여, 680여종의 상용 약물에 대해 그 채집시기를 밝혀 놓았다. 또한 그는 약물의 산지를 매우 중시하여 당시의 133개 지방에서 생산되던 519종의 약물을 기록하는 한편, 약물들을 각각 그 효능에 따라 분류해놓았다. 이런 약물학 분야의 공헌으로 인해 그는 후에 藥王으로 불리어 지게되었다. 손사막은 병을 치료하는데 뛰어났을 뿐 아니라 위생에도 힘쓸 것을 주장했다.그는 지적하기를, 욕망을 절제하고 폭음, 폭식을 하지 말 것, 음식을 천천히 먹을 것, 날고기를 먹지 말 것, 식사 후에 반드시 양치질을 할 것, 적당히 산보를 할 것, 밤중에 과식하거나 과음하지 말 것 등을 강조하였는데 그의 이런 생각은 현대의 관점으로 보아도 매우 정확하고 합리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다. 벼슬 마다하고 평생 은거 이렇듯 손사막은 의학의 많은 부분에 있어 선구적인 업적을 남겨 후세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준 바 중국 섬서성 요현 동북쪽에 있는 손사막의 고향 손종원에는 사당이 있어 그와 그 부모의 像을 모시고 있다. 그 동쪽 3리 되는 곳에 위치한 오대산은 손사막으로 인해 藥王山이라고 불리며 藥王廟가 있어 음력 2월초가 되면 성대한 묘회를 열고 있다. 그 곳에는 당 고종이 그에게 '眞人'의 칭호를 내려준 곳이라는 拜眞臺라는 장소가 있고 서쪽에는 그가 약을 씻었다는 세약지가있다. 그 뒤에는 태현동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의 隱居地였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손사막은 벼슬을 마다하고 종신토록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도교와 불교의 사상이 그에게 미친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아울러 이런 정신적 바탕은 그의 풍부한 임상경험과 결합되어 의학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병 치료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목차] 6. 왕숙화(王叔和) - 脈學의 大家 맥을 보는 것은 의학에서 질병을 진단하는 중요한 방법중 하나이다. 맥을 통한 진단은 그 역사가 매우 오래 되었는데, 중국의 고대 전적인『周禮』를 보면 맥을 통해 내장 병변을 알아낸다는 기록이 실려있다. 초기에는 맥을 頸項, 手, 足의 세 부위에서 보았는데 이 세 부위는 기육이 두텁지 않고 동맥이 피하의 얕은 곳에 있어 쉽게 진찰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三部脈法이 바로 이러한 방법이다. 이 외에도 고대의 의가들은 맥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의학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는데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왕숙화는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國家 최고의원장인 太醫令 지내 王叔和는 이름이 熙이며 중국 산서성 고평현이 고향으로 東漢 建安 15년(210년)부터 晉 太康 元年(280년) 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당시의 국가최고위원원장이라 할 수 있는 太醫令을 지냈는데 이로써 그가 당시에 지녔던 명망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역사상 魏, 晉시대는 사회현실로 인해 道家사상이 널리 퍼지고 도교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학술 분야에서도 신비적인 색채가 감돌고 있었으니 의학도 이에 예외일 수는 없어 服食 등을 통해 신선이 되고자 하는 등의 비현실적인 방법들이 진정한 의학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王叔和는 홀로 정진하여 의학의 정통을 찾아 주류 의학을 깊이 연구하였는데 특히 맥학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王叔和는 이전의 경험을 종합하고 자신이 직접 체득한 바를 결합하여 맥에 대해 더욱 잘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그의 이런 노력은 『脈經』이라는 뛰어난 저작을 낳게되었다. 脈 24종 규정 맥경은 약 십만 천여 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十卷 九十八篇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卷一의 상편에서는 맥을 24종으로 나누고 있는데 이는 이전에는 內經 이래 각 의서의 기재에 흩어져 있던 것으로 王叔和가 이를 모아서 정리한 것이다. 王叔和 는 맥을 볼 때 손가락에 느껴지는 감각에 따라 자세히 구별하여 다음과 같은 24종의 맥을 규정하고 각각의 脈象에 대해 비교적 명확히 묘사해 놓았다. '浮.壓.洪.滑.數.促.弦.緊.沈.伏.革.實.微.斡.細.軟.弱.虛.散緩.遲.結.代.動' 이는 임상의들의 맥에 대한 이해를 매우 편리하게 하였으며, 후세에도 맥상을 분류하는데 있어 기본적인 것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맥상들은 병을 알고 있을 때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므로 임상 응용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맥상의 속도 면에서 보면 박동의 횟수가 많은 것은 색맥이며, 색맥보다 더욱 빠른 것으로는 질맥이 있다. 박동의 횟수가 적은 것은 완맥과 지맥이다. 박동이 고르지 못한 것으로는 결맥.대맥.촉맥이 있으며 눌러 팽팽한 줄처럼 느껴지는 것은 긴맥이다. 맥의 大小로 말하면 부.홍.규.활.실맥 등은 모두 대맥이며, 미.침.색.복.연맥 등은 모두 소맥이다. 또한 맥상은 한 맥이 여러 가지의 맥상을 겸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완맥은 맥상이 小하고 박동의 횟수가 적은 것이다. 따라서 맥상을 자세히 구별해야 만이 비로소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게 되는것이다. 풍부한 임상경험 기술 王叔和는 맥경에서 맥을 각종 질병의 진단에 응용하는 법을 잘 설명해 놓았다. 예를 들어 중풍에 대해 '脈緊上寸口者中風,風頭痛亦如之'라 했는데 이는 중풍에 걸린 사람이 대개 동맥이 경화되어 긴맥을 나타냄을 말하는 것이다. '伏者?亂'이라함은 곽란을 앓는 사람의 혈액이 농축되어 맥상이 小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손가락에 힘을 주어 깊이 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尺脈澁, 下血下痢多汗'이라함은 진액이 과도하게 손실되어 혈액이 농축됨으로 인하여 삽맥을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疾에 대해서는 '?疾自弦, 弦數多熱, 弦遲多寒, 微則爲虛, 代散則死'라고 했는데 이는 학질을 앓는 사람이 맥박이 비교적 빠르고 맥상이 弓弦처럼 느껴지며 발열이 있을 때에는 맥박의 횟수가 많고, 열이 줄어들 때에는 횟수가 적으며 맥박이 고르지 못하거나(代) 매우 빨리 뛰면서 안정되지 못하면(散) 위태롭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王叔和는 이전의 맥학의 성취를 종합했을뿐 아니라 풍부한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고도의 임상적 내용을 기술해 놓았던것이다. 古代醫學 名著정리에도 공헌 王叔和는 맥학상의 공헌 외에도 고대 의학의 名著의 정리에도 그 공적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張仲景의 傷寒論이 변증과 치료의 규율을 세운 의학의 명저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西晉시대에 이르러 전란을 겪으면서 상한론은 散失되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王叔和는 이를 수집, 정리하여 상한론과 금궤요략의 두 가지 책으로 나누니 이로써 장중경의 저서가 후세에 계속 전해지게 되었다. 만약 王叔和의 이러한 노력이 없었더라면 후세 사람들은 장중경의 학설을 제대로 알기 힘들었을 것이며 장중경의 의학상의 공헌도 어느 정도는 낮게 평가되었을 것이고 나아가 의학의 발전에 있어서도 많은 장애를 가져왔을 것이다. 이에 대해 중국 淸代의 醫家인 徐靈胎는 '不有叔和, 焉有仲景'이라했으니 실로 적절한 언급이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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