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치고는 상당히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어제 내린 비의 뒤끝이라 바람이 세게 불고 싸늘합니다.
몸이 으실으실하니 당연히 막걸리를 먹어야 합니다.
술김에 무거운 버섯목 뒤집어 놓고, 오후엔 비닐하우스를 철거했습니다.
생각보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이 듭니다.
동생과, 후배, 그리고 아들을 모시고(?) 하루를 고되게 일했습니다.
어둑해서 일이 끝나니 동생이 수구레를 먹자고 합니다.
웬 수구레.?
소 가죽 껍질 밑에 붙은 기름덩이, 물컹물컹한 스지 같은 거.
옛날 어렸을 때,
고향 마을에 수구레 팔러 다니는 등짐 장수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두어 달에 한 번. "수구레 사려" 외치면서 무조건 우리집 대문을 들어섭니다.
인정많은 우리 엄마는 항상 밥상을 차려 대접을 합니다. 그날 저녁 반찬은 당연히 수구레였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언제부터인가 안 오십니다. 아마 돌아가신 모양이라고 엄마는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 얘기 하는 날은 엄마도 아마 수구레가 잡숫고 싶은 날이였을겝니다.
그로부터 여러해가 지난 후, 이번에는 다라이(함지박이라고 해야 하나?)에 그 무거운 수구레를 이고 다니는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집엘 드나들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도 불문곡직하고 수구레 한손을 내려 놓고 어머니가 내오시는 소반을 먹곤 하였습니다. 모두 어린시절 어려웠던 시절입니다.
60년대 초 한창 경제개발 초기. 그 무렵부터인가 수구레 장수 아줌마도 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수구레가 가죽 공장에서 가죽을 마름질할 때, 화학약품 처리 후 부산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불법 유통되는 것은 먹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한우에서 나온 수구레가 있었겠지만 시골 구석까지 판매되기엔 힘들었겠지요. 이후부터 수구레를 먹은 기억이 없습니다.
많은 세월이 지났습니다.
먹는 것이 까다로운 동생이 수구레를 먹자 합니다. 지금 세상에 누가 수구레를 먹누? 마지못해 따라갑니다.
간판도 없는 허름한 서오능 포장마차 집. 무뚝뚝한 주인 아줌마. 후배와 아들은 별로 탐탁해 하지 않습니다.
겨우 먹는 시늉만 내더니 그만 수저를 내립니다.
오랫만에 먹어보는 수구레. 부드레하면서도 쫄깃쫀득한 게 구수하고 얼큰합니다.
동생은 아주 맛있게 먹습니다. 가끔씩 이집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아마 동생도 옛날 어렸을 때를 생각하며 이 수구레를 찾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잔 술에 그만 또 얼큰해져버렸습니다.
아. 수구레.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수구레.
그 맛이 추억을 불러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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