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에 노닌다.
同學이 南田 선생 유작전에 초대했다.
동학은 남전선생의 수제자로서 이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초대장에 이 글자가 무슨 字? 결국 서실에 가서야 遊於藝라는 것을 알았다.
유어예? 論語 문구라는 것도 알게되었다.
書藝. 四書를 배운다고 몇 년째 설쳐대더니 그것도 몰라?
自愧感(자괴감)이 든다.
자연의 세계, 느낌의 세계라는 藝. 무궁무진한 상상력. 표현의 무한대.
나로서는 감히 언급할 수 없는, 저 멀리에 있는 다른 세계다.
그렇더라도, 어쩌겠나?
默而從之. 다만 그냥 따라가는 수 밖엔 없다.
보고 또 보고
드라마만 그런 게 아니다.
열 번, 백 번 ... 읽고 또 읽어야 내 것이 된다.
쓰고 또 써 봐야 나의 서체가 된다.
<伯夷傳>을 1억1만3천 번을 읽어, 이윽고 문장에 이르렀다는 김득신,
둔하면 그와 같은 끈질김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내겐 그런 치열함도 없다.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아
오죽했으면 五欠이라 自作 號를 지었겠나? ㅎ
이참에 다시 한 번 복습해 본다.
論語 述而 <제6장>에
子曰 志於道하며 據於德하며 依於仁하며 游於藝니라.
공자가 말했다. 도에 뜻을 두며, 덕에 웅거하며, 인에 의지하며, 예에 노닌다.
마음을 다스리는 첫번째 단계는 道를 닦는 것이다.
道를 닦으면 그 道를 통해 本性이 나타난다. 본성이 곧게 발휘되는 것이 德이다.
그러므로 도를 닦으면 덕을 실천할 수 있다.
덕을 실천하는 사람은 天命을 실천하는 사람이므로 남을 나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이른바 仁을 실천하는 것이다.
인을 실천하면 남과 내가 하나가 되고, 하늘과 내가 하나가 되며,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된다.
자연과 하나가 되면 느낌으로 살아가는 자연의 세계가 열린다. 느낌의 세계는 바로 藝術로 표현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藝에서 노닌다고 했다. 느낌의 세계는 의식으로 파악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