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詩 100

牧童詩

甘冥堂 2018. 4. 2. 07:07

052.牧童詩

黃庭堅

 

騎牛遠遠過前村 (기우원원과전촌) 소타고 멀리멀리 앞마을을 지나는 목동

短笛橫吹隔隴聞 (단적횡취격롱문) 짧은 피리를 비껴들고 불어도 언덕 넘어 들리네.

多少長安名利客 (다소장안명리객) 명예와 이익을 쫒는 장안의 무리들

機關用盡不如君 (기관용진불여군) 온몸과 머리를 다 써도 그대만은 못하리라

 

 

黃庭堅:(1045~ 1105)

자가 노직(魯直), 호는 산곡(山谷), 부옹(涪翁)이며, 분녕(分寧 = 현 강소성(江西省) 수수(修水))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경사백가(經史百家), 노장(老莊), 불학(佛學)에 관심을 두었고 소설 등을 읽고 시를 짓기도 했다.

교서랑(校書郞)으로서 신종실록(神宗實錄)의 검수관이 되었으나,

실록 수찬이 불성실하다는 죄명으로 부주(涪州)로 좌천당하여 그 곳에서 죽었다.

 

저술은 예장선생문집(豫章先生文集)30, 산곡전집(山谷全集)39, 산곡금취외편(山谷琴趣外篇)등이 있으며,

강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중심으로 한 시파를 이른바 '강서시파(江西詩派)'라고 하였다.

 

황정견의 가장 유명한 시가 이론은 '환골탈태(換骨脫胎)''점철성금(點鐵成金)', '요체(拗體)'의 주장이다.

'점철성금(點鐵成金)'의 뜻은 본래 신선이 무쇠에 손을 대어 금을 만든다는 술법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남의 글을 조금 다듬어서 훌륭한 글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요체'는 시를 지음에는 이미 정해진 작시법을 성실하게 준수하지만 정해진 작시법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음을 말한다.

'요체''요구(拗句)''요율(拗律)'의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되어진다. 예컨대,

 

'요구'5언시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상이하삼(上二下三)'으로 시구가 지어지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와는 달리 '상삼하이(上三下二)' 또는 '상일하사(上一下四)' 등으로 하는 경우이고,

7언시에서는 '상사하삼(上四下三)'이 일반적인 작시의 조구법(造句法)이지만,

그와는 달리 '상삼하사(上三下四)' 또는 '상이하오(上二下五)' 등으로 시구를 짓는 것과 같다. 그리고


'요율'은 다름 아닌 시 중의 평측(平仄)을 교환하는 것으로서 음률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역사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 2010. 3. 24., 다락원)

 

그는 수사와 꾸밈을 추구하고 깊이에 힘을 쏟아 강서시파의 조종(祖宗)으로 추대 받았다.

그는 두보를 추앙했으며, 학문에 있어서는 과거의 문장이나 시구를 빌려 자신의 학문을 도야하되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시인은 예술적 기교를 장악한 기초 위에서 그 기교의 속박을 벗어나

스스로 일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논리를 제기했다.

 

이러한 주장을 환골탈태(換骨奪胎)’·‘점철성금(點鐵成金)’이라 한다.

그는 유래가 없는 글자는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문장을 지을 때는 남의 뒤를 따르는 것을 가장 꺼려야 하며

스스로 일가를 이루어야 사실에 가깝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독특한 시가 스타일로 나름대로의 경지를 개척하여 소식과 더불어 소황(蘇黃)’이란 칭호를 얻기도 했다.

 

그는 산문도 잘 지었고 서법에도 능했는데,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3체를 모두 잘 써서 송사가(宋四家)’의 일원이 되었다.

시와 글씨 두 방면 모두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해서 시서쌍절이란 평가를 얻었다.

 

그는 소식의 문하로 장뢰, 조보지, 진관 등과 함께 소문사학사(蘇門四學士)’로 불린다.

 (중국인물사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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