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류

본받고 싶은 분의 인물사

甘冥堂 2020. 7. 6. 06:00

2020학년도 1학기

교과목명 : 근현 대속의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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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제 명 : 인물의 역사: 본받고 싶은 분의 인물사

 

1.인물의 역사: 김 봉순 여사를 선택하다.

 

김 봉순 여사는 필자의 가까운 친척으로 평상시 왕래가 잦아 서로 허물없이 지내던 분이셨다. 어릴 적부터 이분에게서 경제적 도움뿐 아니라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여러 모습들을 보면서 자랐다.

이분의 고향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돌고개라는 당시에는 아주 깊은 두메산골이었다. 가끔씩 이분을 숯이나 굽던 동네에서 태어나 이곳으로 시집을 오셨으니 출세하셨다며 놀리곤 했다. 내가 살던 곳은 경기도 고양시 신도면으로 서울과 인접한 시골마을이다.

 

김 여사는 1923년 가을 1남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비록 학교에는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특유의 총기로 세상 물정에 밝으셨다. 5.16 혁명 이후 시골마을에서 문맹퇴치 운동의 일환으로 야학을 개설하였는데, 야학에서 배운 한글로 자식들에게 편지도 쓰고, 일기도 쓰셨다.

 

2.결혼 후의 삶

시골 산속에서 비록 도시는 아니지만 서울 인접 마을로 시집을 왔다. 그때 나이가 16살이었다. 시집을 와 첫날밤을 치른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아침밥을 지으려 뒤주를 여니 쌀이 한 톨도 없었다. 그 순간의 난감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시할머니 시부모에 시동생. 시누이 등 대 식구가 살면서 먹을 쌀이 없다니...

 

그날부터 새색시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마을 일을 하러 다녀야 했다. 남의 논밭에 나가 품팔이를 해야 겨우 식구들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다. 이런 고생을 5~6년간 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해방이 되어 일제가 물러갈 때 일본인들이 경작하던 논을 어렵사리 불하를 받았다. 거의 천운이었다. 이 논에 온 집안 식구들이 매달려 일을 하여 적산 불하대금을 갚아나갔다. 이때부터 굶지 않을 정도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3. 6.25 전쟁과 피난 생활

생활이 조금씩 안정이 되어가던 1950년 동족상잔의 6.25비극이 터졌다. 남편은 국민병으로 시동생은 국군에 징집되었다. 이 와중에 남편이 인민군에게 포로가 되어 끌려가다가 개성 근방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남의 눈을 피하여 다락방에서 또는 이웃집 다락에서 숨어 살기를 1.4후퇴 때까지 계속했다.

 

4. 6.25 수난

미처 피난도 못 간 상태에서 인민군과 마을 공산조직들이 남편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아무리 마을을 뒤져도 찾지를 못하자 시아버지를 붙잡아서 문초를 하기 시작했다. 끝내 입을 열지 않자, 심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그것도 마을 한가운데 이 씨 집 툇마루에서, 동네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마지막에는 차마 눈뜨고는 못 볼 상황이 벌어졌다. 도끼로 시아버지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찍었다. 순간 온 마룻바닥에 핏덩이가 튀고 시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셨다. 김 여사도 이 모습을 보았다. 즉시 달려가 죽은 시아버지를 업고 집으로 달려왔다. 시아버지는 겨우 숨을 쉬었다.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아들 하나 지키려고 그 모진 매질과 도끼질을 당하다니 참으로 슬픈 정경이었다.

 

피난을 가서도 도망 다니기에 바쁜 남편 대신, 몸소 소마차를 끌고 온 집안 식구들을 이끌고 피난을 가야 했다. 이 와중에 아들 둘을 잃었다. 시할머니, 시부모와 아들 딸 셋을 데리고, 거기에 작은집 시댁 식구들까지 한꺼번에 피난을 가던 중에 또 하나의 생명을 분만해야 했다. 어린 아들은 홍역으로 피골이 상접하여 죽을 날만 기다리는데 여기에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다니,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피란도 멀리 못 가고 평택인근까지 밖에 갈 수가 없었다. 서울이 수복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으나 살던 집은 불에 타 없어지고, 몰래 땅속에 감추어 두었던 식량도 모두 없어진 상태였다. 또 다시 고난의 세월이 닥쳐왔으나, 다행히도 논밭은 그대로 있기에 그것에 의지하여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었다.

 

5.수복 후의 생활

우선 급한 것이 살 집이었다. 그때만 해도 시골 사람들의 인심이 좋아서, 온 동네 분들이 힘을 합해 집을 지었다. 필자도 그때 어린 나이에 마을 분들이 밤중에 횃불을 들고 에헤라 달고~”하며 지경을 닦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군대에 갔던 시동생이 제대를 했다. 시누이를 결혼시켜야 했다. 얼마 후 시동생도 결혼을 시켰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집안에 크고 작은 일이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아들을 세 명이나 더 낳아 모두 52녀가 되었다. 6.25 때 죽은 사내애 둘을 빼고 7남매를 길렀다. 얼마 후 90이 넘은 시할머니도 돌아가셨다. 이제 집안이 정리가 되어갔다. 다행인 것은 식구들 모두가 잔병치레 없이 건강한 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6. 인심 좋은 일상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마을에 봇짐장수 등 행상들이 많이 찾아왔다. 소금장수. 생선. 건어물 장수. 고기 부속인 수구레 장수 등이었다. 이들은 매달 거의 정해진 날에 마을을 들렸다. 그때마다 들르는 집이 있다. 김 여사 집이다.

이 집에서도 어찌 장사꾼들이 올 때마다 물건을 사겠는가? 물건을 사던 안 사던 장사꾼이 이집을 들르면 반드시 밥상을 차려 내었다. 물론 변변치 않은 소찬이지만, 장사하시는 분들은 이 밥을 맛있게 먹었다. 세상인심이 이랬었고 김 여사는 항상 그들에게 정성을 베풀었다.

 

마을에 크고 작은 행사에 모두 참여를 하였고, 또 남들 고생하는 것을 보면 마음 아파 하셨다. 동네 분들이 말했다. “이 마을 사람 치고 이 집 신세 안 진 사람 없다”고 했다.

가을 추수 후에는 고사떡을 해서 온 동네에 나누었고, 동네 대소사에 빠짐없이 참여했다.

살림이 넉넉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아이들 학비가 없어 동네 이웃들에게 매번 돈을 빌리러 다녔다. 물론 가을 추수 후에 갚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닌 매번 그렇게 쩔쩔매며 살았다. 인심이란 생활이 넉넉하다고 베푸는 게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7.자식교육

7남매를 먹여 살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자식들 교육 또한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시누이와 큰 딸은 초등학교만 겨우 나왔고, 나머지는 중고등학교만 겨우 졸업시켰다. 당시만 해도 고등학교 교육도 웬만한 집에서는 엄두도 못 낼 시절이었지만, 후에 애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셨다.

 

아이들 중 두 명은 시골에서 농사짓는 걸 원치 않아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어린애들을 초등학교부터 이모, 고모 댁으로 보냈다. 그 어린것들은 아무것도 모른 체 부모 곁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 아이들도 결국은 고등학교에서 끝내야 했다. 시골 형편이 대학을 보낼 형편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뜻을 저버리지 않아 나름대로 공부를 이어가기도 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도 하였다. 그때부터 시골 농부의 생활은 서서히 접어야 했다. 일할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나이 들어 더 이상 농사를 지을 형편이 안 되어서였다.

 

8.노년의 생활

세월은 흘러 환갑이 되었다. 동네 한가운데 잔치 상을 벌여 한창 흥이 나던 순간, 그만 전두환 대통령이 버마 국빈방문 중에 폭탄테러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잔치는 순식간에 엉망이 되고 그만 파하고야 말았다.

 

팔순이 되었다. 마을 분들이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김 여사의 건강상태가 상당히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들들에게 연락을 하여 병원에 입원을 시키게 했다. 결과는 매우 실망적이었다. 암 말기였다. 병원에서도 불치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 상태로 생을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 아들들이 김 여사의 팔순잔치를 열었다. 영문을 모르는 분들이 모두 축하를 하는데 당사자나 자식들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자식 된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일 년쯤 지나 뽕나무 오디가 떨어지던 어느 봄날 그만 영면하셨다. 향년 81세 셨다.

 

9. 맺으며

한 사람의 인생을 단순하게 요약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실감한다. 바로 내 이웃에 사시던, 그리고 평소 좋아하고 존경하던 분에 대한 얘기를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끝내야 하는 게 안타깝다.

 

우리의 삶이란, 무엇 하나 제대로 내세울 것도 없는,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한 인생이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산다는 게 무엇인가? 남에게 존경받는 삶만이 진정한 삶인가? 무수히 많은, 하늘의 별보다 많은 사연들을 품고 살면서, 그 마음 중 과연 몇 퍼센트나 밖으로 드러났는가? 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자신과 가족과 지역사회와 얼마큼 어울리며 조화롭게 살았는가?

 

어머니같이 곁에서 모시던 분에게 혹 본의 아닌 결례가 되지는 않았는지,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지내시길 간절히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