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류

일제강점기 기차를 둘러싼 문화와 내가 직접 경험한 한국의

甘冥堂 2020. 7. 6. 06:10

2020학년도 1학기 기말시험(온라인평가) 제출용

과제1. 일제강점기 기차를 둘러싼 문화와 내가 직접 경험한(처음으로 또는 가장 기억에 남는) 한국의 기차문화를 비교할 것.

 

1899918일 노량진과 제물포를 잇는 33.5km의 철길이 열렸다. 곧이어 19007월에 한강철교가 준공됨에 따라 기차가 인천에서 서대문까지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김기수는 기차를 화륜거(火輪車)라고 불렀다. 기차가 빠르면서도 편안한 것에 놀랐다. 최초 미국 유학생 유길준도 중기차에 한번 타기만 하면 바람을 타고 가거나 구름 위로 솟아오르는 듯한 황홀한 기분을 맛보게 한다.”고 했다.

기차는 이곳저곳을 달리며 문명을 전파하는 진보의 상징이었지만 일본 제국주의 팽창을 위한 길이기도 했다. 군사적 목적이 강했으며 약탈적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기차가 바꾸어 놓은 것 중. 조선의 상권을 바꾸어 놓았고, 사람들에게 시간관념을 심어 주었고, 여행. 거리감각을 달리하게 만들었으며, 출신, 성별, 나이를 문제 삼지 않는 평등사상의 전파자등 우리의 문화를 바꾸어 놓았다.

 

시골출신인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야 기차를 타 보았다. 그 전까지는 사진을 통해 기차구경을 한 것이 전부였다. 처음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던 날, 친구들과 마주 앉아 잘 치지도 못하는 기타를 치며 노래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짓이었지만, 당시 60년대에는 기차에서 노래를 불러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때였던 것이다.

 

 

과제2. 일제강점기 식당과 배달문화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식당, 배달문화의 양상을 비교할 것.

 

중국 음식점이 일본 보다 먼저 조선에 생겼다. 1882년 임오군란 때 군인과 함께 온 중국 상인이 들어오면서 중국 음식점도 따라 들어왔다. 일본 요릿집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뒤인 1895년에 진고개에 처음 생겼다. 고급 요릿집에서 특별한 음식을 먹는 특권층도 있었는데, 요릿집이란 조선 요리를 제공할 뿐 아니라 기생의 기예를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유흥공간이었다. 명월관이 1904년 처음 등장하였고 경성에 요릿집이 많이 생겼다.

때로는 음식을 집으로 배달해서 먹는 사람도 있었다. 소설에서는 자장면을 배달해서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서울 명물인 설렁탕을 배달하는 사람과 좁은 거리에서 자전차(자전거)를 타고 바람같이 달려가는 일본인 배달부, 종로 네거리로 가로세로 달리며 냉면과 장국밥을 돌리는 배달 전문업이 있다고 적었다(신민 19278)

 

외식문화가 발달하여 배달의 민족’, ‘요기요등 배달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가 성업 중이다. 특히 요즘 같은 코로나 비상사태에서 굳이 음식점을 가지 않고도 집안에서 주문해 먹는 소위 비대면 풍조가 널리 퍼지면서 배달업은 더욱 크게 늘어날 것 같다.

 

 

과제3. 일제강점기 새로운 패션과 오늘날 내가 즐기는 패션과 비교할 것

 

의복은 제2의 피부다. 옷이 날개라는 말도 있듯, 옷은 남과 자신을 구별하고 사람의 기분과 지식수준, 신념이나 태도를 보여준다. 또 사회적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화기에 복식에 큰 변화가 생겼다. 옷차림이 바뀌었다는 것은 삶의 방식이 바뀌고 의식이 바뀌었음을 뜻한다. 우리나라 의생활에서 별기군이 서양 복식을 처음으로 받아 들였다. 의제개혁, 을미의제개혁 등으로 거추장스러운 옷을 간편한 옷으로 바꾸도록 했다. 1920년대 양복이 의생활 문화에 한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유학생이 들어오면서 양복이 크게 번졌다. 여성의 양장은 양복보다 늦게 보급되었다.

유행은 가장 먼저 의복과 신발부터 시작해서 머리모양. 음악. 취미 등 각 영역에서 사람들의 겉모습과 태도를 바꾸어갔다. 일제는 우리의 흰옷을 못 입게 하고 검은색의 옷을 입게 하였으며, 국민복과 몸빼를 입게 하였다.

 

오늘날 패션에서도 벌이는 시원치 않아도 겉모습은 사치스럽게 해야 한다는 이상한 풍조가 널리 퍼져있다. 이 어려운 코로나 시대에도 명품을 할인해서 판매한다는 백화점엔 새벽부터 인파가 몰려들고, 영업개시와 동시에 상품이 품절되는 사례가 속출한다고 신문에 소개되기도 한다.

 

패션이나 명품도 사용자의 형편이나 능력에 맞아야한다. 구찌가방에는 명품 화장품이나 멋진 소품이 들어 있어야 격에 어울리는데, 그 비싼 가방에 시어머니가 싸 준 청국장이나 새우젓이 들어있으면 과연 어울리겠는가? 검소에서 사치하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하기는 어렵다고 일찍이 司馬光이 말했다.

 

 

과제4.일제강점기 현모양처의 여성상과 내가 생각하는 부부상을 비교할 것

 

조선사회에서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여러 규범을 여

성에게 주입시켰다. 여성은 어려서는 집안의 효성스런 딸이 되고, 결혼한 뒤에는 어질고 정숙한 아내가 되며, 자녀를 낳으면 지혜로운 어머니가 되고, 과부가 되면 정절을 지켜야 되고 환난을 당하면 열녀가 되어서 가문의 명예를 빛내야 했다. 조선 여성은 시부모를 모시고 제사를 잘 받들며 가문의 대를 이어 집안을 화평하게 이끄는 가문의 며느리가 되어야 했다. 그뿐 아니라 온갖 노동을 떠안아야 했다. 옷을 만들고 밥을 지었으며 농사철엔 씨 뿌리고 김매기를 해야 했다. 그러나 여성의 가사노동이 가족과 사회의 재생산에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남존여비의 사회규범 속에서도 부인은 남성이 결코 침범하거나 간섭할 수 없는 경제영역을 확보하는 등 나름대로 지위를 확보하였다.

 

사회가 많이 변했어도 변치 않는 한 가지는 남녀 모두는 가정을 꾸리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홀로 사는 싱글 족들이 늘어나는 추세이긴 해도, 어떤 자연의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현모양처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부부가 자식 낳고 해로하며 평생을 함께 산다는 것, 그것이 현모양처이며, 그러한 삶 이상의 행복이 어디 있겠나?

 

 

과제5.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받은 초등교육과 내가 직접 받거나 지켜본 오늘날 초등교육을 비교할 것

 

보통학교에 들어간 어린이는 교과서 외에 갖가지 규칙과 심득(心得)’을 익혀 국가와 사회가 바라는 인간이 되어야 했다. 황국신민화 교육정책 탓에 보통학교는 군국주의 전시장이 되었다. 교사의 통제아래 수업을 받았으며 모두가 똑같은 내용을 한꺼번에 전달받았다. 교사는 학생을 자주 검열했다. 이는 학생을 식민지 지배체제의 일상적인 감시에 익숙하게 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인고단련이라는 구호 아래 건강 체조, 군가 부르기. 집총교련, 황국신민체조를 했다. 상급생이 하급생에게 훈시를 하는 등의 복종 훈련도 학교에서 이루어졌다.

 

1950년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매주 월요일 아침 조회를 했다. 전교생이 운동장에 질서정연하게 모여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그리고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들었다. 중학교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 조회가 없어졌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학교에 규율부가 있었다. 아침에 등교할 때 교문 좌우에 늘어서서는 학생들 복장 검사를 하기도 하고, 지각을 하면 엎드려 뻗혀기합을 주고 빠따도 쳤다. 또 선배에게 감히 대들지 못하고, 어떤 때에는 가방 모찌를 해야만 했다. 일제의 잔재였다.

 

 

과제6. 한말 일제강점기 유행했던 체육 스포츠 중 현재 내가 즐기거나 비교적 관심있는 한 종목을 선택하여 그 양상과 비교할 것

 

198652일 관립 영어학교에서 영국인 교사인 허치슨과 학생들이 동소문 밖 삼선평으로 화류(花流)를 간 것이 운동회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운동회는 체조가 가장 중요했다. 운동회의 경기는 육상종목과 오락 종목으로 나뉘었다. 운동회는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커져서 마침내 각 학교 연합운동회로 발전되었다. 운동회에서는 태극기를 걸고 지식인이 애국심을 드높이는 연설을 했고, 만세삼창을 했다. 일제는 학교운동회가 국가방어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운동회를 못하게 했다.

 

서구의 선교사나 외교관 또는 해외 유학생이 근대 스포츠를 이 땅에 소개했다. 스포츠란 규칙이 지배하는 경쟁적인 신체활동을 일컫는다. 1900년 초 야구와 축구. 자전거경기와 유도, 농구. 빙상과 정구. 기병경마회와 궁도가 차례로 이 땅에 들어왔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우승을 했다. 일장기를 지우고 시상대에 올라 곤욕을 치루기도 했음을 잊지 않는다.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의 마라톤 올림픽 우승은 우리나라 체육의 저력을 세계에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도 육상을 좋아한다. 육상 중에서도 마라톤을 좋아하여 지금도 일 년에 두어 번씩 마라톤 대회에 나간다. 비록 힘에 부쳐 단축마라톤에 참가하지만, 그 어릴 적 시골 학교 운동회에서 마을 형들, 삼촌들이 마라톤을 하면 쫒아 다니며 응원하고 물을 떠다 주던 기억이 새롭다.

 

 

과제7. 일제강점기 영화 또는 극장의 모습과 오늘날의 내가 가본 영화, 극장의 모습을 비교할 것

 

1895년 무렵 서울에 극장이 처음 들어왔다. 조선 정부는 1902년 고종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려고 협률사를 세웠다. 소위 국립극장이었다. 이후 광무대와 단성사가 설립되고 1907년부터 경성 이곳저곳에 극장이 생겼다. 1910년대 극장은 상..하로 좌석을 나누고 부인석은 따로 2층에 마련했다. 극장은 식민지 조선인에게 신기한 볼거리를 제공해주는 꿈의 공간이었다. 맨 처음 한국영화는 1919년 연쇄극 형태로 상영한 의리적 구토였다. 이후 1926년 나운규가 감독. 각본. 주연을 맡은 아리랑은 한국영화사의 기념비와 같은 작품이었다. 조선 최초의 토키영화 춘향전1935년에 개봉해 큰 관심을 끌었다. 많은 사람들이 춘향전으로 보려고 단성사로 몰려들었다.

 

19934월 단성사에서 개봉한 영화 서편제를 볼 때였다. 영화를 보면서 무엇이 그리 슬펐는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꺼억꺼억 흐느끼며 어깨를 들먹이기도 했는데, 옆에 앉은 이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2014년 다큐영화인 임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보면서도 왜 그리 눈물이 나는지 참을 수가 없었다. 감정에 수분이 많아 별것 아닌 장면에서도 눈물을 흘리니, 혹 지나치게 영화에 심취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참고자료

1.근현대속의 한국(송찬섭 외) knou press (2019.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