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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본의 동남아 진출이 갖는 역사적 의의2.이슬람교가 창시된 이후 이슬람제국의 대외정복활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하여3.19세기 말 라틴아메리카의 유럽화 기획에 대하여

甘冥堂 2020. 11. 9. 09:56

1.일본의 동남아 진출이 갖는 역사적 의의

 

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의 동남아시아로의 진출 동기는 동남아시아에서의 풍부한 농수산물, 지하자원. 수력발전의 전기 에너지를 확보하려는 경제적 목적과 아시아에서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일본의 남방진출은 19407월 베트남 북부에 대한 공격과 8월 하노이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이어 남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역시 일본의 영향권에 속하게 되었으며, 미국 진주만 기습 후에 일본은 필리핀 마닐라를 점령했고, 19424월에는 필리핀-미국 연합군에게 항복을 받아냈다. 태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어 위협에서 회피하였으나, 19422월에는 말레이반도와 싱가포르를, 3월에는 인도네시아를 접수하고, 7월에는 미얀마마저 점령하여 동남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 지배가 완성되었다.

 

19458월의 패전까지 지속된 일본의 동남아시아 점령이 동남아시아 역사에서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

한 가지 견해는 수십 년에서 수백 년간 지속된 백인 통치에 종지부를 찍고, 이로써 동남아시아를 서구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데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남아 여러 나라들이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상황은, 그것은 대부분 일본 점령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요인들 때문이지, 일본의 점령 덕분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미국과 필리핀은 1930년대 중엽에 이미 독립을 구체적으로 약속한 바 있고, 미얀마는 1930년 중엽부터 정치적 자율권을 획득한 상태였다.

 

일본은 점령기간 동안 동남아시아의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며, 베트남 북부에서는 약 100만 명이 굶어 죽었는데 이는 곡물 수탈이 그 원인이었다. 또한 청년이나 여자들은 일본군의 총알받이나 정신대 위안부로 끌고 갔다. 일본인들의 만행은 많은 나라들에서 반일무장투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전쟁기간동안 엘리트들과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전쟁말기에 이들로 하여금 독립을 선포하도록 종용하고 허용까지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동아공영권내에서의 독립에 불과했다.

 

 

2.이슬람교가 창시된 이후 이슬람제국의 대외정복활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하여

 

632년 무함마드가 타계한 후에도 성장을 계속한 이슬람공동체는 칼리프를 수장으로 본격적인 대외정복전쟁을 시작하였다. 불과 10년 만에 시리아와 이집트 정복에 이어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키며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러한 급격한 정복사업은 부족들 간의 이견과 대립을 초래했고, 정통 칼리프들의 연속적인 암살로 난국을 맞아 결국 우마이야 왕조는 압바스 왕조에게 권력을 내주게 되었다.

 

압바스 왕조(750~1258)는 비아랍계 개종자와 시아파 세력과의 결탁, 그리고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남부 아랍인들까지 가세함으로써 범이슬람 제국을 지향하게 되었다.

또한 비아랍인들의 아랍화가 활발히 추진되어 아랍, 시리아, 페르시아적인 요소들이 골고루 융합된 보다 폭넓은 이슬람문화가 발전하여 그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정복민으로서의 아랍민족 우월주의는 퇴색하고 이슬람의 전파자, 수호자로서의 아랍인, 즉 인종적 의미의 아랍인에서 아랍어를 사용하고 이슬람을 믿으며 스스로 아랍인으로 자칭하는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문화적 개념의 아랍인이 보편화 되었다. 이런 아랍화 물결은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전역에 번져, 오늘날의 아랍권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압바스 왕조는 수도를 아랍 중심의 다마스쿠스에서 페르시아 문화의 바탕인 바그다드로 옮겼다. 흔히 우마이야조까지를 아랍인이 이민족을 지배한 아랍제국 시대로 칭한 반면, 압바스 왕조를 이슬람제국이라고 부르고 있다.

 

압바스 왕조는 5대 칼리프 하룬 알-라시드(재위 786~809)와 그의 아들 마문(재위 813~832)시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이때 바그다드는 당나라 수도 장안과 함께 세계 교역과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하였고 육해상 실크로드의 개척으로 동서문물이 물밀듯이 유입되었으며, 이때 제지술이 도입되어 그리스. 로마의 고전이 재해석되고 학문이 꽃피워 이슬람의 르네상스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압바스 왕조도 제국의 영토가 방대하고 중앙정부의 내분과 지방 총독들의 할거, 이민족은 잦은 침입 등으로 9세기 중엽부터 급격히 쇠약해졌다. 우마이야 일파가 스페인에 세운 후 우마이야조의 통치자가 969년 스스로 칼리프로 자칭하며 바그다드에 맞섰고, 이집트에서는 시아파에 의한 새로운 이슬람국가가 독립하여 파티마 왕조를 열었다. 또한 이란계와 투르크계 군소 국가들이 성장하였다. 투르크계로서는 카라한조와 가즈나조가 특히 중요한데, 이 왕조가 이슬람화하면서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종족들의 이슬람화가 가속화되었다. 이어 팔레스타인 점령과 비잔틴 제국의 압박으로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였고 후반에는 몽골이 침략하여 1256년 멸망하고 말았다.

 

 

3.19세기 말 라틴아메리카의 유럽화 기획에 대하여

 

1852년 아르헨티나에서는 로사스가 실각한 후 내륙지방과 부에노스아이레스 사이의 충돌이 격화되었고, 1850년대 중반 멕시코에서는 자유주의 세력과 보수파의 대립이 격화되어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1860년대 말에 이르러 정치적 혼란과 지역 간 갈등이 완화되고 지방의 카우디요들은 점차 정치 엘리트로 변모했다. 1870년대 멕시코의 중앙집권적인 과두지배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라틴아메리카 지배층의 유럽화 전략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지배 엘리트층은 질서와 진보를 표방하면서 유럽을 본보기로 삼아 프랑스와 앵글로색슨 지역의 도시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을 뿐 아니라, 인종적 개조를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원주민과 혼혈인을 근대화의 장애물로 파악한 이들은 라틴아메리카를 표백하고자 유럽인들의 대규모 유입을 추진했다. 나아가 내륙의 원주민에 대한 대대적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철도망의 확대와 전신의 발달에 힘입어, 칠레에서는 정복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던 아라우칸족이 증기기관차와 소총에 의해 제압당했고, 디아스 정권은 북부의 야키족과

마요족을 학살하거나 유카탄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페루에서도 엘리트층은 원주민 문화를 열등성의 근원으로 인식하고 유럽을 지향하는 문화적 개조에 박차를 가했다.

 

19세기 말에는 특히 프랑스 문화가 라틴아메리카 엘리트층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어, 급기야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상파울루는 남아메리카의 파리로 탈바꿈했다. 상류층들은 돈 쓰는 방법, 의복, 생활양식, 건축양식, 문화에 대한 애호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개념의 유행까지 유럽의 감각을 모방했다.

브라질은 중앙정부 차원에서 수백만 명의 유럽인을 유치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1860~1930년에 아르헨티나에만 600만 명이 넘는 유럽인들이 유입되었으며,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는 이주민 국가가 되었다.

대부분 20~40대 에스파냐인과 이탈리아인들로 구성된 이주민의 80%이상이 대륙의 드넓은 팜파스(평원)에 정착했다. 이러한 인구변화를 통해 아르헨티나는 말과 쇠고기의 주요 수출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상으로 일본의 동남아 진출이 갖는 역사적 의의와, 이슬람교가 창시된 이후 이슬람제국의 대외정복활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하여, 그리고 19세기 말 라틴아메리카의 유럽화 기획에 대한 요약을 마친다.